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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경호에게

경호에게 : 과학과 개념

by 격암(강국진) 2012. 12. 10.

2012.12.10

과학과 개념

 

개념이란 무엇인가

 

저번에는 근사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 (영어로는 컨셉이라고 하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간단히 말하면 개념이란 근사를 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근사를 이야기한 후에 개념을 이야기하는 이유지.

개념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아버지가 그린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눈사람은 눈과 머리와 몸으로 이뤄져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뭘 설명을 한다거나 이해를 한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그것들보다 더 큰 것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고양이도 있고 개도 있고 양도 있고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네가 학교에 가거나 책을 구해서 읽으면 많은 책들이 이런 설명을 너에게 말해준다. 도서관에 가면 크게 과학이라던가 소설이라던가 아이들용 책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나뉘어 있고 그 쪽에 가면 다시 그것이 또 이름순서대로 라던가 출판사별로 라던가 나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달콤한 콜라를 먹었을 때 콜라는 왜 달까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콜라에는 설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할 수 있다. 이것도 콜라라는 것이 여러가지 물건들을 섞은 것인데 그 중에 설탕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 즉 작은 것들이 어떻게 합쳐져서 큰 것이 되었는가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무지개는 우리가 보는 빛이 한가지 색이 아니라 여러가지 색을 가진 빛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따로 따로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가위는 두개의 구부러진 칼이 붙어 있는 것인데 그걸 손가락으로 움직이면 뭔가를 자를 수 있게 만든 기계라고 설명할 수 있지. 자전거도 두개의 바퀴가 있고 핸들이 있고 안장이 있고 기어와 체인과 몸통으로 이뤄져있다.

 

지난 번에 근사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하고 있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런 설명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자세한 혹은 간단한 근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동물과 식물이 있고 동물은 이러저러한 것이 있고 식물은 이러저러한 것이 있고 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은 간단한 근사에서 복잡한 근사로 나가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개를 개라고 하는 것이 근사인 이유는 사실 개는 또 여러가지 종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종류로 말한다고 해도 한마리의 개도 같은 개가 없기 때문이지. 우리 눈에는 같은 종류의 개나 고릴라가 아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건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전부 다 다르듯이 그들도 전부 다 다르다. 그러니까 개라는 말이건 사람이라는 말이건 전부 다 근사다. 아주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 개도 사람도 없는 것이지. 서로 비슷한 점들이 있지만 결국 어느 것도 정확히 같지는 않으니까.

 

근사에 대해서 말할 때 말했듯이 우리는 결국 근사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저기에 양이 두 마리있다라고도 말할 수가 없어. 왜냐면 결국 그 두마리의 양은 서로 같은 양이 아니기 때문이지. 야채가게의 주인도 당근 한개에 얼마라고 팔 수가 없다. 왜냐면 어느 당근도 정확히 같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비슷한 것끼리 모아서 이름을 만든다. 그래서 마치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서로 같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 이름들이 바로 개념이다. 개념은 비슷한 것들을 모아서 같은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어떤 때는 더 자세한 개념이 필요하고 어떤 때는 간단한 이름이면 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개하고 고양이를 구분할 때는 개는 모두 개라고 하지만 개를 파는 애완동물 가게에 가면 진돗개는 얼마, 치와와는 얼마 하는 식으로 종류에 따라 다시 구분을 하는 것이지.

 

법칙과 공통점을 찾아서

 

그런데 이렇게 자꾸 자꾸 이것저것 모아다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세상에 대해 아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혹은 과학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건 매우 재미도 없고 지루한 일일 거야. 더구나 우리는 아주 간단한 개념만 쓴다고 해도 너무나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되서 절대로 복잡한 것은 이야기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눈사람은 눈사람의 눈, 눈사람의 머리, 눈사람의 몸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한 후에 다시 개는 개의 눈, 개의 머리,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각자 다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이름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겠지.

