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믿음과 돈에 대한 기묘한 모순

by 격암(강국진) 2012. 5. 30.

뉴스를 보면 언제나 짜증이나고 한숨이 난다. 좋은 뉴스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나쁜 뉴스고 상당수는 기가막힌 뉴스다.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데 필요한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이순간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믿음하나면 우린 행복할수 있다. 그 믿음이란 다른게 아니라 이 세상사람들은 좋은 사람이고 고민과 고통을 나눈다라고 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수십년전에 한국이 쪽방에서 온가족이 사는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을때도 행복이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 믿음은 우리의 행복에 대한 궁극에 이어져있다. 다시 말해 이 믿음없이는 다른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도 지속적인 행복을 가질수 없으며 이 믿음을 가질수 있다면 당장 내일죽는다고 해도 우리는 행복하게 죽을수 있다.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말은 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세상사람들이 그걸 빼앗으려고 그를 속이고 파멸시키려고 노리고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것이며 어떻게 지속적인 행복을 누릴수 있겠는가. 재벌가의 자식들도 자살을 한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결국 세상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미리 조심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친구를 사귈때도 연인을 만들때도 이 사람이 이거 노리는게 있는거 아냐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행복할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 내가 거지라도 내가 좋다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으며 이제 남은 목숨조차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가 이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정하며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때는 우린 행복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손실을 가치있는 손실이라고 믿을 것이며 목숨을 바치게 되더라도 그것이 가치있는 일에 쓰일수 있음에 행복할수 있을 것이다. 여러가지 공포를 무릅쓰고 민주화운동을 위해 거리로 나서고 피흘린 사람들은 실제로 감격속에서 행복함을 느끼고는 했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을 저버린다. 그 믿음을 저버리는 순간 삶이 지옥같아질것을 알면서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 믿음을 저버리는 기묘한 행위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똑똑한 사람이 나와서 이 지역이 후진것은 저 다른 동네사람들이 모든 걸 다차지하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저 다른 동네 사람들은 경상도나 전라도로 불릴수도 있고 진보나 보수로 불릴수도 있으며 자본가나 노동자로 불릴수도있고 친일파나 빨갱이로 불릴수도 있다. 


다른 똑똑한 사람은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이제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성이 악의 근원이다. 그래서 그 불확실성과 싸우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할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커다란 집과 돈이 잔뜩들어간 통장이 있으면 당신은 행복할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주장에는 밝은 부분말고 어두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것들이 믿음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악으로 파악하는 것, 누군가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것은 분열을 더 심각하게 만든다.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상대방의 최악의 부분을 지적하고 자기 확신에 빠지는데 그런 주장을 부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대측도 다시 더 최악의 부분을 지적하고 자기확신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두진영 모두 이 세상에는 악이 있으며 나쁜 사람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을 믿을수 없다는 생각이 깊어만 진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뭔가를 쌓아두는 것은 거꾸로 믿을 것은 역시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사유재산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부터 생겼을지 모른다. 니꺼 내꺼를 구분해 두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걸 다 차지해서 내가 쓸것이 없을거라는 생각에서 우리는 내것을 정해둔다. 이건 내꺼하고 테두리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행동, 그런 생각자체가 사실은 다른 사람은 믿을수가 없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암보험을 팔면서 암같은거 걱정할 필요없다고 말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도난경보장치를 팔면서 요즘 세상에 도둑이 어디있냐고 하는것은 말이 안된다. 암보험을 팔다보면 결국 우리가 암에 걸릴거라는 위험을 확실하게 느끼고 도난경보장치를 팔다보면 세상에 도둑이 득실댄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느끼는 것자체는 틀린게 아니다. 실제로 암도 있고 도둑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험은 암과 도둑밖에 없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데 있다. 담배피는 남편에게 담배가 남편을 죽인다고 잔소리를 하는 아내는 옳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면 스트레스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잊어버리게 되어 본말이 뒤집어진다. 사유재산이 우리의 미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을 옳을 것이다. 그런데 니껏 내껏을 가리다가 가족이 갈라지고 지역사회가 갈라지고 국가공동체가 갈라지면 무엇을 위한 니껏내껏 싸움이었는가는 잊혀지기 쉽다. 


말할수 없는 중간


항상 중요한것은 이름이 없는 중간이다. 그 중간은 결코 단순히 한번은 이렇게 하고 한번은 저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기 이전, 이것과 저것을 구분한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내가 쓴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니것 내것 안가리고 미래를 위해 저축도 안하고 그렇게 성인들처럼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저축도 중요하고 내 아들딸과 아내가 얼굴도 모르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믿는 사람이 있다. 경우에 따라 모든 구분을 철폐하자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도 그들나름대로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또다른 복잡한 이야기고 나는 니껏 내껏없고 자본주의 없고 벽도 구분도 없는 세상이 옳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건 세상이 있음으로 가득차 있어서 없음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그럼 있음은 애초에 필요없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다. 있음도 필요하고 없음도 필요하다. 중요한건 있고 없고가 만들어진 그 이전을 기억하는 일이다. 아내는 남편을 걱정해서 잔소리를 시작했고 미래에도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걸 기억하기란 참으로 힘이 들며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들어 낸 관념과 이름에 따라 세상을 이리저리 찢어대고는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그게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한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런 세태가 만들어 내는 문제는 바로 믿음을 깨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을 증오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게 이데올로기에 중독된다. 한때는 자연이 인간의 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자연이란 인간이 정복하고 부셔야할 장벽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증오하며 살았던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자연으로 부터 떨어져나왔다. 마치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것처럼 인위적인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자연적인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연을 증오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자연이 악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의식중에 증오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일것이다. 우리는 살자면 구분이 필요하고 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것이 변하며 임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그 구분과 있음이 우리를 정복하고 만다. 


