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감성없음은 정신병이다.

by 격암(강국진) 2012. 8. 15.

2012.8.15

내가 종종 조바심이 나거나 화가 나거나 안타까운 일이 있다. 그것은 아이건 어른이건 어떤 일에 대해 너무도 빠르고 쉽게 알겠다고 하는 경우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한다. 자장면을 어디서 먹을지, 여유자금은 주식에 넣을지 보통저축으로 할지, 집을 사야하는가 마는가, 집에 갈 때는 기차를 탈까 비행기를 탈까 렌트카를 이용해야 할까에 이르기까지. 사실 이 세상에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쉽게 결정할수 있는 일이 없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도 잘되리라는 보장이 있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민주주의건 합리성이건 생각한 것과는 반대가 되기 쉽다. 

 

판단의 어려움

 

모든 일에는 그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외부의 일도 그러하려니와 사실 내부의 일 즉 자신이나 가족의 기분도 그렇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타고 가면 편한대신에 돈이 들고 버스를 타고 가면 불편하고 냄새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돈이 절약되는 경우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 질문이 설사 특정지점 A에서 B로 가는 것에 대한 것이라도 그날의 기분이나 건강상태에 따라 답은 다 다를수 있다. 반드시 돈을 절약하는게 답이 아니고 물론 돈을 쓰는게 항상 답이 아니다. 국가적 사회적 상황에서도 물론 그렇다. 단순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주관적이고 비물질적인 역사와 사회적 가치에 따라 우리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정도문제겠지만 가난해도 더 행복해질수 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나중에 더 잘살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나 개인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가족이나 일행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냥 습관처럼 여기는 이렇게 하면된다고 선택했지만 알고보면 그것이 그날따라 매우 고된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매우 기분나쁜일이 될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생고생을 하는 일정을 가졌지만 그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그것은 매우 기분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말한마디, 작은 일 하나가 모든 것을 종종 바꾼다. 어떤 일이 노동인지 운동인지는 종종 보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이다. 

 

외부의 일도 우리가 얼마나 어떤 일을 철저히 따지는가에 따라 점점 더 미궁에 빠지기 일수다. 전화서비스를 바꾸는 일에서 비행기표를 사고 보험에 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은 복잡한 서비스로 넘쳐난다. 그 서비스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좋게 말하면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객들이 서비스를 단순비교하기 어렵게 해서 틈새시장을 만들고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똑같은 자동차 세차 서비스를 하는데 이쪽은 만원 저쪽은 만2천원이라면 고객의 선택은 뻔하다. 그러니까 할인권이 등장하고 휴지니 물을 끼워주기도 하며 주유와 세차를 합치면 이렇게 저렇게 할인을 해준다는 둥하는 식으로 끝없이 다양한 선택을 만들어 낸다. 

 

여담이지만 심리학자 베리 슈왈츠는 현대인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선택때문에 불행해 진다고 말한다. 청바지 3개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라면 잘 고르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청바지 50가지 중의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항상 자기가 고른 것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선택의 종류가 폭팔하는 현대에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다. 

 

아뭏튼 수없이 많은 서비스와 선택은 그것들을 비교하기 참으로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데 애초에 그것들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양한 복합적 요소들을 내부적으로 가졌으며 게다가 그 각각의 요소가 또한 그날 그날의 기분에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주관적 가치를 가진다. 이러니 이야기가 한없이 어려워 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쪽 렌터카가 랜트비가 더 비싸지만 저쪽 렌터카는 주는게 없는 데 이쪽은 음식점 쿠폰을 준다. 이 쿠폰을 옥션에서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고 그러면 가격이 더 싸질 수 있다 같은 계산이 나올수 있다. 그러나 과연 쿠폰을 옥션에서 팔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 그것을 팔기위해 써야 하는 에너지와 시간도 공짜가 아닌데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일정상 그런 것을 할 시간이 나올 것인가하는 식으로 생각이 번지면 계산이 점점 복잡해 지는 것이다. 

