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12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으며 우리는 과도기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특이점 변화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렇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에는 더 빠른 통신과 더 강력한 인공지능 기술 그리고 더 환경친화적인 기술따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들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변화의 내적 측면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기술이 가져올 정신적 변화, 즉 우리가 세계를 보는 눈에 있어서의 변화를 무시하면 그것은 마치 문자 사용 이전의 원시인들이 문자가 세계를 바꾸는 것을 상상하는 것처럼 된다. 그러니까 문자가 세계를 바꿀거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문자라는 것이 마법을 가져서 고기도 만들고 집도 저절로 짓는 편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본인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사냥하고 채집하는 원시인의 정신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는데 말이다.
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개인에서 관계로의 변화, 하나의 세계에서 멀티버스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중심의 사회란 이 세상의 중심을 개인으로 보고 그 개인의 합이 사회라는 관점을 말한다. 다분히 서구적인 이 관점은 우리가 익숙한 계몽주의의 아래에 존재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즉 개개인의 생각이 바뀌면 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복지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이 잘 사는 사회다. 개인 중심의 사고에서 복지사회를 말하는 방식은 자연히 한 개인의 자산, 한 개인이 받는 의료서비스, 한 개인의 수명, 한 개인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말하게 되어 있다.
많은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개인에 주목하는 이런 관점은 스스로 자기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개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해질 수록 우리는 개인의 삶을 더 자세히 살피게 되고 그것이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자세히 규정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개인과 개인을 더욱 더 잘 분리하게 된다. 즉 개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화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개인적 소유권의 강조가 더 커지게 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적어도 서구 사회가 이끌어온 현대 사회에서 이런 방식들은 이제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 되어서 우리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며 당연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대가족이 분열되어 핵가족으로 변하거나 1인 가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모든 기준이 개인이 되는 관점이 지배할 때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해도 그 그늘도 깊다. 개인주의는 결국 관계에 눈멀게 하는데 인간의 힘이란 결국 협력과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시스템의 노예가 된 인간은 해방되어져야 하겠지만 고립되어 혼자가 된 인간은 무력하고 자기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개인주의가 양산하고 있는 것은 마치 부모없이 혼자서 살아가는 철부지 어린애같은 인간들이다. 그들은 혼자서 살아갈 힘도 없으면서 개인만을 강조하고 이기적으로 굴고 스스로 사회와 자신을 잇는 선을 끊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은 무력해지고 무지해지고 우울해진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페미니즘이나 노동자운동같은 정체성 정치에 몰두하는데 이것도 결국 개인주의적 관점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계보다는 나의 정체성에 매몰된 그들은 적어도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관계중심의 관점은 우리가 익숙한 개인주의 관점과 다르다. 이것은 그 사회가 가지는 시스템, 법칙, 상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게임의 법칙을 살피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관점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 순간 아 이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구나, 옛날의 가족 공동체나 지역공동체같은 것을 보존하자는 말이구나, 가족 질서라는 것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데라는 식의 생각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관계중심의 관점은 결코 보수나 진보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매우 진보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 관점이 붕괴시킨 옛 가족 질서의 의미를 다시 보게 만들지만 반드시 그 부활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계중심의 관점이란 세상을 게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당신이 좋은 선수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야구를 하고 있는가, 축구를 하고 있는가? 혹은 농구를 하고 있는가? 게임에 열심히 참여하기 전에 우리는 그 게임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총합이 사회라는 관점은 마치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올바른 게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은 망각하게 만든다. 나는 여자다라던가 나는 노동자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어떤 게임을 전제하고 그 게임속의 어떤 역할이 나라고 선언해 버림으로써 지금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선언하고 어떤 의미에서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한 어떤 미래에도 당신은 여전히 여자이며 노동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대개 진보적인 생각으로 여겨지며 과거의 봉건적 보수적 사회 관계를 허무는 혁신을 해왔기에 사회규칙의 개선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오늘날의 사회에는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 자체가 진보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반면에 집단을 이야기하면 대개 사람들은 전체주의 아니면 봉건사회를 떠올린다. 하지만 개인주의자들은 게임의 규칙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그저 평등이나 자유같은 추상적인 가치만을 늘어놓는다.
다시 게임의 관점으로 돌아와 보자. 당신이 만약 온라인 게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게임의 개요를 발표하는 날이 왔는데 당신이 그저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들은 뭘 하든 자유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런 말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게임의 예들을 생각해 보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비트코인을 보자. 코인 경제는 하나의 게임이다. 규칙을 가진 시스템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 게임이 가진 잠재력을 믿으면 참여하는 것이다. 공유경제라는 사업을 생각해 보자. 그것도 하나의 게임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공유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게임이나 비지니스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이미 개인주의가 말하는 세상이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의 구조나 비지니스 모델이 진짜 알맹이인데 말이다.
