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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키는 슈퍼영웅

by 격암(강국진) 2013. 2. 7.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배트맨 같은 슈퍼영웅 영화를 보면 영웅들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세계에서 진정한 슈퍼영웅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며 현실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으로써 때로는 유명하지만 대개는 조용히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중요성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어서 머지 않은 미래는 바로 이 슈퍼영웅들의 시대로 불리울 시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민영웅의 시대랄까. 


슈퍼영웅이란 누구인가


그 슈퍼영웅들의 파워는 하늘을 날거나 벽을 꽤둟어보는 것은 아니다. 텔레파시의 능력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비슷하기도 하다. 그들이 겸비한 힘은 창의력과 통찰력, 감수성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이 보지 못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장소에서 그들의 수퍼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파워가 창의력과 통찰력 그리고 감수성같은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사실 그들의 슈퍼파워에 대해 제대로 설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자의 소요유편에 보면 견오라는 사람이 신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는 접여가 신인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는데 황당하고 과장되어 일상생활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견오는 신인의 존재에 대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신인이란 사람은 무엇도 그를 해칠 수없을 뿐만 아니라 몸의 먼지와 때로도 요순 임금 같은 성군을 만들어 낸다고 하기 때문이다. 견오는 신인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지만 그와 대화하는 연숙은 눈멀고 귀먼 사람이 뭘 알겠느냐고 말하고 만다. 즉 그는 신인이란 존재하지만 다만 그들을 보지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장자가 말하는 신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나는 그걸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대개 창의력이나 통찰력 그리고 감수성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는 나는 그게 뭔지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대개 나는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때로는 나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무지다. 


앞에서 말한 단어들은 흔히 직관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말해지곤 하는데 직관이 뭔지,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수학적 진리를 논하는 장에서도 이 직관의 문제는 등장하고 윤리학의 문제에서도 이 직관의 문제는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고 해야할 철학적 난제들이다. 이런게 우리가 통상 말하는 자동차나 티브이의 작동원리처럼 알려져 있다면 우리가 뭐하러 소크라테스니 예수니 부처니 플라톤이니 하는 수천년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직도 읽고 있을 것인가. 


포퍼같은 사람은 현대인의 문제를 논하면서도 플라톤의 사상이 그 이유라고 말한다. 무려 몇천년전에 글 몇개를 남긴 사람이 수십억 현대인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대의 인도를 말하면서 간디를 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이 세계의 슈퍼파워가 된 역사적 근원에는 남북전쟁이 자리잡고 거기에는 링컨이 있다. 링컨을 빼고 현대미국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슈퍼영웅들은 반드시 이렇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유명했기 때문에 그 유명세가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한번 그 슈퍼파워를 오해하는 것이다. 


윤리적 힘과 성장의 한계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하자. 그럴때 그 집을 짓는 재료가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큰 집을 지을수 있는가의 한계를 결정할 것이다. 흙벽돌로 수십층하는 마천루를 쌓아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사회가 성장할 때 그 성장의 한계가 윤리적 힘에 의해 결정된 다는 사실은 쉽게 망각하는 것같다. 


그 이유는 사회적 성장은 종종 인간의 수명에 비해 더 길며 따라서 사회적 팽창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물이 얼마든지 있는 나라에서 기름값만 걱정하는 것처럼 사회적 팽창의 한계를 결정할 윤리적 힘은 덜 걱정하고 더더 팽창하는데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마치 벽돌로 건물을 쌓아올리는데 어떻게 하면 한층 더 올릴까만 생각하는 모양세다. 기초와 재료의 강도를 생각하지 않고 쌓아올리면 결국 건물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통채로 무너질것이다. 하지만 계속 쌓아올리기만 해왔고 이제까지 괜찮았으니 문제는 벽돌을 더 구해서 층수를 더 높이는 것이지 다른 문제를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태도는 비극을 만든다. 