 

눈이나 머리나 몸이라는 이름들 혹은 말들은 눈사람에도 쓰고 고릴라에도 쓰고 개나 고양이나 사람에게도 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 하나 다른 이름들을 만들어서 전부 외워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 간단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눈사람과 개나 고양이나 사람의 각 부분을 잘라서 비교해 보니까 다들 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다른 이름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에서 말하는 것은 눈사람은 반드시 첫번째 그림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만 자를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첫번째 그림은 눈사람을 눈, 머리 그리고 몸으로 나눴지. 그래서 누군가가 눈사람은 눈과 머리와 몸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눈사람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눈사람은 그렇게 자르는게 아니라 두번째 그림에 나오는것처럼 자를 수도 있고 사실 네가 원한다면 세조각이 아니라 열조각으로 자를 수도 있으니 자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물론 그렇게 자르는 여러가지 방법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보통 쓰는 방법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 조각들에는 이름이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 맘대로 자르고 각각의 조각에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지. 예를 들어 두번째 그림처럼 자르고서 이것은 경일, 경이, 경삼이라고 부른 후에 눈사람은 경일과 경이와 경삼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라고 말해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맞는 말은 맞는 말이긴 한데 문제는 이게 쓸모가 있는가 하는 것이지. 개나 사람도 눈이나 머리나 몸을 가진 반면에 이렇게 맘대로 자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개나 사람은 어느 부분이 경일이고 경이고 경삼인지 말하기가 어렵지 않겠니?  

 

그러니까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을 자르고 거기에 각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지만 어떻게 자르는가에 따라 편한 방법이 있고 불편한 방법이 있게 된다. 어떻게 자르는가에 따라 우리는 아주 많은 이름들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고 그 숫자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다. 편리한 방법을 찾아내면 우리의 생각이 빨라지고 잊어버리는 것이 적어진다. 설명들이 간단해 진다. 억지로 기억해 둬야 하는 것이 아주 작다. 그렇게 편하기 때문에 사실 보통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세상을 보려고 한단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났는데 그 외계인은 코가 배에 달려 있고 귀는 발에 달려 있으며 뇌는 길쭉하게 몸 전체에 퍼져 있다고 해보자. 그래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외계인의 머리는 어디일까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의 것은 대개 머리에 눈코입을 가지고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항상 우리는 세상을 그냥 보는게 아니라 우리가 잘 쓰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그래서 그 개념들 때문에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

 

그렇다고 너무 편리한 것만 찾다보면 이번에는 그 개념들이 점점 더 부정확한, 나쁜 근사가 된다. 예를 들어 동물중에는 오리너구리라는 동물이 있다. 넓적한 부리를 가지긴 했지만 이 동물을 보면 통상 너구리나 개나 고양이 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개나 고양이나 사람처럼 새끼에게 젖을 먹이니까. 그런데 이 동물은 새나 거북이처럼 알을 낳거든.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포유류라고 이름을 짓는 다면 개나 고양이나 오리너구리는 모두 포유류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포유류는 새끼를 낳는다라고 하면 틀린 말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개의 머리나 사람의 머리나 눈사람의 머리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듯이 세상에 있는 여러것들에서 공통점을 찾으면 그런 공통점을 하나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차들은 전부 달릴 때 운전하는 사람이 중앙선쪽에 가도록 달린다. 이런 것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법칙이지. 그런 법칙은 우리가 써야 하는 개념의 수를 줄여준다. 외워야 하는 것을 줄여주지.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자동차 방향의 법칙을 알고 있으면 일본에서 차가 달리는 방향, 한국에서 차가 달리는 방향, 미국에서 차가 달리는 방향을 다 각각 외워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공통점, 규칙성, 법칙을 찾으면 세상이 그만큼 간단해져 보이는 것이지.

