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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과 현대사회

by 격암(강국진) 2013. 5. 14.

머릿말


윤창중 사건이 날로 커지고 있다. 그저 가벼운 성추행으로 알았던 사건이 이제는 강간미수에 청와대의 조직적 범죄자 도피사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durl.me/5z478d ). 이런 사건 이외에도 이번 방미단의 추태가 사람들을 눈살찌프리게 했다는 이야기며 윤창중이 평소에 기업회장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곤해서 심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제 까지 흘러 나오는 이야기에는 진실이 아닌것도 있을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성추행이나 모욕적인 언사들을 남발하던 집권여당의 문화를 생각했을 때 이런 이야기들은 진실로 들린다. 터질게 터졌다는 느낌이다. 이런 사실은 경향신문의 장도리 만화가 잘 요약하고 있다. (http://twitpic.com/cq6hlc) 이번 사건은 중국 미국 일본등 여러 외신에서도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t.co/XCRzXCAHmO). 


윤창중의 행위가 비도덕적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전날의 성추행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자는 호텔로 인턴을 불러서는 알몸인 상태로 그 인턴의 엉덩이를 잡았다고 한다. 이건 강간미수다. 그 어린 여자가 도망가지 않고 그걸 받아주었다면 이번에는 합의하의 성관계라고 했을 법하다. 이정도를 오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유죄인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인 윤창중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울 나는 여기서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그런 윤창중의 문화가 왜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평소의 생각을 다시 말해 보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윤창중이라는 나쁜 인간이 하나 있다는 사실보다 이러한 면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문화 


복잡하고 정밀하며 빠르게 변한다는 것, 이것이 현대사회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사회적 압력의 형태로 그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수 밖에 없다. 간단한 예는 마트에서 줄서기, 도로에서 매너를 지키는 행위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현대사회는 줄을 서야 일이 빨리 처리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으면 지탱이 되지 않는다. 수없는 사람들이 오는 마트에서 새치기가 일상화되고 자동차들이 정체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시 나만 새치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결국 일처리를 막고 길을 막아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것이다. 


그 개개인을 보면 그 사람들은 아 그까짓것 가지고 그래, 빈틈이 보이니 욕심이 나서 그랬어. 그런게 뭐 그리 큰 죄는 아니잖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함부로 던진 깡통하나가 대형사고를 부르고 사람을 죽일지 모른다. 함부로 빼돌린 자재 몇개가 건물을 무너지게 하고 사람을 죽일지 모른다. 소달구지가 굴러가고 작은 밭을 손으로 농사짓던 시대에는 그까짓 욕심들은 그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지만 현대에서 작은 욕심들은 마치 제트기 엔진에 모래를 뿌리거나 컴퓨터에 콜라를 흘리는 것처럼 큰 문제를 일으킨다. 과거의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까짓 문제를 일으킨게 아니라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윤창중을 거론하면서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미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 문제가 권력과 권리등의 경계를 긋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내가 대변인이라면, 내가 사장이라면, 내가 부모라면, 내가 선생이라면, 내가 학생이라면, 나는 어떤 것은 해도 되고 어떤 것은 하면 안되는가. 하면 안되는 것을 했을 때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중요성은 내가 종종 하는 민주주의의 이유라는 것에서도 들어난다.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현대 사회는 시민들이 투표하고 대표를 뽑으며 정해진 절차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사 어떤 한 인간이 매우 뛰어나고 어떤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세상 모든 인간들이 모르는 답을 알아도 절차를 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음번 일처리에 있어서도 절차는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절차가 작동되지 않으면 어떤가. 그냥 쿠데타해서 정권잡으면 어떤가. 현대사회는 그 사람이 설사 성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라도 독재를 할수 없다. 그러기에는 현대는 너무 복잡하며 그래서 책임과 권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정부분 권한을 내려보내는 자치를 하는 것도 부족하여 최고 권한을 가진 사람도 선거에 의해 뽑혀서 주권을 빌린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때 일이 잘못된 책임을 질 수가없기 때문이다. 광주학살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누구나 이해할수 있는 절차에 의해 그렇게 된거라면 사람들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납득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명령이 암흑속에서 독단적으로 내려질때 사람들은 그 책임을 한사람에게 묻는다. 그런데 목숨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는가. 책임을 질수 없기에 민주주의와 선거를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권한과 권력의 한계를 엄밀하게 정한다. 그렇지 못할때 그것은 원숭이가 조종하는 자동차처럼 흉기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특히 고위 공직자가 그렇다. 


성추행의 본질


성추행이나 강간의 문제의 핵심도 사실은 권력이며 섹스가 아니다. 좋은 방법이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윤창중이 단지 섹스의 대상을 원했다면 그런 부적절한 순간과 장소에서 그걸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라면 매춘여성을 찾아내는데 별문제가 없었을것이며 적어도 지금 이런 대단한 소동을 일으킬 위험까지 감수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추행이나 강간의 핵심은 권력이다. 즉 상대방을 모욕줌으로해서 스스로의 권력을 확인하는 행위다. 나는 잘났고 너는 내 앞에서는 물건이나 쓰레기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성추행이나 강간의 핵심이다. 그래서 성추행이나 강간은 육체적 문제보다 정신적 문제를 훨씬 깊게 남길 수 밖에 없다.


