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교육

by 격암(강국진) 2012. 9. 4.

2012.9.4

믿음이 소중한 자산인 현대

 

살아가는데에는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이 불확실할 때 우리는 크고 작은 공포에 빠진다. 더구나 오늘날 삶의 불확실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 좋게 말하면 역동적인 사회고 나쁘게 말하면 불확실성이 극심한 나라여서 사실 국민들이 마음고생을 안하는 때가 없다고 할 판이다. 이런 것에 너무 적응이 되면 오히려 조용한 나라에 가서 사는게 심심하다고 할판이니 한국사회의 불확실성을 알만하다.

 

불확실성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혁신은 모두 불확실성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이 이런 불확실성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도 매양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살다가 지나친 불확실성을 만나고 무너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서는 자살률의 증가나 출산률 감소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며, 폭력이 난무하는 험한 세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할수 있는 가장 불안한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내게는 많은 것이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는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차츰 노이로제상태, 우울증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책임지고 해야할 뭔가가 있다고 믿을 때, 여전히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을 때 살아갈 힘을 가지게 된다. 과학의 시대인 현대에서야 말로 믿음의 가치는 오히려 더 높은 것일수 있다. 

 

우리가 꺼리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믿음은 필요한 것인데도 사실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꺼린다. 남의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말하는 경우, 즉 누군가의 이러저러한 믿음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아니라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금기시 되고 피해진다. 우리는 말이란 뱉고 나면 기록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인만큼 이왕이면 옳은 말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남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영원히 옳은 말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내 생각을 말할 때 그것은 결국 내가 틀린 생각을 말했던 것이 되고 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간디자서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간디가 자서전을 쓰려고 할 때 사람들이 말리면서 말했다고 한다. 왜 그런것을 쓰려고 하는가. 생각이 바뀌면 어쩔 것인가. 그런 것은 나중에 쓰면 되지 않는가. 간디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가 발견한 진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리를 찾기위해 실험한 이야기를 솔직히 쓸 뿐으로 그 이야기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것이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의 부제는 나의 진리실험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여러가지 중의 하나는 믿음이 소중하지만 자신의 믿음에 대해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름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대개 침묵하는 쪽이 편하다. 그런 가운데 생기는 비극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는 것일 것이다. 

 

믿음이야 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많은 어른들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를 거부한다. 그것에 대해 꺼집어 내놓고 논하지 않으려고 하고 은근히 강압할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런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자신감이 없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왜냐고 묻는 아이에게는 원래 그런거라고 핀잔을 던질 뿐이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별로 좋지 못한 예가 될 것같은 사람들에게서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예를 들어 엉터리 중과 엉터리 목사 혹은 싸구려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친구며 선배나 어른들에게서 말이다.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대부분의 것을 배운다. 하지만 현대의 학교와 사회는 사람들에게 뭘 믿고 살아야 하는지 거의 답을 주지 않는다. 학교는 대개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규칙들을 내밀면서 - 세금은 내야한다, 질서를 지켜라, 병역의 의무는 소중한 것이다 등등- 너는 이런 저런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이런 행위에 방해가 된다면 그 믿음은 틀린 것이라고 말해줄 뿐이다. 그러다가 결국 종국에는 이것이외에는 너는 자유니까 네맘대로 살라고 한다. 가치관교육이란 말은 흔하지만 공장같은 현대의 교육현장과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현대의 시대적 상황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다. 

 

전통적인 사회의 안정성과 믿음은 현대 한국에서 붕괴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그저 태어난 마을에서 아버지 어머니 살던대로 살면되는 그런 농경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게다가 국가나 민족이라던가 가문이나 지역기반 혹은 유교나 불교나 토속신앙같은 것에 근거한 믿음들은 획일화되고 회의주의적인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많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대의 종교는 이런 현대한국인의 문제에 도움을 주고 있는가. 

 

나는 왜 종교인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단어에서 종교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종교가 나쁘다던가 하는 말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열심히 책을 읽고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소박한 믿음이 현학적 단어를 나열하는 사람의 믿음보다 반드시 가치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건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오늘날 종교는 대개의 경우 사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교자체가 문제있다기 보다는 그 종교를 실제로 믿고 따르고 그 종교단체에서 종교를 가르치고 이게 신의 뜻이며 부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다. 종교는 종종 악을 행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병을 더 나쁘게만 만들뿐인 마취제같은 역할만 하는 것같다. 마취로 고통이 안느껴지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동안 인생은 더더욱 크게 망가질 수 있다. 엉터리 무당을 믿고 살아가는  삶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수없이 많은 자칭 종교인들보다 나는 내가 더 예수님과 부처님의 메세지에 가깝게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기독교나 불교에 정통해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예수님에게도 부처님에게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는 예수님이던 부처님이던 자 내게로 와서 기대고 쉬라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영영 그러라고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게는 그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삶에 지쳤으면 내 곁에 와서 쉬어도 된다. 하지만 쉬었으면 이제 혼자 서야 한다. 너는 네 안에서 네가 믿을 것을 발견해야 한다. 나에게 매달려서 제발 절 좀 돌봐주세요라고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떼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던 부처님이던 많은 사람들이 종교활동을 하는데 그 분들은 그저 형식에 매달리고 떼쓰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그저 교회가고 절에가고 목사나 스님이나 다른 신자들과 어울리고 헌금하고 노래부르고 그러고 있으면 되는것인가?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도 홀로 기도하라고 했다고 들었다. 예수님도 신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광야로 가고 홀로 시간을 보내곤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정확히 그 반대로 하는데 시간을 대부분 쓰면서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의 믿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는 하는가? 교회나 절에 헌금하면 천당가는게 종교인가?