 

가장 유명한 과학 법칙중의 하나는 뉴튼의 중력법칙이다. 너도 중력이 뭔지는 알지? 무게를 가진 것은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력법칙이라는 것은 하늘에 뜬 달이나 땅위에 있는 사과나 다 같은 법칙을 따르는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달을 움직이는 신비한 힘과 사과를 땅으로 떨어뜨리는 힘같은 것에 전부 따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수학과 물리는 좋아했지만 생물은 좋아하지 않았다. 수학과 물리는 대개 아주 작은 수의 개념만을 가지고 굉장히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생물학은 대개 여러가지 이름들을 끝도 없이 늘어 놓거든. 아버지는 외우는게 싫어서 생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좀 더 배우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수학과 물리로 모든 걸 설명한다는 것은 과장이며 생물학도 유전자 혹은 DNA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동물이나 식물이름을 끝없이 늘어놓는 것만은 아니거든.  그래도 물리나 수학에 비교하면 생물에는 여전히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외우는 일이 많다. 물리에는 작은 수의 법칙이나 원리가 발견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뇌라던가 생명이라던가 하는 것에 대해 간단한 이해를 줄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건 없을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금새 발견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물리에서도 뉴튼이 법칙들을 정리하고 발표하기 전에는 설명들이 복잡했다. 하늘에 뜬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설명하려고 수십개의 원들이 다 같이 움직이는 복잡한 설명을 만들어야 했거든.

 

그런데 모든 지식은 근사라는 말을 아직도 기억하니? 법칙은 오직 근사적으로만 맞는다. 어떤 법칙은 왜 근사적으로 맞는지 알려져 있고 어떤 법칙은 아직 왜 그게 근사적으로만 맞는지 모를 뿐이다. 어떤 법칙은 굉장히 정확한 근사이고 어떤 법칙은 아주 대충만 맞는다.

 

몇개 안되는 개념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기는 하지만 틀릴 때가 많은 설명을 만든다.아주 많은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정확한 설명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별로 설명같은 느낌이 안들지. 하나 하나 전부 다른 이름을 붙여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기억하기도 너무 어렵다. 종종 불가능하다. 과학자를 포함해서 역사를 공부하거나 경제를 공부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전부 제일 작은 숫자의 개념을 써서 제일 정확한 설명을 해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여러가지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들을 써서 여러가지 설명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지.

 

물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세상을 모두 설명할 수있는 가장 간단한 개념을 찾고 있었다. 레고블럭으로 우리는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지만 그것들은 모두 레고블럭으로 만든 것이지. 그러니까 레고블럭으로 만들어지는 물건들만 있는 레고의 세상에서 가장 편리한 개념은 레고블럭들이다. 레고블럭들을 개념을 사용해서 이름을 지어주고 이 다리는 3번레고블럭 100개 5번 레고 블럭 125개 8번 레고블럭 23개로 만들어 진 다리입니다라고 말하면 되겠지. 레고블럭으로 만들어진 세상에는 1번레고블럭 반개와 7번레고블럭 반개가 붙어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레고블럭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가장 쉽게 잘 설명하는 개념이 뭘까를 오랜동안 고민했는데 그 답의 하나로 나온 것은 물론 바로 원자인 것이지.

 

네가 이제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들 그리고 앞으로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은 과학이건 아니건 대부분 이런 개념들에 대한 것이다. 세상을 이리저리 자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합치고 다시 붙이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지. 그래서 열심히 여러가지 이름들과 약속들과 법칙들을 외워야 한다. 듣기에 재미있게만 들리지는 않고 또 실제로 힘든 것도 있지만 재미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여러가지로 노력한 결과 우리는 자동차며 컴퓨터, 비행기, 우주선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은 어떤 레고블럭을 선택할 것인가 (즉 어떤 개념들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과 그 레고블럭들을 어떻게 이어 붙여서 재미있고 쓸모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좋은 설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의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낸 설명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별로 대단한 건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과거의 천재들이 만들어 낸 개념들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만 많은 것을 볼수가 있다. 그리고 매우 뛰어나고 재수가 좋은 사람들은 거기에 몇가지를 더하거나 빼게 되는 것이지.

