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3.
보스턴님이라는 분이 쓴 글에 댓글을 달다가 우리는 왜 불행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하게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기회가 생기고 그럴 분위기가 생길때 우리는 왜 불행할까라고 질문을 던져본다던가,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왜 불행한가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이런 질문은 던지기 쑥쓰럽거나 상대방의 조롱을 받거나 심지어 화를 내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질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 질문이 절박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은 누가 뭐래도 누구에게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으니까요. 핵심적인 질문인데도 왜 그런 질문을 던지기 쑥쓰럽거나 상대방의 조롱을 받거나 심지어 화를 내게 만들수도 있을까요. 우리를 둘러싼 환경, 문화, 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그 질문을 무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은 던지지 마라. 그런 질문은 하찮은 것이다. 그런 질문은 어차피 답이 없다.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으면 오히려 불행해 진다.
이런 들리지 않지만 귀가 터지게 들려오는 문화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게 합니다.
실상 우리는 왜 불행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 질문에 정답을 알아내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해하게 만드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와 너의 본질을 들어내 보여준달까요.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질문을 회피하는지 모릅니다. 본능적으로 벌거벗은 모습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생활고에 찌든 분들이 모여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아이 날마다 머리벗겨지게 뛰어다니고 먹고살 걱정하느라 바쁘니까 불행하지. 뻔한거 아냐. 등따시고 배부르면 누가 불행하겠어라고 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예측할 수 있는 답이라도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귀로 듣는게 중요할 것입니다. 뻔한 것같지만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입으로 들으면 두가지 현상이 생깁니다. 하나는 도대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섬뜩하게 깨닫는 겁니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아 나는 이런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의 확인이랄까요. 또하나는 그런데 정말 이게 맞아? 이게 다야?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이것은 자기의 부정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저는 거의 날마다 글을 씁니다. 그 글은 저에게 던지는 질문일 때가 대부분이며 제가 스스로 읽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저는 쓰면서 제가 읽고 아 그랬구나 하면서 씁니다. 저는 스스로 구체적 상황에서 저의 의견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아 그런거였어라고 쓰고, 쓰고나서 다시 읽으면서 이게 다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늘상 경험하는 일이므로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생길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질문은 이 글을 쓰는 저는 왜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불행한것은 철학과 습관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충실감과 수련이 행복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는 이해와 체험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어떤 한 문장 예를 들어 나는 내적인 충실감과 수련이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한번 외치는 걸로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또 사실입니다.
행복한 3류작가도 불행한 베스트셀러 작가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3류작가는 무수한 실망과 고초때문에 분명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에게는 저 바닥에 끈끈히 존재하는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가 작가라는 것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작가로 사는 것이 나의 사는 방식이며 나는 작가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3류작가는 아직 성공하지 않은, 아직 사회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않은 작가일뿐 입니다. 설사 평생 한번도 평가받지 못해도, 한번도 베스트셀러작품을 만들 수 없었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그 작가는 만족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불행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반대겠죠. 어쩌다 베스트셀러를 쓰기는 했으나 그는 자기가 작가이어야만 하는지, 계속 작가일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자기가 쓴 작품에 대한 자부심도 없습니다. 계속 쓰면 돈은 벌겠으나 그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인지 확신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정신차려보면 시간도 돈도 명예도 다 없어지고 자신의 삶이 낭비된 것으로 밝혀지지 않을까, 자신이 입고 있는 가짜의 옷이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만 할것입니다.
꿈이란 그래서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꿈이란 건 믿음이고 선언이랄까요. 진정 순수하게 꿈을 가질 수 있다면 꿈이란 꿈을 꾸는 순간 성취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건 나는 뭐뭐뭐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나는 뭐뭐뭐라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정말로 믿으면 믿는 순간 꿈은 성취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이 꾸는 순간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사회봉사를 의미하고 있다면 그렇게 살기로 한순간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는 아직 사회적으로 대통령이라고 불리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그 이름을 통해 권력과 욕망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 꿈을 진지하게 진짜로 믿는다면 심지어 그 경우도 그는 그것으로 이어지는 길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작가도 과학자도 댄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는 작가라고 하면 작가인 것입니다. 나는 과학자라고 하면 과학자인 것이고 나는 댄서라고 하면 댄서인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면 그것을 믿으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도 춤을 춰보지 않았어도 나는 댄서다라고 하면 댄서인것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에 후회가 없으면 외적인 고통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디빌더가 되려면 체력단련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원하지 않는데 강요될때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학자가 되기로 했다면 과학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과학이란 무엇인가의 본질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당신의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하고 싶었던 과학과는 다른 것일수 있습니다. 단지 남들이 당신을 과학자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당신은 이게 과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은 그걸 댄서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뭐라고 부르건 자신이 믿는 것을 하는게 중요하지 남들이 부르는 이름에 쫒아가는 게 핵심일 수는 없습니다.
본질을 고민하지 않으면 당신은 댄서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매춘이나 다름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을 수 있고 당신은 대통령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을 수 있으며 당신이 재벌이나 권력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시장터에서 먹지도 못하는 개불같은 것을 삼키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 본질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저는 장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 장인이 될때 우리는 뭐뭐하는 특별한 사람에서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리만드는 장인은 피리를 안 만들어도 피리만드는 장인일 뿐만 아니라 피리만드는 일이 아닌 일에 대해서도 나름의 통찰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피리만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를 찾아서 헤매는것처럼보입니다. 저라고 건방지게 특별히 예외라고 할 의도는 없습니다. 저도 불안과 불신과 껍데기의 유혹에 날마다 부딪힙니다. 언젠가 제가 쓴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쾌락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기대라고. 쾌락이 나쁜게 아니라 어떤 것이 주는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진 상태가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거품이고 껍데기죠. 거품과 껍데기를 뚫고 바라볼 통찰력과 힘을 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믿음입니다. 더하여 알맹이에 대한 고민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다보면 저의 삶의 모습이 더이상 거품과 껍데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형태로 조정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으며 우리는 모두 다른 길을 걷지만 같은데서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길은 사실 혼자서 걷는 길이 아닙니다. 거품과 껍데기는 우리 자신들에게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괴상한 문화가 설쳐대는데 내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있는한 거품과 껍데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문화를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데 꼭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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