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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창의력에 대한 비창의적 생각

by 격암(강국진) 2011. 8. 17.

11.8.17

세상이 창의력를 강조하게 된지도 오래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창의적이지 않은 일들은 노동가치가 매우 떨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발전과 인구증가로 기계적으로 메뉴얼대로만 하는 일들에 대한 댓가는 날로 떨어지고 있다. 한사람이 전에 수십사람이 하던 일 아니 그 이상을 할 수가 있다. 저소득국가의 인력을 사용하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러니 창의적인 일을 해야 살아남는다고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다. 이때문에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고 여러가지 창의적인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도 점점 높아만 지고 있다.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는 물론 튀는 인물들, 기괴한 캐릭터에 더 관심이 많아지는 것은 창의성과 개성에 대한 절박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창의력이란게 뭔가 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다. 하지만 아무거나 새롭기만 하면 그걸 만드는 것을 능력이라고 할까? 괴상한 그림이나 괴상한 소리 전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우리는 그걸 창의력이라고 칭찬하나?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럼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있을까. 좋은 것들, 시간이 지나도 금방 사라지지 않고 유행이되어 남는 것들을 만들고 생각해 내는 능력이 현실적으로 창의력이다. 

 

여기서 그럼, 좋은게 뭐냐던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같은 문제로 자꾸 자꾸 질문을 넓혀가지 않아도 우리는 한가지를 인정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창의력이란 매우 애매한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거의 없는 해괴한 말이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의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편견이나 근거없는 신앙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같다. 그것은 빨강양말을 신고 복권을 사면 당첨확률이 올라간다는 징크스같은 매우 보잘것없는 경험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창의성에 대한 이런 매우 비창의적인 생각이 그저 개인의 생각으로 남으면 그나마 나쁘지 않을 것이나 문제는 이것이 교육 방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창의력있는 인재로 키우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서 사원들의 창의력이 발휘되는 쪽으로 운영하려고 하지 않는가?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자 같은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으로 우리는 창의적이고자 하지만 실은 그런 행동은 마치 코메디언이 자기의 유행어를 약간씩 변주해서 반복하듯 오히려 매우 비창의적인 행동, 남의 것을 베끼는 행동으로 가게되는 일이 많다. 누군가가 스파게티에 된장을 섞어서 음식을 만들면 아 나도 창의적이 되야지하면서 뭔가에 뭔가를 더하는것을 부지런히 찾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스파게티에 아이스크림을 얹으면 안될까. 나는 스파게티에 라면스프를 뿌리면 안될까하는 식이다. 이런 탐색이 전혀 창의력과 관련없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뻔한 확장에 매달리는 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창의력을 죽이는게 아닐까?

 

창의력에 대해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몇마디 했으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창의력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그 것의 핵심은 복권당첨을 기다리는 것처럼 신기한 방법을 찾기 보다는 우리가 아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아는 그 말 바로 온고이지신을 실천해야 한다. 

 

내 생각에 창의력이란 그저 느끼는 능력이다. 뭘 느끼는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 이 세상 자체, 관련된 사람들의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뭐가 필요한가를 느끼는 것이다. 이 느끼는 능력이란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인 동시에 좋은게 뭐고 나쁜게 뭔지를 느끼는 능력이다. 

 

그냥 느끼는 것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두가지 이유로 어렵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것, 경험한 것이 없으면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일 때 우리는 선입견없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졌다. 그러나 아이는 비교적 매우 단순한 세상밖에는 경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보고 듣는 시야가 좁다. 작곡을 한다고 할 때 도와 레 두 음밖에는 모르는 사람과 수많은 음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는 사람과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경험하고 아는것, 그것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깊숙히 생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이 아니면 그 사람의 사고는 두리뭉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옛 것을 모르면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기도 어렵다. 

 

우리가 진정으로 깊숙히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자체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서양의 호텔서비스는 서양의 귀족들이 집에서 먹고 마시던 체계를 바깥으로 가져온 것이고 홍콩 와이어 액션이라는 것도 전통 경극의 움직임에 그 뿌리가 있다. 미국 팝송의 뿌리는 흑인전통음악에 있다. 이렇게 세계적 상품이 되고 유행이 된 것도 사실은 그들의 역사의 연장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깊숙히 느끼고 삭히지 않으면서, 그저 허공에서 뭔가를 퍽퍽 꺼집어 내는 마술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 우리의 감각을 미묘한 것을 잡아낼 수 있을만큼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것뿐이라면 어른들은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다들 창의적인 사람이 될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느끼는 것이 어려워지는 두번째 이유는 반대로 아는 것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냥 아는게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좋은것, 기억되어지는 것들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대개 너무 강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때문에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게도 된다. 

 

이 때문에 영화감독중에는 영화를 안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보면 따라하게 될까봐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이나 분류따위에 너무 깊게 빠지게 되면 우리는 점차로 함정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너무 쉽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인데 남편이니 아내니 이사님이니 평사원이니 대통령이니 국민이니 한국인이니 미국인이니 이러저러하게 구분하고 세상을 살면 세상을 스포츠카 타고 달리는 것처럼 쌩쌩 달리며 살게된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어느새 석양의 아름다움이나 숲속의 풀벌레소리의 아름다움 따위를 느끼는 능력은 까맣게 잊게 되고 그런 구분, 그런 지식, 그런 선입견에서 내려오기가 힘들어 진다. 어느새 자기의 머리로 자기의 느낌으로 살기보다는 이건 원래 그런거라며 교조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사고방식대로 기계처럼 산다. 창의력을 발휘하자면 몰라도 안되고 알아도 안되니 창의력이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창의력은 사랑과 관심에서 나온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사랑하면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굳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생각이 애초에 들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지금도 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원으로 바쁘게 다니면서 맨날 똑같은 문제를 기계처럼 풀어봐야 창의력이 남아날 리가 없다. 사실 현대인들이 십수년식 다니는 학교라는 것은 선생님이 교과서에 있는 것을 물어보면 똑같이 답하는 능력을 반복연습하고 그걸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 시스템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을 키우는 학교라는 것은 어쩌면 학교가 가지는 일반적 관념의 반대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이끄는데로 배우고 재미가 있으니까 우리는 뭔가를 자꾸 한다. 그러니까 창의력도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놀이가 반드시 창의력 교육은 아니다.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지우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드시 창의력 교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의력을 키우는 시스템은 고정된 게 없다. 똑같은 객관적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창의력 교육이고 누군가에게는 창의력 죽이기 일 수도 있다. 좋은 대화하는 법을 매뉴얼화하면 그것이 독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랑 대화할지도 모르는데 좋은 대화를 위해서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면 정작 대화의 상대는 상대방이 지금 나를 보고 있는게 아니라 어떤 매뉴얼에 따라 말을 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결국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경험하면서 배우는 수밖에는 없다. 

 

다만 깊이와 질문의 문제는 남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질문에 어떤 깊이로 몰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창의력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깊은 질문에 깊이 빠진 사람이 결국 창의적인 생각을 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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