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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착한 사람은 없다.

by 격암(강국진) 2011. 12. 11.

2011.12.11

 

우리는 흔히 좋은 세상이란 착한 사람이 많고 인간적인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지만 모든 말이 그렇듯이 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말하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란 없다. 오직 자신이 알고 믿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신뢰라는 측면에서 말해보면 사람들중에는 다른 사람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표현할수있다.

 

여기서 문제의 중대한 측면이 들어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뢰가 넘치는 사회가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란 것을 알고 있다. 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좋은 세상인 것처럼. 사실 요즘 세상에 신뢰란 돈 그자체다. 사람들이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그 돈 말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불신에 가득하다. 우리는 뭐가 좋은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단 왜 이런가에 대해서는 덮어두자. 왠만큼은 누구나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다시말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뭐가 좋은 지 몰라서 그렇게 안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봐야 헛 짓이다. 누가 그걸 모른다던가. 그건 마치 누군가는 세상에 나쁜 사람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럼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 왜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가 없을까. 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가 없을까. 답이 아닌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것은 세상이 나쁜 사람때문에 불행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란 일반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차라리 이교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게 더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건 비유다. 물론 나는 통상 말하는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해 믿는게 다르다.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자식을 죽인 사람이 스스로 혼자서 종교에 의존하여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자 아이의 엄마는 니가 뭔데 용서를 받는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은 업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불교도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 세상이 나쁜 사람때문에 불행하다고 믿는 것은 마치 기독교도가 불교도 때문에 세상이 나쁘다고 믿거나 그 반대 인것과 같다. 그것은 종종 이교도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불교도를 힘으로 박멸하거나 혹은 모든 기독교도를 힘으로 박멸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가져올수는 없다. 실은 그런 식의 사고는 결국 더 많은 원한과 미움만 만들어 내서 '나쁜 사람'따위는 신경쓰고 살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세상을 만든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사회적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고 믿지 못하고 하는 것은 많은 경험과 많은 편견과 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철학, 정신적 구조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호랑이가 참치를 만나 서로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너는 왜 풀밭에서 뛰지 못하냐 겁쟁이가 아니냐 운운한다고 해서 참치가 풀밭에서 뛰게 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가. 어떤 종교도 배척하지 않을 수 있는 더 큰 정신적 구조를 받아들여야 그럴수 있다. 이건 말하자면 새로운 종교의 포교와 전도다. 그리고 종교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다른 종교를 포교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성의 종교를 해체하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교를 해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이루고 있는 근거들을 자세히 살피고 그것을 보다 더 깊고 보다 더 융통성있는 근거로 대체해 넣는 것이다. 각각의 종교들을 심화해서 하나의 믿음아래서 공존할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소통한 만큼만 행복해 질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행복교를 전파해서 천하통일을 이룩함으로서만 사회적으로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물론 그 행복에 대한 이론은 기성의 모든 믿음을 무리없이 같이 포용할 수 있는 고민속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열심히 포교하고 전도하는게 필요하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들을 없앤만큼만 행복해 질 수 있는게 아니다. 유태인을 없애고자 했던 히틀러를 생각해 보라. 과연 그렇게 좋은 세상이 올 수 있던가. 히틀러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망가지게 된다. 나는 결코 불교와 기독교같은 구체적인 종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게 아니지만 스님과 신부가 평안하게 공존하며 서로의 종교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게 아니라고 말하는 광경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그런게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신뢰가 넘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사실 세상에는 종교로 인식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인게 많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는 아파트교라는 교도 있다. 그것은 행복은 아파트를 사야 이룩된다고 믿는 종교다. 아파트교건 토건교건 무슨 다른 어떤 믿음이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객관적 정보를 내놓으면서 객관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그 본질이 종교이며 믿음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불교도나 기독교도를 과학적 증거로 개종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내가 보기엔 옳은 일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를 믿으면서 깊은 고민과 성찰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도 있고 종교가 없으면서 그런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인 사람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종종 노인들과 대화하며 다툰다. 경상도가 전라도와 다투고 육지사람들은 제주도와 다툰다고 들었다. 그 다툼은 그들의 삶이 그들의 지역과 또 그에 기반한 인맥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그들의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아니 그들의 종교가 바뀌지 않는 한 객관적 지적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매우 답답해 한다. 마치 불속에 손을 넣었다가 손을 데면 다시 손을 빼고 그러다가 다시 손을 집어넣는 사람을 보는 것같다. 그 불이 너를 태워죽이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 사람이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믿지 않으려고 한다. 삐뚤어진 생각이 삐뚤어진 삶을 낳는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믿는 만큼 힘을 낼 수 있다. 

 

세상이 행복해 지려면 행복교가 창시되고 행복교가 전도되고 행복교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삼보라해서 불법승을 말한다. 불은 부처고 법은 불법이며 승은 부처의 제자다. 행복교도 그런게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는 교회가 있다. 행복교도 그런게 있으면 좋을 것이다. 대학이나 학교가 그런 역할을 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에 존재하는 세상은 산산히 갈라져만 있고 모두가 소통하고 공감할 행복교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 행복교가 없으니 법도 없고 제자도 없다. 이런 것을 뒤로 하고 나쁜 사람들과 열심히 싸워 좋은 세상만든다는 것은 자기 구역 보존에 열심인 조폭들이 다른 조폭과 싸워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도 나쁜 다른 조폭에게서 보호해 준다며 보호비를 뜯어내지만 실은 그들은 그저 착취하는 나쁜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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