 

용감한(?) 사람들의 위험함

 

그런데 이런 복잡함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잘도 확신에 차서 재빨리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네 하고 알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물건사는 일만 그런게 아니다. 나는 결혼은 안할거라던가, 결혼해도 아이는 키우지 않겠다같은 말을 중학생이 잘도 척척한다. 일반론적으로 결혼이 좋다던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보람차다같은 말은 사실 무수히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하는 말이다. 결혼의 가치나 아이를 키우는 일의 가치는 수박값같은 것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불확실성의 너머에 존재한다. 그런데 아직 자기 삶에 뭐라 말할 수 없이 많은 불확실성을 가진 어린 학생이 나는 이게 이런거라는 거 다안다, 인생이 뭔지 나는 알고있다라고 확언해 버리는 모습을 보면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결혼한 중년의 남자인 나도 인생과 결혼의 의미를 발견해 가고 있는데 너는 벌써 그 가치가 뭔지 다 아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대고 무조건 결혼은 해야하고 아이는 낳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말은 미리 알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런 메세지는 흔히 재빨리 판단하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전달이 안된다. 왜냐면 대화내용이 이렇다.

 

그 사람 : A로 선택하죠. A가 좋아요.

 

나 :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 : 내가 알아요. A가 좋아요. 

 

노자의 한구절이 절로 생각난다. 아마도 노자도 비슷하게 답답한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 만만하건만 나홀로 궁핍한 것 같도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도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영특하고 똑똑하건만 나 홀로 우둔하고 멍청하도다 (노자;20장)

 

잘 알겠다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이야기가 너무 힘들다. 자기가 더 확신을 하는 이유는 자기가 더 잘 알아서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에서 무엇을 근거없이 확실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일일히 지적해 줘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대부분 성가시고 성공하지 못한다. 남이 확신하는 것을 쉽게 허무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너는 그렇게 하라 나는 나대로 하겠다고만 할 수 없는 때도 많다. 집단으로 움직이게 되면 끊임없이 공동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하나의 결정은 물론 다른 결정과 다 맞물려있다. 자기가 다 잘안다면서 빠르게 결정하는 사람들이 끼어들면 그들은 금새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생각도 안해보고 그건 할 가치가 없다고 하거나, 그게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수정도 안되어 크게 보면 어리석기짝이 없는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몇년동안 똑같은 휴가일정을 보냈는데 좀 다른걸 해보려고 하면 금새 그건 그게 아니야 라면서 결국 또다시 똑같은 일만 가능하게 만들고 사람들은 심심하다면서 지루해하고 하는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서둘러 뭐가 뭔지 알겠다고하는 사람들은 종종 창의력이 부족하고 인생이 재미가 좀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모든 사소한 일을 다 심사숙고하면서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시간제한도 있기 때문에 너무 느리면 그것도 손해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최대한 열린 눈을 가지고 천천히 판단해 나가되 사소한 일상의 판단에 대해서는 어느정도는 하던대로, 혹은 무작위로 선택할 수 밖에는 없다. 문제는 우리는 종종 매우 중요한 것도, 매우 복잡한 것도 쉽게 다 알겠다면서 봐야할것을 보기보다는 엉뚱한 것을 보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결정에는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하고 대학이나 전공을 선택하고 집을 살까 말까를 결정하고 차를 살까 말까를 결정하는 일들도 포함한다. 세상에는 천원짜리가지고 깐깐하게 굴다가 3-4억짜리 융자나 주택구입결정을 할 때는 호쾌하게 단지 남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빠르게 결정하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알겠다고 빨리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나는 알겠다고 너무 빨리 잔머리를 굴린다. 그래서 후일 돌아보면 내가 미쳤지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도저히 미리 알 수 없는 것을 너무도 쉽게 그건 이거 아니야라고 쉽게 판정해 버린 것을 깨닫게 되는것이다. 

 

사기꾼이나 마술사가 싫어하는 사람은 전문가나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더 속이기 쉽다고 한다. 속이기 어려운 사람은 천천히 판단하는 사람이다. 사기꾼이나 마술사가 싫어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핵심은 감성

 

통상 빠르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감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혹은 뭔가를 느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약간 아는 것으로 빠르게 판단해 버리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는 그 얼마간의 지식이나 논리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다는 자각이 별로 없다. 

 

판단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부분은 조용한 마음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느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논리를 써서 이게 이거니까 저게 저거니까 하고 너무 많이 머리를 굴리고 있으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어리석어 지고 시야는 좁아진다. 정말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기 일수다. 우리는 세상과 나에 대한 느낌을 놓치지 않으면서 판단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종종 세상과 나에대한 느낌을 놓치고 습관대로, 하던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결정하게 되기 쉽다. 삶이 습관에 빠지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저 습관이고 남이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행동해 버리며 그때문에 많은 것을 잃는다. 

