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연구소의 동료와 잡담을 하고 있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야기를 하다가 사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장자에도 나오는 것이라고 하자 그 사람은 깜짝 놀란다. 자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20세기의 서구 이론은 정말 장자에 나오는 것일까.
나는 적어도 서구문명의 어떤 부분들은 지극히 폭이 좁다고 생각한다. 폭이 좁다는 것은 단점만 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인 사람이 비전문가보다 돈을 잘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벽돌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벽돌로 집을 지은 사람과 비교하면 폭이 넓고 큰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집을 이미 지은 사람은 수정하기 어렵지만 아직 얼기설기 벽돌을 쌓아놓기만 한 사람은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집 다지은 사람보다 무조건 벽돌만 가진 사람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구세력들은 적어도 지난 몇백년동안은 전문화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더 많은 물자를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만들고 더 많은 땅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 정상에서 이제 자기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고민하기 시작할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서구문명은 기본적으로 정복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비좁아지자 자본주의도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전문가도 전문과목만 파다보면 이제 다른 것에 대해서도 알아야 뭔가 더 할수 있다는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서구의 사고과정을 보면 크게 두가지의 부분이 느껴진다. 하나는 이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하는 과학이고 또 하나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다. 동양은 그와 다르다. 객관성의 강조는 마음을 강조하는 노장이나 불교의 분위기가 아니다. 유교 특히 주자학은 격물치지라 하여 객관성을 강조했다지만 그런 주자학조차 마음의 수양에 대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 서구적 의미의 과학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엄밀하게 정의하고 측정하고 누적하는 것이 없어서 음양오행설을 만드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동양에는 서구적 의미의 신이 없다. 부처는 서구적 의미의 신이 아니다. 적어도 동양에서 말하는 신은 모든 것을 혼자서 천지 창조했다는 전지전능의 신이 아니다. 서구는 모르는 것은 전부 신이라는 절대자에게 미루는 괴상한 문명을 이끌어 왔다. 사실 절대적 능력을 가진 존재란 절대적 무지와 같은 말이다. 절대적인 것을 비절대적인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것은 함께 뒹굴고 심지어 싸울수도 있는 도깨비나 신선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와 근원이 절대자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우리는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른다는 말을 말장난하고 있는 것일수 있다. 단지 그것은 심각한 결과를 동반하는 말장난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피부병중에 아토피병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아토피의 어원은 괴상하다라는 그리스어로 결국 그 병인을 모르는 피부병을 가르켜 아토피병이라고 불렀던데에서 그 병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병에 관련된 역사의 초기시절에는 누군가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 이병은 아토피병이군요라고 말하면 사실은 나는 이게 무슨 병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핵심은 아토피병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는가가 아니다. 핵심은 이렇게 조직적인 언어의 남용으로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말을 어렵고 순환적으로 해서 급기야는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자를 상정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적 단어의 남용의 한예다. 사실은 모르는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느끼는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속박되는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늘상 일어난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믿는다. 아주 강하게 믿는다. 자기가 믿는다는 느낌도 없이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뭘 모른다는 것을 잊게 만들고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 한 바보들의 집단이 있다. 빵을 어떻게 만드는 지 이들중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집단에서 다수결 투표를 해서 빵만드는 법을 결정하면 어떤 바보들은 집단의 결정이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망각한다. 문밖에서 대포소리가 들려도 옆의 사람이 그냥 앉아있으면 아 다른 사람들이 그냥 앉아있는거 보니까 별일 없나보다라고 하면서 그 포탄에 맞아죽을때까지 포탄소리의 의미를 무시한다. 그런데 실은 그 옆의 사람은 우리를 보면서 별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장자는 이런 반쯤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 크게 세상을 볼것이며 우리가 가진 생각이란게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부딪히면서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나는 이 방안에서 앉아있는 작은 고깃덩어리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흐름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어떤 존재다. 그렇게 해서 작은 세계에서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다. 잘 산다는 것은 세계를 잘 느끼고 그와 함께 되는 것이며 잘 살지 못하는 것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작은 존재로 남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하면 바가바드기타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바가바드기타는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세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론과 실천과 믿음의 길인데 이들중 가장 훌룡한 길은 실천의 길이지만 일단 진리에 도달하면 다 같은 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되새겨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게 무엇이던 뭔가를 하려고 하면 즉 실천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가진 생각, 관념이 무력해지고 일종의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우리는 종종 요령이 있다던가 없다던가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메뉴얼대로만 해서 오래 할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일들을 대충처리하면서 그 일들에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건 농사건 연구건 운동이건 아이를 키우는 일이건 좋은 남편이 되는 일이건 좋은 아내가 되는 일이건 뭐든지 진지하게 하면 우리는 그 노력의 끝에서 뭔가 우리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만나게 된다. 대충대충 얼머부리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의 붕괴의 실마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 충실하고 진지하다면 우리는 모두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서 장자가 말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농부가 되건 좋은 축구선수가 되건 좋은 부모가 되거나 좋은 선생님이 되거나 좋은 경영자가 되거나 좋은 경찰이 되거나 뭐든지 다 마찬가지다. 진지한 삶, 진지한 실천의 끝에서 우리는 '진리'로 나가는 문을 만난다. 진짜로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서로 서로 칭찬해주고 마비시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는 문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갈때 우리는 진리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다음번 패러다임이다. 더 넓은 패러다임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희노애락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고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패러다임이다.
이런 시점에서 보면 진리로 나가는 이론의 길이나 믿음의 길도 진리에 도달하면 같은 것이고 성공할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결국은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는 것이든,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느끼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는 것이며 다른 것들은 수단에 불과하다. 실천을 하기만 한다고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할수 있다고 믿음만 가지는 것으로 반드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마치 돌멩이를 만져서 느끼고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느끼듯 체험하고 느끼게 되는것이다. 일단 그것을 느끼게 되면 이론이나 실천이나 믿음은 그 의미를 잃는다.
서양은 20세기에 이르러 절대신, 절대세계에 대한 문제를 느끼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시점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이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고 변해가는가하는 인식론적인 고민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다. 즉 주체와 객체를 갈라서 소외시키고 그 결과 가치와 윤리와 상관없어진 과학을 다시 인간과 결합시킨 것이다.
반면 동양은 절대신에 빠진 적이 없으므로 수천년전부터 행해진 더 큰 세계에 눈뜨고 진리를 보라는 가르침이 보존되어 있다. 동양은 환경과 연결되어 변화하고 존재하는 나를 잊은 적이 없기에 토마스 쿤의 메세지는 어떤 의미에서 동양의 고전과 비슷한 소리를 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잘났냐식의 비교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뭘 할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제별 글모음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사람도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0) | 2013.09.17 |
---|---|
관심과 구속 (0) | 2013.09.17 |
세상을 보는 눈 : 정글만리를 보다가 (0) | 2013.08.31 |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된다. (0) | 2013.07.17 |
자명종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0) | 2013.07.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