 

왜 세상에는 여러가지 말들이 있는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세상을 잘 설명하는 개념들을 만들어 내고 –즉 세상을 자르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걸 서로에게 가르쳐주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세상을 잘 설명하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사람들은 쓰던 말들을 계속 쓰기 때문에 설사 누군가가 혼자서 자기는 훨씬 더 멋지게 세상을 자를 수 있다고 말해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서로 같은 방법으로 자르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같은 말들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네가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저 고양이의 경일은 예쁘다라고 말해봐야 지나가는 사람은 경일이 뭔지 모르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한국에서는 한국말들을 쓰고 일본 사람들은 일본말을 쓰고 미국 사람들은 영어단어를 쓰지. 서로 다른 말들은 세상을 자르는 서로 다른 방법이다. 요즘은 비행기만 타면 쉽게 외국에 가기 때문에 외국사람들이 서로 쉽게 만나지만, 그래서 서로 말이 틀려서 힘들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쓰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나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면 너무 힘들다, 영어가 좋아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한자같은거 너무 싫다, 전부 한글을 쓰면 안될까 하고 말할 수도 있지만 쓰는 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새로 말을 배우기도 어렵고 대부분 각자 조금씩 다른 것이지 무조건 한쪽이 더 좋다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각각의 말들은 각자 더 잘하는게 있다. 그런데 시를 쓰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고백을 할 때는 좋은 언어가 있지만 이 언어가 수학공부를 할 때는 나쁘다면 이런 언어를 버려야 할까? 아니면 수학공부에는 좋지만 사랑고백을 할때는 나쁜 다른 언어가 있다면 이런 언어를 버려야 할까?

 

세상에는 어려운 말들이 있다. 초등학생들은 잘 모르고 사실 어른들도 대부분 모르는 말도 세상에는 잔뜩있다. 위의 그림에서 말했던 경일, 경이, 경삼 같은 이름들이랄까. 아버지는 그걸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마도 지금 쓰는 글에서도 네가 모르는 말을 잔뜩 썼을 것이다. 그런 어려운 말을 전부 안쓰고 쉬운 말로만 설명을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말하자면 아버지도 이 글들을 쓰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제일 작은 수의 개념을 써서 제일 정확하게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어려운 말, 잘 쓰지 않는 말이 쓰이는 이유가 물론 있다. 과학자도 그렇지만 의사도 그렇고 경제학자도 그렇고 또 요리사나 이발사나 운동선수들도 각자 자기들만 주로 쓰는 말들 다시 말해 자기들만 아는 개념들을 만든다. 그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외국어나 마찬가지지. 나도 모르는 것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축구나 요리에 쓰이는 말들 중에는 나도 모르는 말이 많다. 그것들을 자기들만 주로 쓴다는 것은 그들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걸 다 쓰라고 설득할만큼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그래도 그 말들을 쓰는 이유는 그 개념들을 통해서 세상을 잘라보면 세상이 쉽게 잘 설명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더 관심을 가진 어떤 부분들이 그렇지. 소고기를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사람은 소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각자 맛이 어떻게 다르고 요리를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다 아는 것이 좋지. 그래서 그런 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모른다. 말하자면 소고기의 여러조각들에 대한 이름들은 소고기 요리를 위해 발달한 말 혹은 언어인 셈이다. 최고의 요리사가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찾아낸 법칙은 바로 요리를 만드는 조리법이다. 그들은 그걸 설명하기 위한 말들을 만들지.