 

내가 너무 빠르게 나는 알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짜쯩을 내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 그들이 내가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화도 해야하고 이런 저런 이유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적인 부분, 사실적인 부분을 확인하면서도 내 마음의 절반이상은 그 바깥에 있어야 한다. 왜냐면 지금 말로 표현되는 부분이상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나 토론이란 언어의 교환이상으로 서로간의 어떤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해도 어감에 따라 표정에 따라 상대방이 말하는 이것이 어느정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얼마나 깊게 생각해보고 하는 소리인지가 다 달라진다. 흔히 치열하게 투쟁하듯 말싸움을 해서 최종승리하는 의견이 가장 최적의 의견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싸움이 격렬할수록 무조건 더 바람직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같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의견은 그냥 한 개인의 판단보다도 못한 어리석은 결론이 되는 일이 더 많다. 서로를 느끼기 보다는 서로를 이기려고 하면서 만들어진 의견이기 때문이다. 이기기 위해 우리는 종종 자신도 믿지 않는 주장을 확실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기 논리에 자기가 중독당한다. 

 

이건 몇번이고 강조할 만한 것이다. 인터넷에도 공중파방송에도 말과 글을 칼삼아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그런 과정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합리적 절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백분토론같은 티비 프로그램은 그런 싸움속에서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하나마나한 것이다. 그건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기 때문이다. 다수결투표가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쉽게 파당을 지어 소수파벌을 착취하는 시스템이 된다. 마찬가지로 감정없고 교감없는 치열한 논리싸움이 진보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최적화된 답을 찾게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싸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곧잘 자신들을 악을 무찌르는 정의의 전사로만 생각하지만 결국 이쪽도 저쪽도 조폭에 가까워지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핵심은 느끼는 것이다. 어떤 것의 가치는 우리가 어느 수준의 문맥과 이야기를 신경쓰는가에 따라 마구 바뀐다. 일상에 빠져서 코앞의 일만 보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이따금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때는 무조건 멈춰서서 다시금 자기를 좀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다시 자기를 확대하고 세상에 대한 느낌을 좀 더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마음가짐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가는 쪽을 주목해야 한다. 가치 판단은 결국 근본적으로는 직관에 의해 이뤄진다. 세계와 자신을 느끼는 것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논리와 지식의 도움을 꼭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그 것들은 도움을 주는 것이지 가치판단 그 자체가 아니며 그래서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거기다가 이건 이거니 저건 저거니 보채는 말을 자신에게건, 남에게건 지나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판단은 물이 흐르듯이, 같이 춤을 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2012년 4월의 매일경제 기사를 인용해 보자.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13856

 

국내에서 18세 이상 성인 중 최근 1년 동안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16%인 577만명(2011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평생 동안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한 비율은 10명 중 3명꼴(27.6%)로 외국에 비해 높다. 그러나 병ㆍ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사람은 7명 중 1명(15.3%)으로 미국 39.2%, 호주 34.9%, 뉴질랜드 38.9%에 비해 현저히 낮다. 

 

나는 이런 현실도, 한국에서 자살률이 엄청나게 높은 현실도 어느정도 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감성이 없으면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궁지에 몬다. 궁지에 몰리면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자기와 세상을 너무나 오랜동안 놓아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정신차려보면 자기가 누군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고 어느새 보니 외롭고 인생의 의미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나도 많은 어른들이 자기를 잃고 감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어른들은 더더욱 심한 증상을 가진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은 결국 어른들을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사회성을 잃고 뭐든지 나는 다 안다는 태도를 쉽게 취한다. 요즘 자주 청소년들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우리는 어른의 문제건 아이의 문제건 흔히 그런 것을 단순히 성격의 특징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성격장애로 인식하는것이 필요하다. 병을 알아야 치료를 하듯이 문제를 인식할 때 해결도 더 쉽게 이뤄질 것이다. 결국 많은 것이 너무 쉽게 나는 이걸 알겠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 인생에서는 학교에서 보는 시험지위에서 처럼 답이 딱 떨어지는게 하나도 없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작품과 삶  (0) 2012.09.07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교육  (0) 2012.09.04
버둥거리기와 코를 꿰지 않고 살기  (0) 2012.08.02
악몽  (0) 2012.07.30
사랑하는 사람  (0) 2012.07.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