믿음과 돈에 대한 기묘한 모순


돈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우리는 신용사회라는 말도 진부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기묘하게 역사를 뒤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부정할수록 자본주의가 발달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은 각자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라는 것을 기반으로 한 경제학적 관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들은 더 많은 것을 자기것으로 쌓아두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지란게 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주는 적선인가? 21세기에 복지에 드는 비용에 대한 의견차가 있을 뿐 국가발전에 어느정도의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의 거의 정말 거의 없을 것이다. 


돈이란게 뭔가. 금본위제가 무너진 후에는 돈은 그저 우리가 세상에 쌓아가는 신용같은 추상적인 것이 되버리고 말았다. 금융공황이란 결국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싸구려를 아주 비싼값으로 파는 거품을 만들어 냈다가 그 거짓말이 탄로났다는 이야기다. 결국 경제난이란 믿음의 파탄인 것이다. 


대기업들이 도로와 공항을 사들이고 체인점으로 자영업자를 몰아낸다. 그렇다면 대기업을 파괴하고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다 죽어나가게 만드는 것이 답일까. 아마도 표준적인 답은 기본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시장이 답을 내놓게 하되 게임의 법칙을 잘 정해서 즉 법을 잘 정해서 모두가 잘살게 될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표준적인 답은 핵심이 없다. 핵심은 바로 믿음과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법이든 시장이든 그런 것들은 모두 도구에 불과하다. 자유시장의 이상 나아가 자유주의의 이상이란 현실에 존재하지않는 허구다. 우리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적 판단이 그런 것들에 의해 내려질수 있다는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자기 기만을 해서는 안된다. 칼로 사람을 죽이든 미사일로 사람을 죽이든 결국 칼을 잡은 사람, 미사일스위치를 누른 사람이 판단한 것이고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사회에 대한 완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 세상이 거지같다면 그것은 어떤 경제학법칙이나 법률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미래는 무작위하게 움직이는 이상기체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고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모든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어떤 기기묘묘한 절차를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이 세상은 여전히 지옥일 것이다. 똥은 찌던 굽던 똥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기적이 될수록 부자가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모두 가난뱅이 국가다. 테두리가 아예 없는 수준에 이르르기는 힘들겠으나 큰 테두리를 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살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나라가 부자나라다. 니꺼 내꺼 안가리는 나라가 더 부자나라다. 미국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지만 미국을 그래도 유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부자라는 기업총수들이 종종 가진 것을 환원하는데 확실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빌게이츠며 워렌버핏도 그렇고 스티브잡스도 단순히 돈을 벌어서 더 잘먹고 잘살겠다는 것과는 거리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힘의 근원인 과학발전은 상당부분 개인들이 출자한 돈에 의해 이뤄져 왔다.


말하자면 모두가 돈따위 신경쓰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가 바로 가장 부자가 될 나라라는 것이다. 


맺는 말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사기꾼에게 속는다. 그들은 당신들을 단숨에 부자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다리 놓고 도로놓고 철도놓고 공원만들고 자전거도로 만드는데 불도저처럼 밀어부친다. 엄청난 세금개혁으로 한번에 당신의 소득을 급격하게 올려준다고 말한다. 모든걸 다 공짜로 세금으로 해주겠다고 한다. 물론 그런건 잘안된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그들은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들이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저들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불신을 더더욱 퍼뜨린다. 


뭔가를 만드는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걸 꼭 만들어야 하는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믿음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선택하는가 아니면 탐욕과 불신에 의거해서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의견을 말해도 저 의견은 보나마나 패거리주의에 의거해서 나오는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일꺼야라고 말하게 되면 결국 의견교환따위는 없는 것이다.  


나라가 감당할수 없는 빚을 져도 미래에 누가 갚겠지 안되면 이민가지뭐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정말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사랑하며 한국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할수 있을까? 가족이라고 했을때 엄청나게 빚을 끌어대면서 이것저것 사업을 위험하게 벌이고 속으로 안되면 이 가족을 떠나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가족이라고 불릴수 있는 사람일까. 자기돈이라면, 자기 가족의 돈이라면 그렇게 용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사회적 사업 공공사업이 정말 자기돈이나 자기 가족의 돈을 투자하듯 투자된다면 이세상 문제의 대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오죽하면 박원순시장같은 사람은 난 한게 없는 시장으로 기억되겠다고 자꾸 말하겠는가. 너도 나도 나서서 뻥을 치는 사회에서는 정상인은 나는 약속을 못한다, 나는 뭘 안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이 부자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나부터 거기에 살고 싶고 우리 아이들도 거기에 살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할것이고 욕심을 버려야 할것이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릴때 우리는 부자가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