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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한국의 변화 그리고 장년층의 욕망과 절망

by 격암(강국진) 2012. 4. 18.

미래의 한국이 응당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뭐라고 믿고 있건간에 개혁은 그렇게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개혁이란 어떤 특정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중의 하나가 좋은 사람을 뽑으면 그것만으로 세상이 잘돌아갈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충분한 것일수가 없습니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소달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달구지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는 응당 자동차를 타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소달구지에 자동차 핸들을 달거나 브레이크 등을 달거나 자동차 구동축을 달거나 개솔린 탱크를 달면 소달구지가 빨리 갈까요? 


소달구지에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방해가 될뿐입니다. 소달구지가 비틀거리면 우리가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새로운 부품들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핸들과 브레이크와 자동차 구동축과 개솔린 탱크가 있으니 거기에 타이어와 엔진과 자동차 씨트같은 다른 부품을 더하면 자동차가 쌩쌩 달릴거라고 믿습니다. 


소달구지와 자동차의 경우는 우리가 두개의 탈것에 모두 익숙하며 사회적 시스템을 논할때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경우 문제가 뭔지 분명히 알수 있고 어느쪽이 좋은가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는 아무리 빨라도 탈것을 갈아타는 것처럼 빠를수 없어서 과도기적 비용이 크고 무엇보다 그 사회전체를 조망해낼 정도의 식견을 가지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입니다. 우리가 지금 뭘 타고 있는가 즉 우리 사회 우리 문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실 학문적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답이 간단하다면 학자들이 모여서 연구해야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개혁은 어려울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충분한 비전과 믿음이 없는 가운데 세상은 응당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자기에게 좋은 사람을 뽑습니다. 그 좋은 사람은 사회적 전권을 가지는 제왕적 독재자가 아니라면 무슨일을 하기 힘듭니다. 거대한 시스템을 혼자서 고치는게 아니라서 그 사람이 좋은 구동축이라도 엔진이 힘을 보내지 않으면 무용지물인것입니다. 사람들은 겨우 겨우 좋은 사람을 뽑아놓고는 세상이 좋아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속았다고 말합니다. 소달구지가 자동차로 변하는 것은 부품몇개를 갈면 점점 더 빨라지는게 아니라 소달구지가 자동차로 완벽히 변하는 순간 즉 마지막 부품이 들어가는 순간 확바뀌는 것입니다. 부품이 나빠서 소달구지에 좋은 자동차 부품을 붙였는데 소달구지가 빨라지지않는게 아닙니다. 


개혁의 돌파구


이런 개혁의 난점을 피해가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작은 조직, 작은 공동체 운동, 지방자치제 같은 것입니다. 거대한 덩치는 위에서 말한 이유로 개혁이 어렵기 때문에 작은 공동체, 작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개혁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방식이 호응을 얻으면 큰 시스템에서의 개혁도 더 큰 믿음속에 이뤄질지 모릅니다. 


또하나는 개인의 내부적 정신적 개혁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부해서 사회의 전체적 모습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 아무래도 혼란이 줄어들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개혁과 가치판단과 개인의 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시스템은 개인의 삶을 많이 좌지우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힘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또다른 큰 요소입니다. 


이둘은 서로 연결점이 있으며 후자의 것이 보다 근원적인 것입니다. 왜냐면 거대한 시스템밑에서 주입된 생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들이 작은 공동체나 지방자치단체로 자치권을 획득하더라도 그 시스템이 잘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면서 룸싸롱에서 양주에 과일안주 못먹는것을 부러워할수도 있고 그것을 낭만과 문화로 승화시켜서 양주먹는 사람이 막걸리 먹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자세와 각성의 문제이며 문화의 문제입니다. 한국 최고의 재벌회장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작은 집에서 보드게임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가족을 부러워할수도 있습니다. 


특히 좋은 것은 이런 내적인 자기성찰의 결과는 이 시대에 개혁이 일어나건 말건, 어떤 방향으로 일어나건 우리의 내부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적 개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천국일리는 없으며 내년일지 20년후일지 백년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적인 자기성찰의 결과는 누가 뺏어갈수도 없고 어떤 결과가 있으면 있는데로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과거의 혁명적 사회변화


