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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노무현 추모시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3. 5. 8.

13.5.8

노무현 5주기를 맞이하여 노무현재단에서는 추모시를 모으고 있고 그 중에서 유시민이 쓴 추모시가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수 있을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 시를 읽어보니 저절로 다시 한번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떠오릅니다. '원칙과 상식' 이라던가 '특권과 반칙이 없는' 같은 말들은 모두 통합과 평등이라는 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통합이 뭐고 그게 왜 필요하며 그 통합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가하는 것에 대한 다수의 사람들의 공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통합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분들은 그것을 전체주의로 생각하면서 찬성하고 어떤 분들은 그걸 전체주의로 생각해서 반대하기도 합니다. 총칼로 억압으로 통합이 이뤄질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현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중에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로 야권지지자들을 폄하하고 그들을 폭력으로 억압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물론 야권지지자들 속에도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힘으로 반대편을 다 휩쓸어 버려야 했었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끝없는 피흘림만이 있을 뿐 결코 통합은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의 의견과 다양성을 압살하고 하나의 독재로 묶어내는 것은 좋고 나쁨을 떠나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가 그걸 보여줍니다. 통합이 전체주의 운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관념의 창출, 바로 국가의 창출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이 아프리카 사람과 다른 세금을 내는 것은 통상 상식이 무너지는 것도 특권을 누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지요. 그 말은 한국이라던가 한국인이라는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안에서의 한국인의 평등이 당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민과 이해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억압과 반칙에 분노하여 일어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남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느낌이 없게 됩니다. 결국 희생은 끝없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 통합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예가 바로 19세기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있기 이전에 벌어진 쇄국론자와 개국론자간의 논쟁입니다. 당시 막부시대였던 일본은 각 번으로 나뉘어 갈라져 있으면서 외국의 개국요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외국과 싸워야 하는가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논쟁을 했지만 결국 돌아보면 그 둘 다 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문을 열면 여러가지 피해가 생긴다는 쇄국론자의 주장도 옳고 싸워도 이길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국을 막을수 없다는 개국론자들도 옳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라의 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일뿐 열어야 할까 말까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개국론자도 쇄국론자도 진짜 질문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결국 열릴 수 밖에 없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을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죠. 메이지 유신은 이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번으로 나뉘어져서 여러나라의 연합이나 마찬가지었던 일본을 하나로 뭉쳐서 진정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킬 때 외국과의 접촉에서 패망하지 않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은 우리나라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일본이라는 관념이 또렷히 탄생되는 계기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층층히 칸칸히 나뉘어져서 온갖 편법과 반칙이 난무하던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평등해진 세상으로 가는 개혁이었습니다. 결국 중앙적 질서밑의 평등한 세상이라는 일본을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서게 되는 개혁이었습니다. 

 

역사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 진영과 산업화 진영의 양쪽의 시점에서 종종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선과 악의 역사 그리고 선을 위한 투쟁의 역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후 26년이 지난 지금 새누리당이 옳은가 민주당이 옳은가, 새누리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민주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들으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질문이 올바른 질문인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인가 하는 것이죠. 

 

이 질문은 쇄국과 개국에 대한 질문처럼 상대적으로 덜 본질적이고 덜 절박한 질문일지 모릅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도 정치적으로 양대세력으로 존재하지만 실은 모두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뉘어진 일본을 통치하던 번주들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인 힘없는 존재이며, 그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이듯 현재의 정당들은 모두 그렇다고 느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상충하는 사회적 내부의 요구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야권과 여권이 서로 견제하면서 답은 민주당이 아니면 새누리당이라고, 그 둘중에 어느 것이 답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시대의 문제라고 시야를 좁히는 정치, 그렇게 해서 서로의 생명을 주거니 받거니 살려주는 현재의 구도하에서 유지되는 정치는 사실 가면 갈수록 국민의 생활과는 동떨어지고 더더욱 큰 무능이 됩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면 노무현정부 시대부터 이미 정당은 무능했습니다. 탄핵당했던 노무현을 살려낸것도 당시의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시민들의 촛불집회였습니다. 

 