 

내가 과학 이야기라고 하다가 일본어나 영어 한국어 이야기를 하니까 혹시 이게 무슨 상관일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도 한국어나 일본어처럼 언어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설명 즉 과학이론은 과학의 개념들 혹은 단어들을 써서 쓴 이야기들인 셈이지. 과학만 그런게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심지어 춤같은 것도 모두 언어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우리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기록하는 것이지. 서로 다른 언어들은 중국어와 한국어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는 것처럼 어떤 것을 위해서는 좋은데 어떤 것을 위해서는 어려워지지. 멋진 말로 사랑고백을 하는 것보다 음악이 더 훌룡하다는 말이 있다. 사랑고백을 하고 싶다면 과학이라는 언어는 아마 별로 쓸모가 없겠지. 반면에 음악으로 자동차가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산수를 설명하려면 거의 불가능하거나 훨씬 더 복잡하겠지.  춤추는 사람도, 한국말로 뭔가를 설명하는 사람도, 칠판에다가 수학문제를 길게 풀고 있는 사람도 사실은 뭔가를 기록하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 같은 것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게 꼭 필요하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 것은 그래야 외국에 가서 외국인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라는게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레고블락 세트를 써보는 것처럼, 서로 다른 언어를 써봐야 내가 쓰고 있는 개념들이 어떤 것인지 잘 알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려면 무조건 한국에 오래 살아본 것만으로는 안되고 일본이나 미국에 살아봐야 한다라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야 차이를 알 수 있으니까. 같은 것, 비슷한 것을 서로 다른 개념들을 가진 언어로 말해 보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우리는 다른 말을 쓸 때 종종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한다. 그래서 여러개의 말을 배워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 학교에서 수학 과학 국어 미술 음악등 여러개의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그래서이다.

 

개념을 없애기

 

나는 근사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부터 모든 것은 근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이미 여러번 말했지. 이제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개념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첫번째 그림처럼 자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편하다고 해도 두번째 그림처럼 자르는 것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항상 첫번째 그림처럼만 자르는데 익숙하면 오히려 실수를 할 수가 있지. 자르는 건 언제나 근사다. 근사는 언제나 빈틈이 있기 마련이거든. 근사를 절대로 맞는 것으로 생각하면 때로 실수를 하게 된다고 여러번 말했던 것을 기억하니? 

 

개념이란 것은 한국어나 일본어같은 말보다 더 많다. 그래서 모든 한국사람들이 다 같은 개념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학교에 가지 않고 책도 안 읽는 사람들은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모르는 개념이 많겠지. 그러니까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살 수 있고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말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아는 만큼 세상을 보게 된다. 다른 개념들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개념을 계속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종종 배운 개념들을 잊어버리고 없애야 할 때가 있다. 더 좋은 개념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옛날의 개념을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부정확하게,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 산 좋은 레고 블럭 세트에 옛날에 가진 조각을 섞어버렸는데 서로 잘 짝이 안맞으면 곤란하겠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서로 짝이 잘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가지고 ‘일관성의 확인’이라던가 ‘기본 개념들의 모순성 확인’이라던가하고 말을 한다. 일관성을 확인하는데 게으르면 자기가 가진 레고조각들이 서로 짝이 잘 안맞는데 그걸 모르는채 집을 만들거나 다리를 만드는 사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왠지 집이나 다리가 이쪽 저쪽으로 기우는 것이지. 다시 위에서 그린 그림으로 돌아가 볼까? 만약 우리가 눈과 머리와 몸이 아니라 경일과 머리와 몸을 가지고 그걸 합쳐서 눈사람을 만들려고 하면 아무리 잘해도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눈사람이 생겨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서로 짝이 잘 맞는지를 확인하는 일관성의 확인을 하면서 살아가는게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열심히 여러가지 개념들, 이름들을 배우고 외우느라 바쁜 학생들은 외우는 건 어려워도 개념을 잊어버리는 건 너무 쉽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잊어버리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세상을 자르는 방법, 혹은 쓰고 있는 개념들은 그렇게 쉽게 바꾸거나 할 수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지. 또 우리가 한번 어떤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자꾸 그렇게 보는 습관이 생겨 버린다. 어디가 머리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한꺼번에 우리가 가진 개념을 전부 다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보통 하나 둘씩 배우는데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누군가가 새로운 개념 혹은 다른 레고블록과 잘 맞지 않는 새로운 조각을 쓰려고 하면 나머지 다른 개념들이며 레고블록들을 전부 다 갈아야 하기 쉽거든. 전부 다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히 많이 갈아야 하지. 누군가가 토모다치라는 말보다 친구라는 말이 더 좋다면서 일본에서 친구라는 말을 쓰자고 하더니 친구라는 말을 제대로 쓰자면 모든 일본말을 다 버리고 한국어를 써야겠다고 말한다면 일본사람들이 그러자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 혹은 새로운 레고조각이 생겼을때 어떤 개념을 버리고 어떤 레고 조각을 버려야 하는지를 생각하는게 그리 쉽지 않다. 이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쉽지 않지. 레고조각이 아주 많으면 이게 지금 짝이 서로 맞을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를 확인하는 것도 훨씬 어렵거든. 그걸 다 버린다는 것은 물론 더더욱 어렵고 아깝겠지.