그러나 이런 작은 공동체운동이나 지방자치의 개선, 내적인 변화 자체가 전체 사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대로의 이유때문에 거대한 사회적 구조는 잘 개선되지 않고 보수화되며 모순은 누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진 모순이 전체 사회를 바꿀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을때 변화는 급격히 일어납니다. 변화가 천천히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대안이 되지 못한 변화는 일종의 치유되어야 할 상처로 인식되어 다시 사회는 뒤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모순의 누적이란 주제에 대해 나는 전태일의 예를 생각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080년대 노동운동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빼고는 이야기할수 없으며 그 기간을 통해 한국은 큰 변화를 겪었고 그 끝이 바로 현재를 87년 체재라고 불리게 만드는 87년 시민항쟁을 통한 대통령직선제 성취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정의의 성취라던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유입, 전태일 같은 어떤 지도자적 인물의 힘으로 이해하는것은 진실의 한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개인의 힘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은 1948년 생으로 우리나라의 인구분포를 보면 불쑥 튀어나온 소위 386세대 부분의 시작부분에 해당하는 세대입니다.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한것은 1970년이며 그의 희생은 대학생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내가보기에 7080년대의 사회적 격변은 일하는 세대에서 공부하는 세대로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세대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공부하지 못한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70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갈 나이정도의 세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습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대졸자가 많이 필요해졌고 대학생이 흔해졌습니다. 한마디로 공부하지 않고 도시로 가지않으면 뒤쳐지고 인간답게 살수 없다는 자각이 팽배해진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7080년대에 국민들이 표현한것은 교육받고 자식을 교육시키는 문화인 지식인으로의 삶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실제로 전태일도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며 대학생친구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치열하게 공장에서 일하는 것의 아픔의 핵심은 단순히 공장의 삶이 어렵다는 것을 넘어서 그런 식의 삶을 계속했을 경우 희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던 것입니다. 결국 몸이 망가지고 나면 뭐하나 할수 없는 존재가 되어 공장에서 밀려나고 그럼 죽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고 자신이 공부하거나 자기 자식은 공부시켜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와 감정으로 공감한 것이 바로 대학생들이고 지식인들입니다. 왜냐면 그들도 그런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인간이라면 당연한거 아니냐는 말,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 공감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절망한 인간이 다수였다는 점, 이 사회적 모순의 누적이 세상을 바꿀 힘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


그러니까 현재의 한국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오늘날 모순과 절망의 누적은 어느정도 이뤄져있으며 그들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교육받을 권리가 없는가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아보입니다. 요즘은 전체 고등학생의 70%가 대학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학의 수가 늘었고 공부를 했건 무슨 표절을 했건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늘었습니다. 


사람들은 옛날의 생각을 하면서 사회적 변화의 주동력으로 신세대를 지목하지만 우리나라 인구분포를 보면 사실 신세대가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작고 어떤 의미로 과거보다 더욱 강한 사상적 통제하에서 자라났습니다. 바로 유치원때부터 학원에 아이를 돌려대는 386세대의 문화가 그들을 키웠고 대학생이라면 수업은 잘안들어도 철학책 몇권은 폼으로라도 읽고 논하던 780년대의 대학생문화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영어공부하면서 취업준비에 바쁠뿐이며 좀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걱정은 없던 선배대학생들과는 달리 그들앞에 놓여진 시커먼 미래에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을 바꿀 힘을 가진 것은 결국 지금 4-50대의 장년세대이며 그들의 좌절과 각성만이 한국을 바꿀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행복하여 보수적으로 이대로 살고자 한다면 한국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 386세대의 지식인이 젊은 세대를 보면서 니들은 틀렸다운운하는데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몸통을 이루는 것은 경제력이든 숫자든 기성세대입니다. 


만약 학생운동세대가 정말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성적이고 개혁적이라면 이 세상은 이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관리자 지위로 올라가고 집을 사고 연금을 마련하고 자기애들만 챙기는 사이에 한국은 이렇게 된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절망입니다. 취업도 그렇지만 결혼도 육아도 부자 할아버지가 아파트 한채정도 주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해낼수 있을지 답이 안나옵니다. 그러나 장년세대는 마찬가지로 죽겠다고 하지만 엄살인 것같은경우도 많거나 살만하면 그냥 조용히 삽니다. 지금 가진것으로 어찌저찌 노년생활까지 해낼수 있을것같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장년 세대의 욕망과 절망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있습니다. 이 거품의 붕괴는 장년세대의 삶을 거품으로 만듭니다. 20세기 내내 한국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부동산을 축적하는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장년세대가 미래에 대해 어느정도의 낙관을 가지는 것도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에 상당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인은 전재산을 부동산으로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전재산보다 더 큰 부동산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빚을 내서 부동산을 사니까요. 


부동산 붕괴의 원인에 대한 정답이 있기는 어렵지만 많은 사람은 이또한 인구구조에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계속 부동산을 사줄 소비자가 없다는 것이죠. 신세대의 숫자가 작고 그들은 부동산 피라미드를 떠받칠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 부동산 소유현황을 유지하려면 부동산은 끝없이 올라야 합니다. 전세계에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제도는 한국에서 부동산은 오르게 되어 있다는 기대치가 얼마나 광범위한가를 보여줍니다. 2억짜리 집인데 1억만 내면 쓸수있고 다쓰고 집이 헐어도 1억을 그대로 돌려받는 제도니까 집값이 오르는 일이 없고 물가가 안정적이라면 제 정신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것이 한국의 보편적 주거 문화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요즘 가게부채이야기가 많습니다. 이것도 주택을 사기위한, 주택을 담보로 한 부채입니다. 빚을 내면 이자를 내야 하니 집이 오르지 않는다면 큰일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2007년을 정점으로 한국의 수도권 부동산은 내리막길만 걷거나 잘해야 때때로 평행선이었습니다. 유명한 타워팰리스같은 곳은 이미 반토막이 난곳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부동산 폭락이 언제 오냐고 묻는데 부동산은 본래 천천히 변합니다. 일본이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어 4분의 1토막이 났다고 하지만 1년에 그렇게 된것이 아니고 20년에 걸쳐 그렇게 된것입니다. 훗날 되돌아보면 한국 부동산 거품붕괴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즉 이미 붕괴는 5년이나 진행된 상태라고 이해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지방은 오른다는둥 전세값은 오른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지방도 성장세가 멈췄으며 전세값도 내리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일본의 거품붕괴에 있어서도 집값이 내리면 월세가 한동안 오른 시기가 있었고 월세상승이 하락으로 바뀌는 시기에 붕괴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와 겹치는 이야기입니다. 