예를 들어 서구가 쌓아올린 자본주의의 마천루는 금욕주의적인 기독교 문화위에 쌓아올린 것이다. 한국이 쌓아 올린 자본주의의 마천루는 한국 전통문화를 그 기초 재료로 해서 쌓아 올린 것이다. 윤리적 힘이 없이 거대한 탑을 쌓으면 그 탑은 무너져서 그대로 무덤이 되기 쉽다. 자본주의는 어느 나라에나 수출되어 한국처럼 성공을 거둔게 아니다. 간디가 현대인도를 상징하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 비폭력투쟁이라는 형태로 인도인의 적이 영국이기 전에 윤리적 힘을 가지지 못한 인도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수신에 평생을 노력한다. 영국인과 투쟁할때도 무분별한 폭력이 발생하면 간디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막았다. 윤리적 힘을 가지지 못한 인도는 영국이 물러간다고 해도 스스로 붕괴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금 전세계를 둘러보면 무덤이 되기 직전의 나라가 아닌 나라가 거의 없다. 다들 말이 안되는 짓을 말이 안되는 줄 알면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말도 안되는 빚이 쌓였다. 미국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은 2012년 6월 현재 16.1조달러라고 한다. 전세계 인구로 나눠도 2천5백불쯤 된다.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3백만원쯤 빚을 진 것이다. 미국인구로 나누면 5만불쯤 되니까 미국인 한사람당 5-6천만원씩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4인가족이라면 2억이 넘는다. 이게 미국의 빚이다. 그리고 이 빚은 매우 빨리 불어나고 있으며 이건 국가부채일 뿐이다. 지방정부도 도산직전이며 캘리포니아주의 빚이 한국이 지고 있는 빚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게 윤리적 파국이 아니라면 뭐가 윤리적 파국일까.


한국은 어떤가. 전세계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있는 자살률에 우리는 어느새 익숙하다. 가족은 파괴되고 날마다 신문에서는 부모를 죽인 자식이나 자식을 죽인 부모 뉴스가 나올지경이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극한으로 몰리는데 한쪽에서는 성장 성장을 외친다. 엄청난 규모의 국민연금은 본래 그걸 납입한 사람들의 개인돈인데 마치 공익을 위해 모은 세금인것처럼 여기저기로 끌어다가 써버리고 만다. 그러다 안되면 우리도 그냥 국채를 크게 발행하거나 공공재산을 팔아치운다. 자식세대를 더 가난하게 해서 배를 불리는 부모세대란 윤리적인가. 양심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원래 국가는 비윤리적이고 나쁜 인간들이 성공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세상은 적자생존의 세계고 경쟁의 세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도둑놈들의 집단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없어서는 도둑질도 할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관계가 적자생존이고 경쟁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보고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이 종족으로 유지되는 것은 어른이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가 자라나 다시 아이를 키우는 생의 순환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행복해 하도록 태어난 동물이다. 무한 경쟁이 아니라 자기 희생이 인간종족을 유지하게 만든다. 출산율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한국은 행복은 둘째치고 사실상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성장의 전망


대개 인간사회의 역사를 보면 성장과 불황은 주기적으로 오기 마련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런 주기가 있다고 해도 더 큰 눈으로 보면 그런 주기가 있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윤리와 성장과의 관계를 통찰하는게 중요하다. 즉 인간이 가치와 윤리 측면에서 성장할지 못할 때 성장도 불가능하며 어떤 기준으로 성장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건 대다수 인간의 불행에 기반한 것으로 성장이라고 부를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장이 가능하려면 윤리적이고 가치적이며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야겠지만 그전에 모두가 프로축구 선수가 아니고 모두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듯 이런 분야에 있어서 사회를 지탱해 내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게 필요하다. 


그들은 한 사회의 윤리적 방향타고 기둥들이다. 그들이 모두 정치가가 되고 철학을 강의하고 방송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바로 우리 사회를 지탱해 내는 기둥속의 철근 역할을 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지한 짓을 하면 할수록 그 하중은 그들에게 가해지게 된다. 그들이 공동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붙들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좋은 가장이고 지역마을의 이장이거나 아니면 그냥 단순하 이웃이다. 그들은 친절한 소년이며 경찰관이고 버스운전사다. 그들은 변신한 슈퍼맨처럼 우리 사회의 여러곳에 티나지 않게 존재하며 분쟁을 미리 방지하거나 생겨난 분쟁을 풀어낸다. 그들이 이 세상을 견딜만한 곳으로 만든다. 


