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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의 잡설

by 격암(강국진) 2013. 1. 9.

가족과 함께 한국을 장기로 방문을 하는 중입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그동안 돌봐드리지 못했던 부모님들을 돌아보면서 지내다 보니 고국에서 음식이며 재미있는 일들이며 좋은 곳들이며를 방문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온전히 혼자되는 시간이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립게 생각하는 것은 글을 쓰는 일과 학문적인 일을 하는 것인데 전자의 것은 나를 돌아보고 나를 정리해 두지 않으면서 내가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고 학문적인 것은 여러 친지들과 얽히고 섥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시 과학이며 역사며 철학같은 주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그리워 지기 때문입니다.


휴가 동안에는 박이문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을 읽었고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은 읽는 중입니다만 그다지 썩 재미있게 읽어지지는 않는 군요.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란 책은 자신이 공부한 것을 잘 정리했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서 저자의 노고에 감사하는 느낌을 가지게는 되지만 어떤 지혜와 통찰력을 배우게 된다는 느낌은 별로 없어서 좀 가혹하게 말한다면 입시 참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열린 사회와 그적들은 그와 다르지만 사실 1권을 읽고 쓴 독후감을 읽어보니 그때의 그 느낌을 넘어선다는 것이 없어서 좀 너무 길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러나 이 독서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있다 없다의 문제 혹은 존재론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 쓸데 없이 추상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문제만큼은 추상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본래 근원적인 문제는 추상적이니까요. 추상적이기에 그만큼 보편적일수 있달까요.


예를 들어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갈림도 결국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이 언어 이전에 있을수 있는가 없는가,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서양철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공자며 노장에서 논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란 결국 있고 없음의 문제나 질서의 창출문제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같은 줄기로 이해할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놓아버리라던가  분별하지 말라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그것도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도 싸우고 싸우지 않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죠.결국 서양이며 극동아시아며 힌두교며 불교며 하는 고금의 지혜는 바로 이 있음과 없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계속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있음과 없음의 문제라고 하니까 매우 추상적입니다만 우리는 구체적으로 한국이라던가 노동자라던가 여자라던가 하는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테두리를 생각하면서 과연 있다는게 뭔가 하고 생각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란게 있는가. 노동자라는게 있는가, 여자라는게 있는가라고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당연하지 않냐고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의 단어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테두리입니다. 여자라고 하면 세상은 여자인것과 여자가 아닌것으로 갈리는 것이죠. 문제는 이런 테두리들은 아무리 자연스럽게 보여도 모두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은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런게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단 어딘가 불안감을 줍니다. 여자라고 불리는 인간은 물론 모두 다릅니다. 그걸 여자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순간 우리는 여자는 이렇다라던가 여자가 아닌 존재 즉 남자는 저렇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말이 많아지면 질수록 점점 더 여자나 남자는 단단한 실체가 됩니다. 즉 진짜로 존재하는 것으로 실재감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여자는 여자답다라는 말은 절대적 법칙이 아니라 거의 편견에 가까운 관찰결과 일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게 아니라 170센티 이상의 키를 가진 키다리와 그보다 작은 땅꼬마로 나눠서 키다리답다와 땅꼬마 답다로 이야기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테두리가 만들어 내는 편견을 중심으로 사고할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하기도 해서 여러가지 편견을 만들어 냅니다. 뭔가가 있다는 것은 절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적들에서 인간사회가 변화하는 역사적 변화의 법칙을 이해해서 미래를 예측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사주의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본질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든걸 알수 있고 알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을 기술하는 언어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논리실증주의 혹은 분석철학에 대한 비판 -언어를 명확하게 만들겠다는 비전-인 동시에 직관으로 진리를 통찰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적 철학가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이 후자에는 현상학 철학자로 말해지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박이문은 그의 책에서 포퍼를 분석철학자로 분류하지만 포퍼는 자신은 그 어느쪽에도 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가 쓴 자서전에서도 그렇지만 그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적 메세지입니다. 즉 우리는 모른다는 겁니다. 모르는 걸 아는척하는 것,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를 만든다는 겁니다.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하는 것의 대표주자가 바로 있음과 없음의 문제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한민족이라는 걸 생각해 봅시다. 한민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민족이란게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말들은 다 어떤 문맥에서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제한되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민족따위는 없다고 너무 강하게 믿는 사람이 문제고 민족이 존재한다고 너무 강하게 믿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버젓히 존재하는 한민족을 무시하기에 그것을 짓밟고 파괴하려고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 한민족의 번영이나 복수라는 식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속에서만 사고하기 때문에 결국 세상을 한민족과 비한민족의 싸움이라는 구도속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서 싸워 이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퍼가 그의 책에서 비판하는 헤겔의 논법과 유사합니다. 헤겔은 전쟁을 찬양하고 세상을 존재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들의 세계로 보기 때문에 국가는 존재를 유지하기위해 잔인하게 경쟁하고 전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헤겔의 철학을 계승한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계급간의 투쟁으로 봅니다. 즉 노동자계급이라는 것이 있다. 노동자는 비노동자와 투쟁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찬양론을 쉽게 비판하고 나는 그와 다르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계급투쟁이란 단어를 읽으면서 느낄수 있듯이 쉽게 비판하고 쉽게 넘어사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있음과 없음의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각의 폭력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즉 그는 그 스스로를 인간이라던가 한국인이라던가 대구 사람이라던가 광주사람이라던가 강씨문중의 사람이라던가, 어떤 가족의 일원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파악하면서 세계를 나와 내가 아닌것 사이의 투쟁구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입니다만 미국사람에게 한국 자동차파는 것은 애국이고 외국 자동차사는 것은 한국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제국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외국을 침략하자고 하는 것이며 그런 시각에서는 어차피 죽고 사는 게임이므로 외국이 우리를 침략해도 당연한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침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자연은 인간과 투쟁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모든 장벽을 전부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안에 존재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둥하면서 힘없는 약소국을 폭격하는 미국과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서로 다른데 평등하다는 것이 뭔가하는 것에는 매우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때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그들은 결국에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들고 제주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와 수도권이 모두 같아지는 즉 차이가 없는 세상을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게 됩니다. 그들은 역사를 지우고 정체성을 파괴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자유의 박탈인데 그것이 바로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됩니다. 우리는 이같은 것을 헤겔의 말이나 공산주의국가의 역사에서 볼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민족같은 말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려고 하는 몇몇 진보주의자들에게서 봅니다.

 

따지고 보면 멀리 갈것도 없이 지난 대선에서도 소위 진보그룹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에 패배한 것입니다. 정권창출을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협조하는 야권통합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당을 싫어하고 정권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끼리도 공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박근혜를 찍고 이명박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존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있을리 없지요. 고민도 없이 그저 일찌감치 통합 통합 단일화 단일화를 외치는 것이야 말로 폭력적이며 반개혁적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엔 감동이 없고 감동이 없으니 공감도 없고 나라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쿤과 대립했다고 하는 포퍼조차도 이문제를 너무 안이하게만 생각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여행은 끝나갑니다. 여행의 자극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만 일상으로 돌아가서 여기저기 상처난 곳을 보수하고 나를 추스리는 시간이 기다려 지는 군요.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여러분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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