부동산문제는 한국문화, 한국사회와 워낙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세가 막을수 없는 것일때 -즉 부동산에 재산을 모두 쌓는것, 부동산의 상승으로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올때- 한국은 변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절망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지요. 이 정권들은 모두 공동체에 대한 강조, 비 물질적 가치의 강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성장이 최고요 개발이 최고라고 외치며 부동산 가격 내가 지켜줄께를 외치는 새누리당 정체성과 다릅니다. 


현재의 한국은 어찌 생각하면 아이엠에프로 아 돈이 다가 아니구나, 부동산이 다가 아니구나, 도박하듯이 살지 말걸하고 자각한 사람들이 김대중, 노무현을 뽑았다가 살만해지니까 무슨 소리야 역시 부동산이 최고고 돈이 최고지, 믿을 건 돈밖에 없어라고 한 결과 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많은 비리와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으며, 상식적으로 한국 전체에 해가될 개발들을 이기적인 이유로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쳤습니다. 


박근혜든 누구든 누가 한국 부동산을 지켜줄수 있을까요? 아 그렇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한 천만명 불러오면 그들이 낡은 아파트를 사주고 다시 부동산을 지켜낼지 모르죠. 그러나 그런 답이 어느정도의 사회적 비용을 불러일으킬지는 너무 뻔하기 때문에 그건 그야말로 미친짓이 될것입니다. 


젊은 세대를 더 강렬하게 착취하면 떨어지는 부동산이 주는 절망을 감소시킬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인구비례를 생각해보면 말이 안됩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 학비며 결혼비용으로 다 빚쟁이 입니다. 더 뜯어먹으려고 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 서둘러 재산정리해서 이민가야할까요? 타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역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없는 불안일뿐이니 절망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답은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답은 자기 자신이고 가족이며 공동체입니다. 도박중독증환자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가치판단을 되돌아보고 자기가 과연 가족과 지역공동체, 국가공동체를 위해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고 신뢰를 쌓아 다같이 잘살수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보호해 줄수있습니다. 


아이엠에프로 실직하여 자영업자가 된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대기업이 뒤에 있는 체인들이 그들의 목을 죄고 있습니다. 지역 상권운운하지만 과연 우리나라에 스스로 지역이라는 말을 부끄럼없이 할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나라가 전부 성미산공동체처럼 삽니까? 서로 비지니스 관계처럼만 살던 동네에서 갑자기 공동체 운운하니 답이 나올리가 없지요. 가게주인들은 죽겠다고 하는데 동네사람들은 큰 체인 들어오면 집값도 오르고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맺는 말


결국 사회적 변화는 급격할수 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회적 변화는 혁명적 변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변화를 이끌어내야하는 중심은 장년세대이며 이들의 욕망과 절망 그리고 그 해소가 중요합니다. 


그중에는 실제로 저같은 사람의 눈에 보면 매우 위험한 절망적 상황에 있는데도 스스로는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빚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토가 광범위합니다. 1-2억을 생활비아껴서 저축하려면 평생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야할 정도인데 1-2억 빌리는 것은 마치 누구나 하는 것처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의 삶이 이러저러하게 굴러갈거라는 예측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확실성이 증대하면 한방의 충격에 모든 것이 날아갈수 있습니다. 직업은 과연 얼마나 계속될까요. 그렇게 야근하고 술만먹다가 어느날 쓰러지면 어떨까요.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모든 걸 잘해도 미국발, 유럽발, 일본발, 중국발 충격파가 한국에 닥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일본돈 빌려서 치과 개업한 사람이 파산했다는 말같은거 들어본적 없을까요?


불안하지만 그런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봐야 답이 없으니까. 그러는 가운데 문제는 점점 더 심해지기 일쑤입니다. 자기가족의 재산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큰차에 큰 아파트니까 우리는 이정도는 하면서 살아야해라고 생각합니다.  


돈걱정을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살고 있는 빚내서 산 비싼 아파트며 아이들이 내고 있는 비싼 사교육비, 체면 유지라고 하면서 쓰고 있는 옷값 자동차 값 같은 이런 저런 돈들은 당연한거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답은 자기자신의 내부를 충실히 하는것,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지역을 사랑하는것에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는 방식을 바꾸면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쉽다는 것을 믿는 것, 사실 한국인의 삶은 오히려 선진국 시민들의 삶과 비교하면 오히려 매우 특이하다는 것, 다시말해 사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의 답이 아주 당연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는 것, 그런 것을 깨달았을때 한국은 준비가 된것일 것입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로 가는 사회적 변화의 준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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