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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배고픈 시대?

by 격암(강국진) 2013. 1. 23.

오늘 신문에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다는 기사가 난 것을 봤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인문계열의 사람들은 돈이 안된다고 하고 이공계 사람들은 우리도 돈 안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현실인가 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단순히 인문학이 배고픈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인문학이 제 할일을 하지 않은 시대나 인문학에게 거대한 기회와 시장이 주어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세상의 결핍,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일까요.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꿈을 잃은 시대이고 꿈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얼마전에 읽은 기사에는 어린 아이들이 장래의 꿈으로 운동선수를 최고로 뽑았다고 하더군요. 부모들은 의사를 최고로 뽑았다는 설명도 붙어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이 두가지 사실에 영향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미디어가 날마다 떠들어 대는 기사가 바로 스포츠 영웅의 영광과 수입이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어른들도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에 대해서는 한가지 흔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이 꿈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뭘 성공이냐 부르는 것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통상 생각하는 것같은 성공은 적당한 꿈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수가 되거나 야구선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고 야구를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것은 꿈이 될수 있지만 성공한 가수가 되거나 돈 잘버는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공은 꿈을 추구한 결과 부수물로 올 수도 있고 안올 수도 있는 것이죠. 


1등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면 그 꿈은 남을 이기는 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1등은 한명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꿈을 꾼다고 할때 세상은 지옥같은 세상이 될것입니다. 자기 꿈을 이루자면 남을 이겨야 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수단에 대한 유혹도 받게 될테니까요. 누군가가 왜 그런게 꿈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되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꿈이 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꿈이란 성공실패에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배가 고파도 하겠다는 것이지요. 그 수준이 못되는 꿈이란  결국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가지는 것, 그것 보다 위인 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돈돈하는 미디어를 볼때 미디어가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꿈이란 고작 성공에 대한 꿈, 남을 이기겠다는 꿈이 아닌가 합니다. 아이들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로 명예와 돈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고민없이 운동선수나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것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온 국민들이 축구선수만 꿈꾼다는 남미처럼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이런 꿈의 변화가 학생들의 학력저하에 반영되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나 정치가를 꿈꾸는 초등학생과 축구선수를 꿈꾸는 초등학생이 체력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높을까요. 반대로 학력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높을까요. 꿈과 자기가 잘하는것 사이에 관련성이 없을리가 없지요. 


문제의 반대편에는 어른들의 세상에도 꿈이 없기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직장인들은 꿈이 없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는 있으니 계속 그 일을 할뿐입니다. 그들에게 꿈이 있다면 종종 행복한 은퇴생활이지요. 그때까지는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 직장을 계속 유지하는 일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사람이 잔뜩 생긴 것이 요즘의 한국입니다. 베이비붐세대의 은퇴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은퇴를 하면, 은퇴가 가까워 오면 이런 저런 핑게로 뒤로 밀어두기만 했던 질문들이 한꺼번에 몰려 옵니다. 그 질문들이란 어떻게 말하면 나의 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삶이란, 이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런거는 한가할 때 나중에 라고 하면서 그저 열심히 살던대로 살았던 당신. 은퇴하고 나서, 은퇴가 가까워오자, 당신은 자신이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배의 선장, 그런데도 그 구멍을 계속 무시하고 살았던 선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제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도망갈수도 없습니다.  밀린 숙제는 사라지지 않고 이자를 불려서 커졌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판입니다. 그 질문이란 물론 도대체 내 인생이란 뭐였냐라는 것이죠. 