 

그러나 새로 배운 개념이나 새로 얻은 레고조각이 짝이 잘맞지 않는 것같다고 해도 너무 빨리 새로 배운 것을 버려서는 곤란하다. 사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레고조각을 다 갈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새로 배운 것들이 전에 네가 배운 것을 가지고 생각했을 때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여도 너무 빨리 새로 배운 것이 쓸모없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사실 네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보다 새로 배운 것이 더 좋은 개념들일 수있다. 네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이 너무 간단한 개념, 너무 간단한 근사 일수 있다. 과학발전의 역사에도 보면 사람들이 미친 소리라고 했던 것이 사실은 가장 훌룡한 과학적 발견이 된 경우가 많았단다.

 

한가지 예가 바로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고 말했던 지동설이지. 지구는 둥글고 태양주변을 돌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건 미친소리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다 바보는 아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 모두 답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거든. 예를 들어 지구가 그렇게 빨리 움직인다면 당연히 우리가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을때 그런 지적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차를 타고 달리면 바람을 느끼니까. 말하자면 지동설에 반대한 사람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새로운 법칙을 가지고 만든 개념들이 지금 자기들이 쓰는 개념들과 서로 짝이 잘 안맞는 것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다 준비된 후에야 새로운 생각을 발표할 수 있다면 과학은 전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 말이 안되는 것같지만 어떤 쪽에서 보면 분명히 그래야 할 것같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모두가 믿는 이야기가 되고는 하는 것이지.

 

어떤 개념들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에는 또한 다른 문제도 있다. 즉 우리가 우리가 가진 개념을 바꾸고 잊어야 할 다른 이유도 있다. 그건 세상이 바뀌기 때문이지. 만약 네가 1살짜리 아기였는데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갑자기 11살이 되어 있더라고 해보자. 눈을 감기전에 그 아기가 살던 세상에서는 그 아기는 기저귀에 오줌을 싸도 음식을 밀어서 쏟아도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웃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11살이 되어 있다면 그 11살짜리 아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거나 음식을 쏟으면 다른 사람이 화를 내거나 웃겠지.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모르면 전에는 맞았던 개념들이 틀린 것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눈 사람을 자를 때도 우리는 눈사람은 눈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눈사람이 점점 녹아서 물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눈사람이 물이 되고 나서 여기서 어디가 머리지? 라고 물으면 바보같은 질문이겠지.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는 개념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옛날의 개념들이 그때는 정확하고 좋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이상 좋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데 여러번 말했지만 개념들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실수를 하게 된다. 옛날 개념을 가지고 자꾸 세상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개념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

 

우리 모두가 가진 개념을 한꺼번에 크게 바꿀 때 사람들은 그걸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한가지 혁명에 대해 말을 해줄까 한다. 그건 과학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아마도 너도 알고 있을 뉴턴이나 갈릴레오같은 유명한 과학자가 살아있었을 때의 일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개념은 쉽게 만들어 쉽게 쓰기 어렵다. 사람들은 자꾸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에다가 새로운 개념을 써서 설명을 만들어 내려고 하거든. 즉 알고 있는 것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그냥 새로운 개념을 자꾸 더해서 빈틈을 메꾸려고 하는 거야. 알고 있는 개념들을 한꺼번에 크게 바꾸는 일은 쉽지도 않고 반드시 잘하는 일이라고 할수 없을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 여러가지 개념들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서 누구도 그걸 정리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 질 때가 있단다. 그걸 써서 어떤 설명을 만들어 내는데 그 설명이 매우 길고 복잡하고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도 없고 해도 개념들을 어디서 어디까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

