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정치의 핵심과 욕망의 자제

by 격암(강국진) 2012. 11. 25.

정치라는 것은 결국 사람사는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것이므로 이것이 정치의 핵심이다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뭐가 핵심이다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핵심은 국방이라고 하면 군인빼고는 다 없어도 되는게 아니며 국가의 핵심이 법률이라고 하면 법조인 빼고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가 더 높은가낮은가 같은 것에 대해 덜 신경쓰고 살수 있다면 사실 모두는 서로 다른 각자의 일을 하고 사는 것이며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게 없습니다. 나사 하나 없으면 로케트나 비행기가 떨어지듯이 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결국 한국은 모두가 힘을 합치고 함께 해야 뭐가 되도 되는 것이지 이기는 사람이 해보라고 하면서 나머지는 손놓고 있으면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도와줘야 합니다. 누구도 완전하지도 팔방미인도 아닙니다. 대통령이 법률에 대해 잘 알면 좋겠지만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도와주면 됩니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대해 잘알면 좋겠지만 잘 아는 사람이 도와주면 됩니다. 이렇게 대통령을 사람들이 도와줘야 대통령이 뭐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도와주면 된다고만 하면 그럼 대통령은 애초에 아무것도 필요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마주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정치라는 것에 있어서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질문하게 됩니다. 즉 오늘날 대통령은 뭘 할수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수의 딜레마

오늘날 한국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을 보고, 정치판을 보고 있자면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그 핵심은 신뢰와 욕망의 자제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에 실패하여 사회들이 기울어지거나 애초에 기초적인 발전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술이던 지식이든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사실 흔합니다. 없는 것이 있다면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이며 정치문제에 있어서 신뢰란 사실상 욕망의 자제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이때문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이야기가 우리 귀에 잘 들립니다. 죄수의 딜레마란 두 죄수가 서로 협력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수 있지만 그들이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에 최악의 결과를 선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죄수둘이서 서로가 배신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형량만 얻을수 있지만 한쪽만 배신하면 배신자는 큰 이득을 얻고 배신당한 쪽은 아주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둘다 서로를 배신하면 둘다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럴때 죄수들이 서로를 신뢰할수 없기 때문에 결국 죄수들은 대개 서로를 배신하는 쪽을 택하고 그래서 상당한 피해를 입는 쪽으로 결판이 난다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라는 예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물론 우리 일상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하는 말입니다만 한국의 화장실에 있는 휴지도 죄수의 딜레마의 예입니다. 벌써 예전의 일입니다만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공중화장실에 휴지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휴지값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져다 놓으면 바로 휴지를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중화장실에 있는 휴지를 가져가지 않는다라는 것을 지킬수 있으면 우리 모두는 공중화장실을 잘쓸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중 일부만 전체를 '배신'하면 그럴수 없으며 요행이 휴지를 보게 되더라도 어차피 얼마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가져갈텐데 내가 가져가자라는 식으로 사고하게 되기 쉽습니다. 

수많은 공중도덕이 이런 성격을 띱니다. 다들 지키면 다들 이득을 얻는데 그걸 안지키는 사람이 생기면 지키는 사람들만 바보됩니다. 그결과 아무도 지키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입니다. 선진국은 혹은 부자나라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욕망을 자제하기에 부자가 되는것이며 부자로 남아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예전에 비하면 상당한 부자가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한국의 가정윤리, 효의 정신이 그중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뭘했다따위는 그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도 죄수의 딜레마상황에 빠집니다. 그런데 한국은 외국에 비하면 부모와 가족간의 신뢰가 매우 높은 편이었습니다. 배운것 없는 무식한 부모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돈 이상을 들여서 자식을 교육시키면 그 자식이 나중에 자신을 부양해 줄거라고 믿는것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한국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특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가난한 나라가 양질의 인력을 가지게 된 이유고 그게 한국이 다른 가난한 나라와 달랐던 점입니다. 한국의 문화가 한국을 부자만들어 주는데 결정적인 것이었고 그것도 죄수의 딜레마와 신뢰의 문제를 해결한 예라는 말입니다. 