이런 어른들을 보면서 다수의 아이들은 나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부모님이란게 밖으로만 떠돌면서 돈을 벌고, 사교육에 바쁘게 돌리느라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지도 않은 부모, 그러면서 본인도 만족해 하지 못하고 행복해하지 못하는 부모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꿈없는 부모의 삶을 보면서 아이는 나는 저렇게는 안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미디어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을 유일한 영웅으로 항상 거론합니다. 아이들이 박찬호나 김연아같은 스타를 꿈꾸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고 자살율이 올라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1세기 한국의 풍경


세상사람들이 모두 호떡을 먹고 있습니다. 호떡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떡장사가 말하길 호떡장사가 굶는 시대라고 하면 이게 어떻게 된걸까요. 저는 몇가지를 고려하면서 도대체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고, 안철수와 나꼼수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로 떠올랐던 일이며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에 종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은 인문학적 요구가 크게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있고, 꿈을 잃은 아이들이 있으며, 방황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한국은 극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정신적인 건강을 다스리고픈 욕망과 필요도 존재합니다. 술을 마셔도 취해서 쓰러지자고 마시는게 아니라 원두막에서 달을 보면서 술한잔하는 풍류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삶의 질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지방자치시대, 작은 공동체가 번성하는 시대라는 것도 인문학적인 요구를 증가 시킵니다. 전체에서 잘라져나가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살려고 하니까요. 전국에서 마을 예쁘게 만드는 그림 그리기가 유행합니다. 시비를 세우고, 우리 고장에는 이런 저런 소설가나 시인이 산다고 선전됩니다. 지역을 개발하는데 있어서도 이야기 구조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관광을 돕고 삶을 돕습니다. t지역마다 자기 역사를 쓰고 전통을 부활시키거나 만들어 축제를 만듭니다. 올레길을 만드는 것은 돈 이상으로 철학과 삶의 형식에 대한 고민입니다. 인문학적 요구는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걸 한국 안에서 감당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책이 보이고 있는 것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가 자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상식에 대해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버드 대학 교수의 책에 매달립니다. 외국에서 배운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정의, 우리의 상식에 대해 지나치게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고전, 우리의 생각이 있고 나서야 남의 생각도 들어야 합니다. 이런 현실은 물론 우리 인문학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이 배고픈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안철수나 김어준이 인문학으로 돈을 벌고 유명인이 되고 영향력을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는 소위 힐링 강연이라고 할 강연이 화제가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을 배우고 싶은데 그걸 가르쳐 주는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호떡찾는 사람은 많은데 호떡장사가 우리가 굶는 시대라고 말한다면 호떡장사에게도 뭔가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요. 


인문학이 자기 할일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국에서 인생의 질문을 감당하도록 하는데 큰 것은 종교입니다. 그리고 물론 종교집단들은 큰 돈을 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문학적 지혜에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그 쪽으로 돈을 쓰기 보다는 종교단체에 돈을 가져다 바칩니다. 


물론 종교를 가지고,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스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해 조언을 듣는 다는 사실을 일반론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길가다 만난 점쟁이에게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물어보고 그것을 따른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하겠지요. 문제는 제가 보기엔 다수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그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분명 여기저기에서 큰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종교의 문제인 동시에 학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문계열의 사람들은 이공계열의 사람들에게 너희는 우리보다 낫다고 말하곤 합니다만 한국은 이공계열 즉 과학기술의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인문이건 과학이건 모든 학문이 무시되는 나라입니다. 


학문은 애초에 인문과 과학이 구분되는게 아닙니다. 과학도 철학에서 갈라져나온 것입니다. 뉴튼과 아인쉬타인이 회사를 세우거나 부국강병을 꿈꿨기 때문에 과학을 한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와 철학 즉 가치관의 연장선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치에 이르르면 이공계는 배고픈 인문계보다 더합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인문학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배웁니다. 그러나 과학은 가치같은 것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오직 돈을 통해서만 삶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적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면 과학적 눈으로는 더 안봅니다. 그래서 이공계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저 괴짜, 똑똑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빠진 사람으로 생각되곤 합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학문이 종교에게 형편없이 밀립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새파랗게 젊은 스님이나 목사는 답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쉽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고 너무 쉽게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삶에 대해 생각 좀 해봤다는 말을 들으려면 일단 머리를 깍거나 십자가를 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반면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뭘 알아라고 가볍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수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삼풍백화점 사고의 책임자나 고문전문가가 종교인으로 변하면 그들에게 인생을 배우면서 말이지요. 


