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구하는' 부분에 대해서
세계를 구한다던가 한국을 구한다라는 말은 거창한 말이다. 그러나 거창한 말이라고 해서 항상 불필요한 과장이 되기만 하는것은 아니며 필요해 지는 문맥이 있다. 내게 있어서 그런 문맥이란 나와 한국간의 관계를 잊지 않는 것이다. 즉 한국이 행복해 지는 것이 내가 행복해 지는 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한국을 구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한 이 말도 사실은 현대에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2012년에 사망한 유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역사가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면서 역사의 필연성을 말했던 막시즘을 역사주의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는데 그같은 일이 벌어졌던 20세기의 마지막에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제는 거꾸로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을 읽고 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역사의 연장선상을 살고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법칙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무슨일이 어제 일어났건 그게 오늘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믿는다면 역사는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에는 역사에 선을 죽 그어서 나는 역사가 전개되는 법칙을 확실히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 말엽이 되자 이제는 세상에 법칙따위는 없다면서 모든 역사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제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테두리에는 가족이니 지역사회니 하는 보다 작은 단어들에 그러는 것처럼 대개 억압과 잊어버려야 할 과거라는 식의 꼬리표가 붙는다. 이따금식은 다시 민족주의를 불태우는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은 이제 낡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미 패배하고 실패한 20세기의 초반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것이다. 때문에 대개의 대중은 이제 그런 식의 큰 이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지식인들의 다수도 그런 거대한 이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일상에 좀 더 집중하라는 조언을 주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허무주의 내지 배금주의만 남긴다. 우리가 역사를 잊어버릴때 우리는 스스로가 가지는 의미도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가 그렇게도 잘 잊혀진다는 사실은 우리를 윤리적으로 타락하기 쉽게 만든다. 역사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일관된 철학에 따라 인생을 살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면 어떤가. 어차피 과거는 다 잊혀졌는데. 거짓된 약속을 하면 어떤가. 어차피 나중이 되면 지금은 다 잊혀질텐데. 역사가 없다면 제주도를 외국에 팔아먹건 서울을 외국에 팔아먹건 경복궁을 외국에 팔아먹건 못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한다.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어떤 이름들의 존재는 그 역사에 대한 인식에 크게 달려 있다. 즉 그 역사를 완전히 망각하면 그런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역사를 잘 인식해서 그것들을 또렸하게 인식하면 우리는 이제 실패한 20세기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아직도 그 폭력적 역사의 상처가 남아있는 현대에서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민족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 같은 단어만 나오면 펄쩍 뛰면서 히틀러 운운 하는 지식인들은 얼마든지 우리 사회에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경우 대개 적당히 중간을 취하는 것밖에 답이 없지 않냐고 하던가 아니면 양극단으로 달려간다. 당뇨병환자에게 짠음식도 단음식도 좋지 않다. 그러면 그 중간인 짜고 단 음식은 좋을까? 안좋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조차 없을 것이다. 현대는 이런 혼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뭔지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왕과 대통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선을 논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이야기하면서 편할때 마다 비일관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조각난 논리를 따온다. 대선같은 판국에서 그들은 물론 한국을 구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구하려고 하는 한국이란게 뭘까. 자신이 믿는 상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할때 공평이나 상식이 흔들린다. 4대강은 구해진건가 파괴된건가. 공사를 할때도 공사가 끝나고도 의견이 다르다. 그렇다고 대선이니 4대강공사니 하는 거대한 것에 신경끊고 자신의 일상에 집중해서 스파게티 삶는 법이나 고민하고 있으면 그 행복이 정말 유지될수 있는 것일까?
나의 행복은 한국의 행복에 크게 달려 있다라는 이 단순해 보이는 문장을 진실로 믿는 일이 21세기는 쉽지가 않다. 우리는 한국을 구한다는 것에 대해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구하려고 하는 한국은 어떤 한국인가.
물질적 사회적 발전과 성공을 약속한 방법
오늘날 한국을 구한다고 했을 때 그 방법으로 뭐가 거론되는가에 대해 한가지 매우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돈이다. 물질적 발전이며 성장이다. 가계부채가 걱정이라는 말이 신문을 뒤덮는다. 과학기술이건 예술이건 항상 그게 얼마나 한다더라 하는 것이 핵심적으로 다뤄진다. 한국을 구한다는 말은 현실에서 거의 한국을 부자 만든다는 말로 이해된다.
오해하지 않도록 나는 한가지를 말해야 겠다. 마치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먼저 난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것처럼, 전라도를 욕하려면 나도 사실 전라도 사람이지만 하고 말하고, 경상도를 욕하려면 나도 경상도 사람이지만 하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어쩔수 없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한마디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읽는 사람중의 일부는 당장 나에게 어떤 낙인을 찍어서 그런 헛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고 할테니.
