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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좋은 교육에 대한 근원적 착각

by 격암(강국진) 2012. 5. 25.

나는 좋은 교육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것은 이 세상에는 그런게 없다라는 것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이말이 무슨 말인지는 제대로된 문맥에서 들어야 한다. 


맞춤형 교육


닐포스트만은 그가 쓴 책에서 교육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교과서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에서 학생 하나 하나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을 생각하는 교육을 강조한 적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에서 같은 것인데 그것은 좋은 교육이란 말은 마치 가장 잘맞는 신발과 같은 말처럼 자체 모순적인데가 있다는 것이다. 신발은 잘맞는 신발이 있고 안맞는 신발이 있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발에 잘맞고 안맞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책을 읽는 교육의 행위가 어떤 학생에게는 인생에 한번 뿐인 대단한 교육의 순간일수있는 반면 어떤 학생에게는 최악의 교육행위일수가 있는 것이다.


아 무슨말인가 했더니 교육이란 결국 교육받는 대상에게 맞춤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군요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이제 내가 한말의 문맥을 절반은 알아들은셈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좋은 교육이란게 바위돌이나 나무처럼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할수 없는 이유는 교육이란 둘이서 추는 춤처럼 학생과 교육자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학생도 그날 그날 그달 그달의 정신적 상태에 따라 교육의 방식은 달라져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좋은 교육이란게 있다면 그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추는 춤과 같은 것이지 혼자서 국민체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것이다.


그런거 다 알고 있다고 너무 섯불리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당신은 학생이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는 것같은 사교육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만약 당신이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거나 하는 둘중의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면 당신은 이미 교육이란 이런것이어야 한다는 결정을 해놓은 것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그게 좋거나 나쁘다는 말인가. 


좋은 대학교육이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이런 저런 의견을 가지고 있을수 있다. 특히 당신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면 더 자세한 의견을 가질것이다. 그런데 잠깐. 좋은 대학교육이 어떤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당신은 바로 올해 어떤 구체적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의 수준이나 성향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던가. 과연 성적이 나쁘면 대학생인데도 부모에게 교수가 전화를 받는 다는 요즘의 대학생과 20년전의 대학생은 같은 대학생인가? 그들이 다른 대학생인데 거기에 맞춰서 좋은 대학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바꾸고 있는가? 그런부분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좋은 교육이란 마치 혼자서 추는 국민체조처럼 혼자서 존재할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두가지 종류의 교육


자. 이제 두번째 문맥으로 넘어가 보자. 왜 좋은 교육이란게 없는가, 왜 교과서를 불살라버리자고 하는가. 교과서가 나쁜 책이라서? 그렇지 않다. 아마도 교과서는 주변에서 구할수 있는 책중 제일 좋은 책중의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육이란게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가둬버리는 것인가에 대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고 후자를 과연 교육이라고 불러야 하는가의 문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직원교육이란 말을 알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회사에서 고용인들이 더 일을 잘할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적응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직장을 가지고 어떤 일에 적응하는 일의 가치는 매우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장 교육이란 말은 뭔가 모순된데가 있으며 이 착각과 모순때문에 진정한 교육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해진 일을 잘하도록 훈련하고 적응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창의력을 죽이고 사람들을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정해진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진정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데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이 부분은 무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오해가 없다. 첫번째 무지는 우리는 우리가 뭐를 모르는 지를 아는 무지다. 두번째 무지는 우리가 뭐를 모르는지를 모르는 무지다. 이런 개념은 이미 경제학에서도 위기관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란 후자의 무지에 대한 것인데 사람들이 그걸 첫번째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오히려 진정한 교육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교과서를 없애라고 포스트만이 말하는 이유다.


어떤 회사안에서 자신이 정해진 일을 잘할수 있도록 배우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은 동시에 그사람이 그 회사안의 부품이 되게 만들수도 있다. 그렇게 되는가 아닌가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인 세계가 얼마나 넓은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조로운 적응이나 훈련은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유용하며 그렇지 않으면 해롭다. 그 사람을 단순한 도구, 광신도로 만든다. 정해진 세계 바깥쪽을 볼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적세계의 풍요로움과 넓음에 신경쓰는가. 다들 직업교육이나 돈을 얼마나 벌수 있는가에 마음이 가있지 않은가?


매일 매일 단조로운 생활을 해도 그 내적 세계가 이미 풍요로운 사람은 그 단조로운 생활때문에 바보가 되는 것을 피할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단조로운 생활이 즉각 그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내적 세계가 풍요로운 사람은 겉으로 똑같은 것을 하는것 같아도 보고 생각하는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내적으로 스스로를 자극하고 생각을 한다. 


이렇기 때문에 정해진 절차와 지식을 주입받는 교육은 누구에게나 위험도가 있는 것이지만 특히 단순한 어린이들에게 매우 나쁘다. 아이들은 아직 단순한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끝없이 자극을 주지 않으면 금새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면 갈수록 더 많이 선행학습을 시키고 더 오랜동안 아이들을 학원에서 시험문제푸는 연습을 하게 한다. 


위에서 말한 학원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학원에 가는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원에 익숙해지면 학원을 그만두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은 뭐든지 익숙해지는게 별로 좋지 않다. 만약 그걸로 평생을 걸만큼 각오를 한게 아니라면 뭔가에 익숙해지면 아이들은 다른곳에서 어리숙해진다. 심한경우는 혼자 공부할 능력을 상실해서 고등학교쯤에 가면 성적이 더 엉망이 될수도 있다. 발전의 한계가 그어지는 것이다. 


결국 교육이란 두종류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적응이고 또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눈뜨는 것이며 자기 파괴고 자기확장이다. 생각깊은 사람들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후자인데 전자의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그저 도구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육이란 말을 쓰면서 이런 구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을 더 빨리 기계처럼 변하게 만드는 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부를때가 많다. 그래서 초등학교나 유치원생이 문제푸는 귀신이 되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학생들은 결국 일찌감치 자신의 세계를 좁힌 결과 다른 분야에서는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이며 결국 딱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원교육이나 문제푸는  기계로 만드는 교육이란 진정 아이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직원이나 아이를 이용해먹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망치로 만들고 대신 망치는 내가 사용해주겠다는 것이 바로 그 교육이다. 바로 자칭 사회적 지도층운운하는 사람들이 인적자원운운하면서 말하는 교육이란게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런게 과연 큰인물을 만들거나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수가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바보나 노예로 만드는 것도 교육이라고 부른다면 마약을 주는 것도 치료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맺는 말


아이를 혹은 스스로를 잘 교육시키겠다는 열정이 때로는 가장 해로운 것일때도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이 없다면 말이다. 교육이란 건 없다. 진정한 인간은 탁자나 컴퓨터같은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교육을 시켜도 그 결과는 같지 않다. 교육의 결과는 불확실할수 밖에 없으며 불확실성은 교육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모든 걸 하늘에 맡기면 된다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옆에 있어주면서 그 아이, 그 사람의 환경이 되어주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 도움을 준다는 행위 그러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행위,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행위가 쉬운 것은 아니다. 좋은 교육이란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사람으로 존재하고 남을 망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늘상 누구를 망친다. 그래서 그것도 매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교육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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