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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새로운 인간

개인의 탄생

by 격암(강국진) 201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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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아이가 없으면 어른이 없다. 구분이 없으면 어떤 개념은 탄생하지 않고 개념이 없으면 그것은 적어도 분명히 인식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어떤 것은 그냥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분이 가능해 짐으로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말을 듣고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라는 말을 듣지만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은 개인이 서로 서로 구분되는 일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면 사생활이니 하는 말은 배부른 부자들이나 하는 소리요 극빈자들이 그런 것을 신경쓰고 사는 것은 사치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무슨 18세기니 15세기니 하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의 가난한 나라는 물론 불과 반세기정도전의 한국만해도 방하나에 다섯 식구가 남녀 구분없이 섞여서 살고는 했었다. 나는 지금 유로피언드림이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는데 그 책에서 일부 나오는 내용에 자극받아서 이 주제에 대해 약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관찰자로서의 개인의 자각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위치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가 개개인의 입장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자각이 없을 때 우리는 나의 눈으로 보는게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된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그린다는 것은 이집트의 그림같은 것이 그렇듯이 그림에 원근법같은 것을 등장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한다. 중요한 것은 너와 나의 미묘한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이 보는 것이며 신이 본대로를 표현하는 것만이 중요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림은 사실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사실이라는 것은 실상 진짜 세계위에 노이즈 같은 것을 덧씌운 것으로 생각되는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이라는 것과 이전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실이라는것이 거의 자리가 반대로 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혁명 이후의 우리는 사실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추상화를 거쳐서 어떤 신화나 역사나 과학이론같은 것이 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시대 이전의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그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그 사실위에 허상이 덧씌워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관찰의 세세한 세부사항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눈의 부정확함의 결과일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가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자연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과학혁명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그림이 등장하고, 원근법이 그림에 등장한다. 우리가 보는 것의 세부사항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이 계속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가 생각하는 실체나 사실에 대한 생각을 바꿔 간다. 이것이 화이트 헤드가 말한 과학문화의 결과다. (관심이 있으면 화이트 헤드의 과학과 현대사회를 참조하라)

 

개인의 탄생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을 구분하기 때문이고 구분을 한다는 것은 그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유재산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것이 아니라 니것 내 것을 구분한다. 서양인들이 미국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시절의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르면 이 세상에 주인 없는 것이 거의 없다. 바다도 주인이 있고, 심지어 달도 미국이 가서 먼저 깃발을 꽂았으니 미국 것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있는 판이다. 하늘도 주인이 있다. 비행기가 그곳을 지나갈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아직은 개인이 없다. 우리는 한국의 영해나 한국의 상공에 대한 한국의 권리라는 말은 하지만 개개인들로 나눠서 하늘까지 몽땅 내거로 등기를 해놨다같은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면 비행기가 하늘한번 날아가려면 무척 골치아플것이다.

 

즉 모든 것이 소유의 대상인 현대조차도 모든 것이 개인의 소유는 아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소유가 훨씬 더 집단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문중의 재산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있다. 가문이 있으면 가문의 재산이 있다. 그 재산은 명의상으로는 한 개인의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이 맘대로 처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땅이 있을 뿐 이 땅을 미국령으로 선포한다고 개인이 주장할 권리는 없다. 

 

사유재산권뿐만 아니라 투표권도 개인이라는 개념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과거에서 현대로 오면서 우리는 점점 더 세밀하게 개인의 역할,의무, 권리를 따지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너와 나를 구분하고, 나와 우리를 구분하여 개인으로서의 '나'를 강렬하게 자각하게 되는 일이다. 사실 부부가 각자의 통장에 각자 재산을 관리하고 부부인데도 서로 각자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식의 부부생활이 그다지 드문일이 아니게 된 것은 인류역사상 매우 최근의 일이다. 

 

너와 내가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이 생겼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거의 발달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네방과 내방, 너의 집과 나의 집이 있고 우리는 각자의 공간속에 분리되어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재산구분, 공간구분에 대한 예절과 관습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것이다. 세익스피어시대만 해도 주인과 손님과 하인이 구분되지 않고 큰 방안에 뒤엉켜 사는 일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세익스피어는 그래서 하인들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는 것이다. 

 

온돌이 발달되어 서구와는 다른 구조를 가진 집을 지을수 있었던 한반도에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더 쉽게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상상할수 있다 (한옥, 한국의 집을 둘러보고를 참조). 실제로 한국만큼 친족을 구분함에 있어서 세심하게 하는 나라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촌수를 따져서 친족을 정밀하게 분류하지만 서양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족보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한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몇백년전의 조상목록까지 다 책에 적혀있는 목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해줘도 믿지 않는 관습이다. 대개의 나라에서는 할아버지를 넘어가면 자기 조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록을 중시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유태인들에게 한국의 족보 이야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좀 정리를 하고 이 글을 끝내보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본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여도 노이즈로 생각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개개인을 분리하는 문화적 복잡성의 발달에 따라 점점 더 개인을 강렬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항상 바람직한 것이며 일방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분리는 이제 기괴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심장 이식수술은 물론 수혈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큰 거부를 느꼈던 것이다. 즉 장기나 혈액을 교체하는 것이 최초로 가능해 지자 그들은 자아, 개인의 개념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바뀌었다. 그런 문화속에서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신의 장기나 혈액 그리고 팔다리에서 자아를 느끼지 않는다. 개인의 분리는 이제 뇌의 분리가 되었고 뇌의 자세한 해부학이 알려지면서 전두엽을 잘라내고 두정엽을 수술하고 하는 일도 하게 되었다. 

 

분리는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내놓지 않는다. 분리는 사회적 융합을 방해한다. 니것 내것이 정교하게 분리 될수록 가족을 뭉치게 하는 가족윤리는 망가질 수 있다. 부모는 니것내것이 없는데 자식은 니것내것이 있는 경우 실질적으로는 자식은 부모를 약탈하게 된다. 받을 때는 우리것처럼 받고 줘야 할때는 내 것처럼 아끼니까.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분리해서 이제는 융합이 필요한 단계가 지났다. 그러나 모든 신화와 주관성을 회의론자의 칼로 다 잘라내어 버린 현대에서 우리들은 종종 매우 외롭고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를 전부 잘라내어 버렸다. 분리란 그래서 한편으로는 편리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것이다. 깨끗히 분리되고 나면 우리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위에 쌓아올려진 과학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몸과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없게 한다. 모든 것이 몸 아니면 마음이라면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중간이 없다면 몸과 마음은 대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인가. 

 

너와 나는 깨끗이 구분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인식위에서 아무리 머리를 써도 무서운 분리만을 느낄 뿐이다. 가족도 지역사회도 국가도 따지고 보면 어떤 위선위에 서있다. 우리는 쉽게 인간의 평등을 말하지만 국경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대우를 하자고 주장하는 선진국 국민은 거의 없다. 그것은 인간평등이라는 개념과 모순이고 따라서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이건 마음 저 아래에서 우리는 위선을 느낀다. 위선은 자라나서 결국은 어떤 곳에서 또다시 양심의 소리를 속이는 핑게가 된다. 한번 위선한자가 여기서는 왜 못한다는 말인가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장이나 불교식으로 있음과 없음에 대해 논하는 것이라던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대한 고민은 근본적인 것이고 현대병에 대한 치료약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존중, 환경의 의미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많은 것을 다시 보게 만들 것이다. 공유의 경제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 주거란 애초에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들것이다. 교육이란 어때야 하는가,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란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뇌는 다시 몸과 붙어서 몸을 쉽게 자르고 붙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개인은 다시 융합되어 가족이 되고 사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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