잘못 뽑은 대통령


그러니까 21세기 한국에서 대통령이 가져야 하는 첫번째 덕목은 국민의 욕망을 자제시킬수 있는 힘입니다. 국민들이 기꺼이 자신의 욕망에 빠져들지 않고 스스로 자제하게 만들수 있는 힘입니다. 국민들이 자제하는 힘을 보여줄수만 있다면 한국이 발전할수 있는 길은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통령은 그리고 그 대통령을 만들어 낸 정당은 욕망을 자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무한추구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죠. 사람이 완벽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비리들이며 추문을 들으면 그의 인생을 보면 욕망을 위해 자제가 없습니다. 


사실 이명박이 국민을 욕망하게 만드는것도 있고 국민의 욕망이 이명박을 만들어 낸것도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노무현이 부동산을 폭등시켰다고 욕하지만 반대쪽에는 내 부동산을 폭등시켜주었으면 하고 종부세나 행정수도 건설 같은 것을 하는 노무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더 많았는가 하는 것은 선거결과가 보여줍니다. 자신이 욕망을 자제하기 싫기에 자제없이 욕망하는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입니다.


 이번 선택은 어떤가


이번의 대선에서 문재인이 답인가 박근혜가 답인가 하는 것이 질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저는 느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이기든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도출되었는가가 매우 중요하며 그것이 더 큰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지사지가 안되는 사람들 즉 자신의 아픔에는 펄펄 뛰지만 남의 아픔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들이 무대를 가득채운 가운데 누군가가 승리한다면 그 승리가 누구의 것이든 한국은 개혁되고 발전될수 없을 것입니다. 대선이란 바로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자아발견의 시기입니다. 우리가 욕망에 가득찬 군상만을 본다면 그런 과정에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역시 한국인은 욕망을 자제시키지 않는 사람, 욕망을 더 키워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믿을것이고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개혁? 개혁의 근본동력은 믿을수 없을 만치 강한 신뢰입니다. 국민안에 신뢰가 없는데 청와대에 누가 앉아있건 개혁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얇팍한 지식인이 참많습니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뛰는 것이 정치라고 주장하거나 현실론 운운하면서 결국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그걸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면서 욕망의 자제라는 주제 자체를 근원적으로 거부합니다. 


쓰레기를 잘 볶으면 몸에 좋은 건강식이 될수는 없습니다. 국민적 신뢰와 욕망의 자제라는 주제를 잊으면 개혁이든 좋은 나라든 결코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모든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뛰어다니면 저절로 시장의 법칙이 제일 좋은 결과를 만들어 준다는 믿음은 허구입니다. 개인대 개인이 아니라 계층대 계층으로 이야기를 바꿔서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우리계층이 뭉칩시다같은 이야기도 허구입니다. 결국 다 끝없는 분열이요 신뢰의 저하로 죄수의 딜레마의 수렁에 빠지는 길일뿐입니다. 


맺는 말


불행한 것은 선거철이 되면 그렇지 않은 무수한 시민들이 가려지고 욕망의 화신같은 사람들이 튀어나와서 온갖 계산들로 사람들을 휘두릅니다. 이건 원래 이렇다. 이러저러하게 정도를 따르면 결국 우린 죽는다. 따라서 이런 저런 꼼수를 쓰자라고 합니다. 일단 이기고 봐야 할거 아니냐라고 합니다. 남이 아프고 슬프고 실망하는 것은 알바 아닙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들의 아픔과 실망을 외면한 사람들을 가르켜 죽일놈 살릴놈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뽑히든 그런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문화를 주도하게 된다면 한국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기꺼이 욕망을 자제하는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욕망도 자제시키게 하는 사람, 권력을 놓아버리고 권위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걸 문화로 가진 집단이 필요합니다.


신뢰는 감동과 함께 오는 것이니까 인간적으로 감동받고 하는 것을 광신운운할게 아닙니다. 냉정한 논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결국 비관론자가 되어 은둔자가 되거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밖에 결론을 가질수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대선, 욕망만 가득찬 대선이 되어서는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도 아름다운 자아를 찾을수 없을 것입니다. 대선은 결국 누군가의 승리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에만 빠지면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던 우리는 모두 패배하게 될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