나 돈좋아한다. 출세도 좋아하고, 권력도 좋아한다. 다만 내가 그것들에 휘둘리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좀 있어서 가지고 싶지만 너무 지나치게 되지 않기를 조심할 뿐이며 그것들만으로 행복이 온다고 믿지 않을 뿐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돈이나 성장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 구하기라는 하는 견해는 그것이 틀렸다거나 맞았다거나 하기 전에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종교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복할 땅앞에서 혹은 개발할 숲앞에서 더 많은 땅을 개간하고 더 많은 땅을 정복하면 우리는 더 부자가 되고 행복해진다는 희망을 품는 것같은 것이다. 빠르게 팽창하는 기업의 말단사원으로서 더 위로 올라가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겠다는 희망같은 것이다.
그것이 항상 틀리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에 따라 맞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전혀 틀린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한국, 현대의 세계를 보면 이러한 꿈이나 희망은 어느 정도 지나간 시대,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시대로 인한 착각에 불과한 것같다. 세계에는 이제 신대륙이 없다. 새로운 시장도 없다. 야만인도 없고 기술적으로 후진적이지만 싸구려 노동력이 가득한 그런 나라도 없다. 적어도 우리가 충분히 필요한 만큼은 말이다. 세계는, 한국은 비좁아 졌다. 이제 누군가가 크자면, 누군가가 더 가지자면 누군가는 빼앗기고 패배하는 제로섬 싸움을 해야 한다.
전에도 세상은 항상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발전에 의해서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세상을 적어도 꿈꿀수는 있었다. 말하자면 발전이라는 말, 성공이라는 말이 모두의 승리가 될수 있다는 믿음이 보다 확고히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21세기의 오늘은 더더욱 사실이 아니다. 통상 말하는 발전이나 성공을 위해 우리는 더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하기에 그것들의 값어치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방식으로 우리 앞에 신세계를 보여줄 선각자는 있을수 있고 있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예를 들어 미국이나 유럽에 차를 더 많이 파는 것이 한국의 발전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거의 끝난 비전이다. 미국에서 중국에서 차를 조립해도 현대차는 한국 회사일까. 주주의 절반이상이 외국인이라도 삼성은 한국 회사일까. 어떤 문맥에서는 그렇고 어떤 문맥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제규모에서 세계2위인 중국이 통상규모에서 미국을 넘어섰고 이미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최대 교역국위치에 있다. 이런 중국이 언제까지 기술적인 분야에서 뒤져서 수입만 하게 될까. 10년전의 메이드인 차이나와 지금의 메이드인 차이나가 다르다. 10년뒤에는 어떨까. 과거에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오면 삼성에 취직하기 좋았다. 지금은 어떤가. 10년뒤에도 그들의 일자리는 많이 있을까.
한국에서는 SSM이나 체인점 같은 거대자본이 만든 시스텡이 지역상권을 망가뜨린다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어떤 분들은 그런건 그저 시장의 법칙이니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더 큰 규모로 보면 한국이라는 지역이 세계의 거대자본앞에서 망가지기 쉽상이다. 그런분들은 그런건 생각할까? 재벌들은 애국심 마케팅 안하나? 한국의 대학을 포함한 교육시스템이며 한국의 회사들도 결국 세계규모에서 보면 동네 구멍가게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문학계가 돈 기근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그들이 해야할 역할을 외국의 누군가가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나 현대는 구멍가게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건 맞지만 그래도 질문은 바뀌지 않는다. 재벌총수가 사는 동네의 구멍가게는 그 재벌총수와 관련있는 슈퍼마켓의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재벌회사가 돈을 버는 일은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재벌이 커지면 한국인들이 부유해지고 행복해 진다는 말은 반드시 옳지 않다. 거대자본은 한국인들에게 뭔가 받을 것이 있을때만 뭔가를 돌려줄 것이다. 삼성이나 현대를 무슨 아버지나 할아버지같은 가족처럼 성공만 한다면 당연히 나에게도 그 혜택을 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경쟁하고 승리하고 발전하는 그런 한국 구하기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 구하기의 한국이란게 도대체 뭔가. 무엇이 한국을 한국 아닌것과 구분지어주기에 한국은 구원될수 있다는 것인가.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 인이나 베트남인도 다 잘하는 것을 한국에서 하는데도 계속 일자리가 있고 임금이 높을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게 유지 가능한가?