그들이 바로 내가 거론한 슈퍼영웅들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를 포함한 세계사회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적 붕괴는 쓰나미 같은 여파를 만들고 주변 사회를 흔들어 댈것이다. 신뢰가 무너지고 사회가 도미노처럼 붕괴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어느정도까지 공동체를 지켜내는가에 달려있다. 윤리적 기둥의 강도가 한계까지 테스트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더더욱 중요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맺는 말


우리는 요즘 노동자의 권리라던가,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 따위는 어느 정도 상식으로 아는 세상을 산다. 그런데 지금도 노동환경이 나쁜 나라에서 그렇듯 우리나라도 그게 상식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었다. 어린 십대 소녀들을 약먹이며 몸이 망가질때 까지 일시키다가 몰아내 버리는 일이 벌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양반이 노비와 달라서 노비가 비참하게 살아도 신분의 차이가 그것을 어쩔수 없이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듯 노동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노동자도 사실 그걸 몰랐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눈에 보인다고 예전에도 누구에게나 그게 보였던 것은 아니다. 


전태일은 자기 몸을 불살라서 자기 눈에 보이는 사실을 외친다. 노동자가 인간인게 안보이냐고. 전태일이 남의 몸을 불태웠으면 그런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희생이란 오직 감정이 있고 사고하는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노동자가 인간임을 보여주었고 전태일을 알아본 조영래에 의해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누구나 그걸 보게 된 것이다.


지방의 발전이 요즘 큰 주제다. 점점 더 서울의 발전보다는 지방의 발전이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방은 누가 발전시킬까. 터전은 다른데 두고 돈을 벌어갈 욕심만 있는 외부인이 시킬까? 결국 지방이 있으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진짜 사람이 있어야 살기 좋은 마을이 되고 그래야 더더 살기 좋은곳으로 변해 갈수 있다. 돈 욕심만 있고 텃세나 부리고 하는 사람들만 드글대는 곳, 그래서 거기서 정착하고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도 쫒아내 버리는 곳은 결국 잘돼야 투기꾼들의 먹이나 되다가 불이 꺼지면 폐허만 남을 뿐이다. 슈퍼영웅의 힘은 여기서도 꼭 필요하다. 슈퍼영웅이 뭘하고 있는가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그들은 세상의 어려움을 풀어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들은 참혹한 일이 생기는 것을 어둠속에서 미리 막으며 생색도 내지 않는다. 


그 슈퍼파워는 뭘까. 그 슈퍼파워가 감수성이라던가 창의력이라던가 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역시 다른 것들처럼 타고나기도 하는 것이지만 많은 노력에 의해서 경험에 의해서 자라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글을 줄줄 외우면 자라나는 것도 아니다. 책읽고 바보가 된 사람도 많다. 공부많이한 교수가 인격도 훌룡할거라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쇼펜하우어는 나쁜 책을 읽는것이야 말로 정말 피해야 되는데 세상의 대부분의 책이 나쁜 책이라고 말한다. 그게 공장에서 찍어내듯 쉽게 만들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사실 이글을 미래를 위한 재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다가 쓰게 되었다. 리더가 되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일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은 단순히 프로그램만 하는 사람은 3D 업종에 일하는 사람이지만 컴퓨터 발전 초기에는 엄청난 연봉을 받는 천재로 취급되던 사람이 프로그래머다. 시대가 뭘 요구하는 가를 고민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재능을 발견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을까.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진 것, 어학능력이 있는것, 계산 능력이 뛰어난 것은 미래를 위한 재능이 아니다. 종합하는 능력, 통찰력,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치판단에 관련된 능력이고 사회를 지탱할 기둥이 될 능력이 될 것이다. 그 능력이 부족하여 쩔쩔매고 있는 중간관리인이며 가장들이 우리 사회에는 넘쳐난다. 우리는 당연히 어릴때부터 그런 것을 키워줄 학교와 가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시대는 역주행을 하고 있는 듯하고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것같다. 직장상사에게 부하직원의 부모가 전화를 걸어서 직장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쯤되면 그 직원은 유치원생 수준의 지능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유치원생이 세상을 어떻게 스스로 살아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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