 

17세기의 뉴튼이나 갈릴레오는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식의 개념을 쓰는 대신 측정을 하는 것을 강조했다. 측정이란건 뭔가를 숫자로 잰다는 것이지. 무거운 것은 내려오고 가벼운 것은 올라간다 같은 말은 도대체 무겁다는게 얼마만큼 무거운 것인지, 내려오면 얼마나 빨리 내려온다는 것인지. 그런게 하나도 없으니 설명이 제대로 안된다. 그러니까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여러가지 복잡한 개념을 버리고 측정을 하자는 것이지. 자로 거리를 재고 시계로 시간을 재자는 것이고 숫자로 표현을 하자는 것이지. 철수는 무겁다라고 하지 말고 철수는 75kg이다라고 하자는 것이지. 그들은 과학을 수학이라는 언어를 써서 다시 썼다. 그렇게 하자 과학자들은 아주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고 아주 작은 수의 개념만을 써도 세상이 잘 설명된다는 것을 발견했지.

 

뉴튼은 요즘 우리가 뉴튼의 3법칙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지금은 이게 뭔지 알 필요는 없다)이라고 부르는 법칙을 쓰면 아주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건 말하자면 전에는 교과서가 천페이지쯤 되었는데 갑자기 다 필요없고 종이 한두장에 적은 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기억도 못하는 많은 개념들은 다 쓸모없는 것으로 잊혀졌고 사람들은 갑자기 세상이 아주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지. 이제 사람들은 땅을 파면 지옥이 나오고 하늘위에는 천당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땅속이나 우주에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도 그렇지. 여러번 실험을 통해 확인한 물리법칙으로 세상을 보면 그런게 믿기 어렵기 때문이지.

 

과학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그저 나이가 많아지고 몸이 커진다고 해서 제대로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30살이 되었다고 해도 아기처럼 자기가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누군가가 밥을 먹여주고 있다면 제대로된 어른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런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반드시 천천히 조금씩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아이의 눈으로, 아이에게 어울리는 개념들로 세상을 보고 그걸 바꾸지 않으려고 하지. 그런데 너무 오랜동안 그렇게 하면 세상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화를 내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뭔가 이해가 안되는 말들을 한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개념들을 자꾸 조금씩 바꿔봐도 뭔가 세상은 복잡하기만 하지. 너는 마치 농구장에 와서 축구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진다. 그러다가 자신이 어른이 된다는 것, 예를 들어 책임감이라던가, 어른이니까 해야만 하는것 또 어른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규칙들을 깨닫게 되면 세상은 종종 다시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뀐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나 주변사람이 계속 그 사람을 아이로 취급해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대개 그런 것이다. 새로운 개념과 규칙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지.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도 하나의 혁명인 셈이다.

 

개념이 바뀌면 과학은 혁명적으로 바뀐다. 17세기 혁명의 시대에 그 혁명에 –다시 말하면 새로운 과학 혹은 새로운 개념들을 쓰는 과학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동설에 대해서 그렇듯이 그들이 모두 엉터리 질문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과학은 너무나 훌룡하게 많은 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과학을 모든 사람이 절대 틀리지 않는 당연한 법칙으로 믿게 되었다. 19세기가 되자 과학자들이 이제 더이상 발견할 과학의 법칙은 없으며 따라서 과학도 별로 더 발전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이 여전히 근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것은 또 하나의 개념의 변화, 또 하나의 과학의 혁명이 20세기 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등장한 과학자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알버트 아인쉬타인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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