개인과 한국의 방법
한국이 뭔가 특이 한게 있다면 그게 뭐가 되었던 그건 한국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불리우게 될것이다. 한국사회 안의 사회적 관계, 관습, 살아가는 방식의 특징이 한국인을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 다르게 만들고, 더 부유하게 만들거나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불행하게 만들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보여준 개인주의적 성공의 견해의 반대 극단으로서 행복은 이제 경쟁이 아니라 사회적 통합성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사회도 체인점들이 사방에 뻣어있다. 그런데 그런 거대자본에 대항하여 살아남아 있는 지역상권이나 지역 상점이 없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지역공동체라고 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역의 특색을 보존하고 서로 연합하여 거대자본에 의해 일자리를 모두 잃는 일을 방지 할수 있었다.
그럼 지역공동체라는건 어떻게 하면 있을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일반론을 펴거나 많은 사례를 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한국이라는 문화공동체의 중심적 가치가 될수 있는 것에 대한 한가지 생각을 말해 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삶의 의미는 인간적 완성에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적 완성이라는게 뭘 의미하는 것이든 말이다. 미국같은 젊은 나라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있다. 불교도 그렇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선비도 그렇다. 이상적인 삶의 목적이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완성에 있었다.
현대는 어떤가. 치열한 경쟁과 가치전도의 세상을 살다보니 우리는 껍데기만의 세상을 살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교수이거나 국회의원이거나 대통령이거나 선생님이거나 경찰이거나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우리는 과연 항상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고 할수 있을까. 호칭으로는 여왕으로 불리지만 매일 가정부의 일만하고 가정부취급을 받고 있는 경우 그 사람은 여왕인가 가정부인가. 이런 저런 관습이며 핑게속에서 바쁘게 사는 우리가 멈춰서서 스스로가 누군인가를 물었을때 과연 우리는 그 호칭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껍데기일뿐인가. 화려한 껍데기로 누군가인척 하고 있지만 그 실속을 보면 초라하고 비굴하기 조차한 삶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삶의 의미가 사회적 성공에 있다는 믿음에 따르면 우리는 경쟁에 이겨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부자가 됨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충족시킬수 있다.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할 것같으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면 삶이란 살아볼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런 믿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남을 밀어내고 밟는 한이 있어도 이겨야 내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의미가 인간적 완성에 있다는 믿음에는 애초에 경쟁이란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노력에 도움을 주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 타인이란 결국 나의 환경이고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네사람들이 다 너그럽고 이해심많아 지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내가 제일 이해심많은 사람이 될거라고 경쟁의식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개인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나아가는 한국을 살리는 방법이란 우선 한국이전에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인간적인 완성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그런 노력들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문화적 기반을 가진 사회로 가꿔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을때 여기서 말하는 한국 살리기란 단순히 국민소득이 올라간다던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가 어떻게 된다던가, 받고 있는 연금이며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되나 같은 외부적인 것 이전에 내부적으로 평온한 마음을 달성한 사회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우리 동네의 땅값이 얼마나 오르는가라던가 동네에 큰 슈퍼가 있나 없나, 큰 길이 들어오나 안오나에 핵심이 있는게 아니라 삶의 의미라고 말할수 있는 인간적 완성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가 하는 시각에 핵심이 있게 될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한 동네란 부자동네가 아니라 대개 좋은 이웃이 있는 동네다.
반복되는 느낌이지만 나는 인간적 완성이라는게 반드시 가난해지는 것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신경쓰면 반드시 가난해 진다고 하는 주장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실은 오늘날 사회적 규모에서 경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인간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일정수준의 성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자가 되면 그다음에 인심좀 쓰는게 아니라 인심이 있는 마을이라야 부자로 살수 있다. 돈 많이 벌면 화목한 가정이 될수 있는게 아니라 화목한 가정이어야 부자가 될수 있는 것이다. 깨어진 공동체가 어떤 비극을 만들어 내는가를 생각하면 이런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나는 앞에서 말한 역사의 망각이냐 역사의 인식이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먼저 개인에서 시작하고 한국이라는 틀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나 출세같은 외적인 것에 전적으로 빠지면 우리는 먼저 자기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바깥 세상은 그저 투쟁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민족이라는 것을 세우면 우리는 그것의 부속품이 되고 말며 그렇다고 그걸 전부 치워버리면 우리는 약해지고 종종 무의미의 바다를 헤매게 된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나서 한국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를 먼저 세워야 한다. 그러면 남도 편안하게 바라볼 능력이 생긴다. 과거의 전체주의가 폭력으로 번진 것은 나를 잃어버리고 오직 집단에서만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서고 나서 한국이 서면 우리는 편안한 곳에 살게 될뿐만 아니라 자유도 잃지 않게 될것이다. 그것이 나를 구하는 방법이고 한국을 구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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