이런 현실의 뒤에는 전문화라고 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도 종종 스스로를 그저 전문적인 지식이 좀 있는 사람으로만 생각할 뿐 인생을 논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이 전문화 되었기 때문에 인문학을 하는 것도 심지어 철학을 하는 것도 이제는 인생을 논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전공을 할 뿐인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답을 모르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겸손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몰라, 나는 가르치지 않겠어, 나는 그저 내 전공과목을 팔 뿐이야라고 말하는 동안, 사람들은 나는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몰려갑니다. 특히 저소득층, 저교육층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알아서 안다고 말하는 것인지 엉터리 약장수 같은 사람들인지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의사없는 세상에서 돌팔이 무면허 가짜 의사들에게 달려가는 것같은 세상을 삽니다. 온갖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쉽사리 처방됩니다.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인문학의 부활이니 사회적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통합과 실제로 도움이 되는 지식인


통합이라고 부르던 통섭이라고 부르던 학제간 연구라고 부르던 우리는 이제 잡다한 지식과 분류를 묶고 통합적인 인간을 논하고 가르치고 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정말 행복하기 위해 쓸모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파편화 되어 내 생각이란 걸 해본적이 없다라는 식으로, 나는 그저 내 전공을 할 뿐이라는 말로는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통합적인 지식인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4대강 공사를 하면 당연히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4대강 공사에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재정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 생물학적인 측면, 역사적인 측면, 공학적인 측면등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전문가가 재정적으로 된다던가 안된다던가 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즉 모두가 자기의 좁은 틀속에서 열심히 자기일만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리 의견을 나눠도 4대강 공사 해야하는지 안해야 하는지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에 내가 해봐서 안다고 말하는 권력자가 있으면 그 사람이 맘대로 결정하게 됩니다. 4대강 공사만 그렇겠습니까. 인생과 세상 문제에서 딱 한가지 전문분야만 관련된 일이란 시험지 위의 시험문제정도나 그럴것입니다. 


이미 움직임은 사회의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런 부분이 좀더 의식적으로 인식되고 좀 더 큰 문화운동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통합과 자아찾기가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마을마다 입시학원이 있듯이 자아찾기 모임과 교실이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니까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동네마다 있는 산악회에서 친목회에서 책읽기 모임을 가지고 강사를 초빙해서 교실을 열면 그게 자아찾기 모임이 되는 것이겠지요. 


대학을 포함한 학교에서도 통합적 인간을 위한 교육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뤄야 하는 것은 잘게 나눠져있고 좁게만 보게 훈련된 우리를 고쳐서 한꺼번에 세상을 보고, 넓게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말고 할수 있는데까지 자기 눈으로 볼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겠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부는 실천으로 이뤄져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안철수와 종교에서 배워야 합니다. 제2의 안철수 제3의 안철수가 나타나고 종교가 어떻게 세상을 돕는가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이게 문학이야, 이게 철학이야, 이게 과학이야라고 말하고 자기의 좁은 자리에 있지 말고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상실되었다면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뭐가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지방자치시대가 어떻게 인문학적 요구를 증가시키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많은 공익재단들이 생겨서 그들이 세상을 개선하는데 힘을 쓰는 시대가 된다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협동조합도 공익재단들도 어떻게 말하면 모두 인문학의 교회들입니다. 박원순이 만든 아름다운 가게처럼 중고물품을 파는 가게도 당연히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인문학의 소비처가 될 것입니다. 박원순이 아름다운 가게는 낡은 물건은 쓰는 철학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하던 것이 사소한 일은 아닙니다. 목사가 세상에 교회가 없으면 굶는게 당연하지요. 스타가 없으면 피디와 촬영기사가 굶는게 당연합니다. 인문학계열의 사람들이 먹고 살 방법을 찾기 위해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회적 개혁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배고픈 시대는 계속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게 인문학이다란 선입견을 깨고 통합과 실용이라는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이 수학공부를 하거나 과학공부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 배고픈 시대라고 합니다. 우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을 공부하기로 꿈꾸기 시작했을때 뭘 꿈꿨던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알수 없지만 할 일이 뭔지알면 배가 좀 덜 고플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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