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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상수와 변수

by 격암(강국진) 2013. 7. 1.

최근 최진기의 생존경제라는 강의 비디오를 구해서 몇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설명하거나 비판하거나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몇년 지나긴 했지만 그 강의들은 나름 알찬 정보를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어서 과연 한국의 최고인기강사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다만 강의를 보다보면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은 변수와 상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경제는 결국 그 내용이 대부분 현재와 과거의 분석을 통한 미래에 대한 대응방안이 주요 내용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황시대에 생존하는가 라던가 어떻게 하면 부자 될수 있는가 뭐 이런 식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논리는 변수와 상수에 대한 것이 됩니다. 변수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입니다. 상수는 우리가 아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상수인 부분이 이러저러하니까 변수는 이러저러하게 대처해야 한다라던가, 이러저러하게 우리가 해낼수 있었다라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추상적이 되어가므로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경제 희망은 있다라는강의에서 최진기는 한국 사람 참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국민 그게 한국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즉 한국인은 열심히 일했고 그걸로 성공했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대우의 몰락같은 예를 들면서 왜 이제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는가 하는 부분을 설명하지요. 


저는 이런 내용에 반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부분입니다.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걸 과거에서, 수치에서 확인할수 있다라는 부분. 말하자면 제가 말하는 상수란 이게 상수입니다. 말하자면 최진기는 자신의 이야기의 한토대를 여기위에 세웁니다. 이걸 넘어서 왜 한국인은 열심히 일할까라는 곳에는 나아가지 않고 따라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저 한국인의 특징이 됩니다.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는데 그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게 할수 있을까라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록으로 보나, 수치로 보나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에 왜를 던져보면 이 상수도 그렇게 상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는가. 제가 보기엔 그것은 우리의 윤리와 문화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쌓아온 윤리와 문화가 우리를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고 죽도록 일해서 아이들 교육을 시켰고 따라서 한국의 경제적 성공의 원인이라고 거듭해서 말해지는 양질의 노동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또 왜를 던져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와 문화는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겠지요. 물론 우리는 끝없이 왜를 묻기만 할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은 그저 주어진 것으로 즉 상수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떤 논의든 진전시킬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제까지 과연 우리의 윤리와 문화는 상수일까요? 그렇다고 할때 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라는 사실 혹은 상수가 정말 상수일까요? 우리가 별다른 노력을 안해도 우리를 성공하게 했던 그 특징은 그냥 지켜지는 것일까요? 한국인은 원래 열심히 일하는 민족이니까? 


최진기는 다른 강의에서 출산률 감소를 이야기하면서 이민자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로 어떤 부분을 상수로 삼은 것입니다. 즉 한국인은 아이를 적게 낳는다. 그러니까 그에 대응해서 외국인노동자가 필요하다라는 식입니다. 한국인은 아이를 적게 낳는다라는 부분에 대해 왜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진기도 남녀평등의 문제같은 것이 출산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을 하고 있기는 하며 그 설명은 나름 일리가 있지만 중대한 문제를 너무 많은 것을 상수를 삼으면서 논의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그 아이가 쉽게 자라서 나중에 쉽게 성공할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만 있으면 사방에서 취직시켜주는 분위기라면 교육을 잘 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육비도 안들겠지요. 다섯이든 열이든 나아서 밥만 먹여주면 쑥쑥자라고 그렇게 큰 아이들이 든든한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역시 아이가 많아야 세상을 든든하게 산다고 할것입니다. 요즘은 그게 아니죠. 비싼 교육비를 들여서 키워도 그렇게 키운 아이가 백수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의 큰 짐이 되기 쉬울 판입니다. 이런 판국에 자기도 힘든데 아이를 여럿 낳아서 그걸 어떻게 책임집니까? 남녀평등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건 사소한 이유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런 판국에 외국에서 저임금 노동자 한국에 들여오면 안그래도 나쁜 일자리 여건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더더욱 아이를 낳고 키우기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저출산률에 대한 대책이 아니라 확인사살이 되고 마는 거 아닙니까? 


더 나아가 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라는 걸 포함하는 한국인의 성공비결이 한국의 문화와 윤리에 있다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인 자기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한국은 망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외국인을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방이 필요합니다. 다만 개방을 위한 내적인 힘, 자기를 지킬 힘, 그걸 가진 만큼만 개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방이 필요해도 그것이상으로 하면 개방이 우리를 죽이고 말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심해도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우리가 행복해 집니까? 남의 지배속에서 이용만 당할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했을때 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라는 것을 상수로 생각하고, 사람이 없으면 외국인을 들여오면 된다는 생각으로 대응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진기는 매우 훌룡한 분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여기저기에 무지의 벽을 세우고, 상수를 만듭니다. 우리는 이거 아니냐, 한국은 이거 아니냐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경제를 논하고 사회를 논하며 그런 논의의 논리적 결과가 분명할 때 매우 큰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그런 논리가 틀리냐 맞냐 이전에 그 논리들의 시작점이었던 것들이 과연 상수냐 하는 것이죠. 진짜 큰 문제는 대개 논리의 중간이 아니라 시작점에서 발생합니다. 엄밀히 말해 이 세상에 진정한 상수란 없습니다. 어떤것은 좋은 근사이고 어떤 것은 엉터리 근사일뿐이죠. 그러나 근사는 근사입니다. 


저도 경제뉴스 읽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하는 것은 바로 이 상수세우기 입니다. 최진기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근거없이 상수를 세웁니다. 그리고 복잡한 계산에 빠져듭니다. 과학자도 아니면서 과학을 하는 것처럼 팩트가 중요하다 수치가 중요하다 하면서 숫자와 그래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싫어하는 것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결정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안다고 가정하지 않기에 모든 기본적 가정에 왜를 던져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민한 사람들이 하듯이 그거야 당연하지라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속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생존경제를 공부합니다. 그런데요. 제 생각에는 길이 넓고 클 수록 자잘한 계산은 중요하지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생존경제는 기본으로 돌아가고 뭐가 정도인지를 생각하고 그 길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정한 생존경제는 인간의 삶의 길을 고민하는 것이고 철학이요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식시장에서 단타치는 사람이 돈을 제일 잘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개미들이 듣는 조언은 단타치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경험좀 쌓으면 할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많은 투자자도 있습니다만 도박사는 결국 확률적으로 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최진기도 박경철도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부자 재태크는 작게 먹으려고 하는거라고. 빨리 돈벌려고 하다가 그걸 날려먹는게 가난뱅이 재태크라고. 


우리는 수영을 잘하려고 고민이지만 더 큰눈으로 보면 애초에 수영을 하는게 고민과 고통의 시작이요 위험의 시작일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생존경제란 자기 삶의 반성이 될수 밖에 없으며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여러 상수, 우리가 세운 무지의 벽을 두드리는 일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 바닥과 벽이 거짓일때 그 위에서 벌어지는 파티며 희극과 비극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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