 

이것은 비판처럼 보이지만 비판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내게 어떻게 보이건 당신은 당신의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건 당신의 선택이다. 내 선택이 아니다. 내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다. 내게 이상하게 보여도 당신에게는 옳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비판하기보다는 다만 묻는것이다. 당신의 믿음이란게 도대체 뭔가라고. 

 

이와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이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뭘 믿어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그냥 뭔가를 믿는척하거나 불안감이 올라오면 그걸 억지로 지워버리기 위해 어떤 쾌락이나 술같은 것에 몰두하고 만다. 물론 차가 나에게 달려오는데 눈을 감는 것이 도움이 안되듯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믿음은 필요하다.

 

그럼 이시대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없는가. 나는 믿는게 없는가. 나도 믿는게 있다. 이 글 자체가 믿음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뭘 믿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글이다. 나도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지켜준다고 느낀다. 

 

그 믿음이 뭔지에 대해 여기 몇줄 써보기전에 그걸 왜 쓰는가에 대해 한두마디 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번째로는 위에서 썼듯이 믿음에 대해 논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 나는 물론 나보다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 정교하지만 건조한 지식이기 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짧아도 '나의 진리실험이야기'를 언급하는 게 좋은 일일 것이다. 그게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두번째로는 바로 모든 믿음을 부정하는 과학주의자 내지 회의론자들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모든 믿음을 다 깨는 데에만 능력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스스로는 물론 다른 사람도 도덕적 공허속에 내팽겨친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빼앗아 버린다. 그런 의미의 진공상태에서 사람이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은밀히 어떤 권위를 베껴온다. 막스를 신처럼 믿거나 유럽사회를 신처럼 믿는다. 일본을 믿고 돈을 믿는다. 또 어떤 먼 외국의 석학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상식으로 믿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믿는게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하면서 산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들은 종종 얄팍한 것을 믿는 허무주의자들에 불과하다. 지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너무도 잘 가려서 다른 사람은 물론 스스로도 자신이 뭘 믿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뿐이다. 믿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지목하고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면 아무래도 나는 뭘 믿는가에 대해 고백하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런데 믿음은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려면 말이다. 

 

나는 뭘 믿는가. 간단히 쓰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삶이란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를 진리를 찾는 구도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진리란 어떤 도달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다. 생명은 끝없이 변해가는 것이다. 생명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질문이란 바로 지금의 단계에서,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나는 뭘해야 하는가 뭘 선택해야 하는가를 느끼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 우리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 나가면서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지금과는 다른 생명으로 변해간다고 믿는다. 나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다 같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개가 있고 없고 보다 어떤 때는 뭘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깨달은 만큼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만큼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생명으로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갈것이다. 삶의 의미는 우리 앞에 놓여진 무한정한 불확실성에 있다.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앞에 아직도 신비를 가지고 남아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다른 생명으로 변해갈것이라는 것을, 내가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이 끝나는 순간, 그 순간이 내가 생명으로서 끝나는 순간일것이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는한 불확실성은 끝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고 따라서 최종적인 진리를 찾는게 아니라 나를 그런 과정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게 핵심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믿음

 

몇줄쓰고보니 이렇게 몇줄써서 내가 믿는 것을 스스로 정리해보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믿는 것일것이다.

 

많은 경우, 나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는 우리가 뭘 믿고 사는가에 대해 고민이 별로 없다. 그런게 중요한 문제라는 자각도 언제나 있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살던대로 산다. 습관처럼 산다. 내가 뭘 믿는다는 자각도 없이 믿던 것을 믿으며 산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허약한 것일 때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끝없는 상처가 만들어 지는 원인이 된다. 프랑스사람의 삶이 완벽하다고 믿고 그 사람들이 사는대로 살아야 옳은거라고 믿는 사람은 때로 프랑스사회가 문제를 들어내면 그걸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을때마다 무리를 하게되고 상처를 입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다. 그런 생각이 어떤 악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손가락을 들어 그 악을 가르키고 그 악때문에 문제가 생기는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과 인생을 낭비시킨다.

 

어떤 사람은 프랑스사회를 믿고 어떤 사람은 장남을 믿고 어떤 사람은 목사를 믿으며 어떤 사람은 돈만을 믿는다. 그나마 자신이 뭘 믿고 있는가에 대한 자각이 있는 경우는 덜 위험하다. 많은 경우는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자신이 뭘 믿고 있는가에 대한 자각도 없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믿는다. 그것은 믿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상처입는것이다. 남들이 보면 화상을 입으면서도 불속에 계속 손을 집어넣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자신이 믿는 대상을 직시하는게 필요하다. 그 한계를 보는게, 자신이 믿는 것의 너머에 있는 경계를 보는게 필요하다. 그럴때 우리는 진정한 프랑스사회의 친구가 되고 장남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목사님과 함께 진정한 종교를 추구하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될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믿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지만 성경을 읽거나 불경을 읽는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저 열심히 농사를 짓거나 연구를 하거나 하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다만 습관에 젖지 않고 내가 뭘하는가, 나는 뭘 믿고 있는가, 뭐가 나에게 중요한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일이 필요한 것같다. 그런 생각과 경험이 우리를 조금씩 넓혀나가고 그렇게 우리가 포용하는 세상의 경계를 넓혀나가다 보면 우리는 서로 다같이 잘 공존할 수 있는 믿음들을 가지게 될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교육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교육을 빼고 건조한 지식과 논리만 가르치는 경우 우리는 남의 믿음과 남의 선택에 따라서 살게 된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없다. 삶을 낭비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없는 호의  (0) 2012.09.10
예술작품과 삶  (0) 2012.09.07
감성없음은 정신병이다.  (0) 2012.08.15
버둥거리기와 코를 꿰지 않고 살기  (0) 2012.08.02
악몽  (0) 2012.07.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