성추행이란 일종의 역할극이다. 이 시대에는 이미 없는 주인마님과 머슴을 상상하면서 너는 머슴이고 노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도덕적으로 분개할 만한 것이라는 것은 거듭말하지만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거기에 나아가서 이런 태도가 과연 도덕만 논할 문제인가를 분리해 강조하고 있는 것뿐이다.


오늘날은 물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원칙위에 서있다. 주인마님이 종년을 강간해도 좋았던 시대도 아니고 노예를 죽여도 좋은 시대가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인간의 도덕적 승리이기도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대사회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압력의 결과로도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흔히 생각하듯이 복지나 인권이나 그런 건 부자가 되면 마음이 좋아져서 행해지는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게 없으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망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윤창중과 경제


당연히 오늘날 윤창중같은 사람들의 문화는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3D업종이 인기가 없다. 3D업종이 인기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만은 그것도 정도가 있다. 어떤 업종에서 일하면 단순히 돈을 못버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천시되어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대우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돈을 떠나 그런 일은 안하려고 할것이다. 설사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직업의 안정성을 증가시켜도 안하려고 할 것이다. 이 문제만 해도 외국인노동자문제며 취업문제등 여러 사회 문제의 근본적 원인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문화가 후지니까 사회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윤창중같은 사람들의 문화는 결국 사회적 공포와 불신을 만들어 낸다. 바로 권력을 가져서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나는 공식적인 법이나 도덕이 어떻게 되건 심각한 모욕이나 공격에 처할수 있다는 공포다. 공포와 불신은 결국 차별을 만든다. 저 아파트에는 소위 사회지도층만 산다더라 하면 그 아파트의 가격은 전정부지로 올라갈지 모른다. 반면에 저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임대아파트라고 하면 벽을 세워서 그쪽집 아이들은 우리 단지로 오지 못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빚이라도 내서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집을 사고 옷을 입고 차를 탄다. 남들이 보낸다는 사교육을 시키고 겉으로 보이는 스펙을 쌓기에 여념이 없다. 왜 그러겠는가. 사람들이 간판만 보기 때문이다. 티코를 타건 BMW를 타건 내가 탄다라고 하는 자세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쥐꼬리같은 월급으로 그게 되는가. 결국 남은 것은 투기와 도박과 로또다. 미친 도박에 인생걸고 안되면 약먹고 죽어버리지 같은 악만 남은 인생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식회사니 민주주의니 하는 공식적인 사회 조직의 원리는 물론 평등이다. 그런데 현실 사회 문화가 이런 원리를 배반하면 문제는 사방에서 터질수 밖에 없고 사람들은 공식적인 약속에 보장하는 정도를 걷기 보다는 뒷길로 갈려고만 할 것이다. 그러니 니편 내편갈라서 저쪽 편이 하면 죽일놈인데 우리편이 하면 그럴수 도있는 일로 변하고 법치도 엉망이 된다.  그 가운데 부패는 창궐하고 대형사고가 터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후진국과 선진국의 가장 큰 차이는 그래서 문화다. 절차를 사람들이 지킬거라는 예측이 부정되면 그로 인해 생기는 혼돈은 그 사회를 가난하게 만들수 밖에 없다. 


맺는 말


이런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누가 윤창중을 우리의 얼굴이게 했는가. 물론 우리 시민들이다. 자신이 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을수 없는 울분을 토로하면서 적당히 초등학생도 아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그런 시민들이다. 남양유업문제같은 갑을 관계에 분노하지만 동시에 그런걸 당연시 하는 그런 시민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선로에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런 마을에 언제까지 열차가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윤창중은 단 한명의 이상한 사람일까? 국내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되는 국정원이 나라돈으로 사람뽑아서 댓글부대나 만드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하나 뿐일까. 수백억에서 수조에 이르는 돈을 들여서 헛짓하는 공사가 여기저기인 나라에 그런 사람이 정말 하나 뿐일까. 이 나라가 정말 공평한 법치가 이뤄지는 나라가 맞나? 지금의 집권여당쪽 사람들이 하는 것은 뭐든지 감추고 감싸고 그러는 나라가 아닌가? 


그들은 스스로를 산업화 세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 나라를 부자 만들어 준 사람들이며 부자 만들어 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적어도 권력이 눈먼 사람들, 이상한 논리에 눈먼 사람들이 아니라면, 무슨 로또 대박터지듯 이거 하나면 이 나라는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허황된 생각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런 말은 믿지 않을 것이다. 여당은 노무현 정권을 가르켜 아마추어정권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다. 지금 이게 공감이 가는가. 나라는 애초에 시민들 스스로가 구하는 것이다. 그래도 집권층의 문화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심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선수가잘해도 심판이 자기가 공을 차면 축구를 이길 수 있을리 없다. 우리나라는 정말 원숭이가 운전하는 고속버스가 아닌게 맞는가?  누가 이런 나라를 만드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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