얼마전에 박근혜대통령이 세종시 건설에 나의 공이 있다고 주장해서 네티즌들의 헛웃음을 산 적이 있습니다. 관습헌법이라는 역사에 남을 코메디를 벌이면서 세종시 건설을 막아선 것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하면서도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충청도의원들은 지역구로 가서 이게 충청도를 위한 길이라고 말해야 했으니 당론에 따라야 할지 아니면 지역민심에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이었습니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권 내내 촛불집회가 벌어지면 그 뒤에 가서 조용히 한발 거드는 그런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야권의 논객이 미네르바보다 못해서 국회에서 아고라 글가지고 허둥지둥 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은 한류열풍이 불면 거기에 편승하고 나꼼수 열풍이 불면 거기에 편승합니다. 결국 편승만 할뿐 뭐하나 주체적으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지난 대선도 결국 비정치권에서 불어온 안철수 열풍이라는 바람이 없었다면 아예 여권과 야권의 경쟁이라는 구도 자체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같은 상태였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허약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앞에두고 한국사회가 잘되려면 새누리당이 이겨야 한다던가 민주당이 이겨야 한다던가 혹은 또다른 당이 창당되어 그 당이 이겨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질문한다면 물론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들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지만 실은 이미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상태로는 그들은 무능하고 오래된 반칙과 특권만 양산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쇄국이냐 개국이냐 이전에 일본이 제대로 서야 한다는 질문을 물어야 했던 것처럼 어느 당이 옳은가따위는 제치고 한국 사람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뭐가 한국을 나아가 남북을 뭉치게 할수 있을 있을지, 뭐가 한국을 창출해 내는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개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민주당도 새누리당도 그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통상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선거와 집권당의 교체라는 형태로 개혁은 이뤄지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행사의 주역은 정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는 국민들이 직접 통합하여 정치권에 요구를 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하여 일어난 시민들이 사회적 협약을 맺고 시스템을 재정립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정치권에서 한자리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뭉쳐서 올바른 시스템을 요구해야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어느 정치세력이 개혁을 하는게 아니라 개혁을 수행할것을 민주당에게도 새누리당에게도 모두 요구하여 법제화하도록 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일본 메이지유신과의 비교는 여기에서 멈춤니다. 우리는 막부시대를 사는게 아니니까요. 그 개혁, 그 국민협약이 무엇이 되어야 할것인가.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이 글은 답을 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질문을 하고 그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 것인가. 언제 일어날 것인가. 저도 모릅니다. 국민들의 뜻이니까요. 다만 근래들어 열풍이 불면 매우 강하게 분다는 것을 느낍니다. 올바른 뜻이 있으면 그 뜻에 동참할 시민들은 있다는 느낌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대의 핵을 짚어야 겠지요.  

 

그 국민협약이 이뤄야 할 내용을 지금은 저도 모릅니다만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거기에 포함되어 해결되어야 하지 않나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두가지 문제입니다. 바로 부동산과 교육비문제죠. 토지와 생산의 문제는 고래로 부터 항상 개혁의 핵심적 주제일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국민들이 모두 빚더미에 올라있습니다. 부동산때문에 생긴 빚이 크고 부동산이 비싸서 많이 내야 하는 주거비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교육비를 내느라 허리가 휘고 대학은 너도 나도 가는 시대인데 등록금은 비쌉니다. 결혼도 못합니다. 애도 낳지 못합니다. 외국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말을 합니다.

 

국민협약이란 부동산과 교육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공영화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장기적으로 임대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여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소한의 질의 주거는 보장되는 사회를 만든다면 그것이 한국인의 삶을 지탱해 줄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저렴하고 양질의 임대주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주거비를 끌어 내리겠죠. 

 

내용측면이 아니라 비용측면이라면 교육에서 그 핵심은 아무래도 대학교육일수 밖에 없습니다. 초중고교육은 대학에 따라서 많이 움직이니까요. 사교육비도 결국 대학입시를 위해 지불하는 돈입니다 저는 연구기능은 대학에서 연구소나 대학원으로 이전시키고 대학교육의 내용을 표준화한다면 반값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학비가 싼 나라, 학벌가지고 더이상 왈가왈부 안해도 되는 나라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 고등학교 평준화 하듯이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입니다. 경기고같은 과거 명문고 없어지고 평준화 고등학교가 전국에 있듯이 대학은 그저 대학교육과정을 수행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굳이 인서울 하겠다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서울로 오지 않아도 되고 지방대학이라 멸시당할 이유도 없을 것이며 지역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지역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대학간다고 무조건 서울로 모여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연구의 기능은 연구소와 대학원으로 빠지고 그 연구의 과실에 대해 책임있고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지금의 대학을 보면 국민들이 세금내서 연구하는 교수들 기자재 사주고 월급주는 셈으로 대학교육비가 일종의 세금이 되고 있습니다. 학비가 교육에 대한 댓가인 것이 아니라 한국의 학문발전을 위한 세금이 되는 것이죠. 그것도 대개 사학재단에게 그 돈이 갑니다. 그런 현실은 고쳐질수 있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거와 교육에 있어서 최저선에 대한 보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국민통합의 한 축이 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 틀속에서 우리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국도 다시 애도 낳고 결혼도 하는 그런 나라가 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같은 개혁은 거대한 정치력을 요구합니다. 그 정치력은 결코 지금의 정당들에게서 나오지 않으며 선거에 이기거나 지는 걸로 되지 않습니다. 여니 야니 따지지 않고 상식에 따라 지금 한국에서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믿는 다수의 시민들이 공감한다면 혹시 그런 기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다시한번 광화문을 가득 채우고 여니 야니 따지지 말고 일단 큰 틀에서 정해놓고 나서 싸우라고 호령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한국은 훨씬 더 튼튼한 기초를 가지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수 있을까' 글쎄요. 아마 우리 앞에는 이 길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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