관계중심의 관점은 우리가 게임을 설계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중심의 관점이 자연히 개인의 개선 즉 계몽의 이상을 말하듯이 관계중심의 관점은 우리가 유토피아적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이상을 말하게 되고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그 게임을 설계하고 그 게임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중심적 과제라는 것이다. 관계중심의 관점은 말한다. 프로야그 리그없이 좋은 프로야구선수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개인주의적 관점이란 실로 초보적이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왜 관계중심의 관점이 미래로의 변화이며 이제까지는 관계중심의 관점이 보편화되지 않았을까? 여기서 기술의 중요성이 나온다. 하나의 사회 시스템을 하나의 게임으로 볼 때 과거에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느리고 어려웠다. 새로운 게임의 시작과 적응이란 이런 문맥에서는 혁명과 전쟁의 역사이며 건국과 망국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이런 과거에는 변화가 설혹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게임 A에서 게임 B로의 변화였으며 그것은 그냥 더 좋은 사회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사회로 가는 개혁이라고 불렸다. 하나의 변화는 한 개인의 수명보다 훨씬 긴 시간 간격을 가지고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대개 그저 태어난 대로의 세상에서 살았다.
본격적인 관계중심의 사회는 어떤 의미로 개혁이 없다. 그것은 개인들이 혹은 플레이어들이 수십가지의 게임에 한꺼번에 참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직업도 여러개고 여러개의 취미 동아리에 한꺼번에 참여하며 지역 공동체, 친족 공동체등 여러 공동체에도 한꺼번에 참여하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게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전처럼 게임들은 완전히 배타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게임을 꼭 폐지할 필요가 없다. 다수의 게임을 동시에 하면서 그 중에서 마음에 더 드는 것을 점차 더 많이 하면 된다. 비트코인을 산다고 해서 꼭 전 재산을 거기에 투자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유경제나 비트코인 같은 예를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새로운 시대는 고도의 정보기술들로 인해 가능해 졌다. 과거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관계중심의 사회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고 지금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더 빠른 통신과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들이 하나의 세계를 한 순간에 쉽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비트코인을 생각해 보라.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같은 판단은 일단 뒤로 접어라. 이미 한 국가 경제 수준의 규모로 자라난 비트코인 시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컴퓨터와 빠른 통신없이 그것이 가능했을까? 지금도 종이 어음 돌리는 그런 시대라면 비트코인 같은 새로운 시장이 이렇게 순식간에 자라날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비트코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이 만날 때 그것은 결코 단순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축구선수들이 모여 축구게임을 할 때 그것은 축구선수의 단순합이 아니고 게임의 규칙이 만들어 내는 플러스가 있다. 그리고 이 플러스가 때로 지구를 뒤집을 정도로 클 수 있다. 과거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오늘날은 혁명이 일상화된 시대다.
얼마전에 미국에서 게임스톱 문제라는 것이 터졌다. 게임 스톱이라는 회사에 대해 투자회사가 공매도를 하자 네티즌들이 모여서 그 투자회사를 항복시킨 것이다. 이런 것도 우리는 게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증권시장이라는 큰 게임안에서 작동하던 게임의 법칙이 있었는데 네티즌들이 모여들어서 이 게임을 전복시킨다. 기성 게임이 공평하지 않다고 하면서 말이다. 진정한 불로소득자들을 잡아내는 혁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도 물론 온라인상의 커뮤니티가 발달했기 때문이고 돈의 흐름이 보다 원활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요즘 자동차에 관련해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보배드림이라는 게시판에 호소를 할 때가 많은 모양이다. 그러면 사안이 선택되어 네티즌들이 몰려가서 응징을 하는 일을 한다. 이것도 하나의 게임이다. 억울한 사안이 수집되면 참여자들이 정보를 모으고 방법을 찾아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전에는 없었던 방식이다.
아마 이쯤 들으면 독자들은 수없이 많은 성공사례며, 집단적 움직임들에 대한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작은 혁명들이며 새로운 기술로 인해서 가능해진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것이다. 관계중심의 관점은 그런 사건들이 살다가 생기는 기이한 사건이나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들이야 말로 세상의 중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낡은 개인중심의 관점에 빠져서 그런 걸 계속 무시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핵심을 놓치게 될 것이다. 관계중심의 관점은 규칙과 시스템은 새롭게 만들 수 있으며 그런 새로운 시스템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화성이 아니라 그곳이 신 개척지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는 신기한 기술들이 나오고 있다. 메타버스같은 기술들이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기한 기술도 결국은 이 관계중심의 변화에서 그저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며 그 기술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걸 써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거나 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세상을 바꾼다. 나는 비트코인 투자를 하라고 결코 권하지 않는다. 나는 옛날 가족중심의 질서로 돌아가라고 결코 권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 게임이 최종적이며 절대적으로 좋다는 생각자체는 관계중심의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봉건적 가족질서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면 새로운 규칙을 가진 삶을 설계하자는 생각이 관계중심의 관점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물론 우리는 하나 하나의 개인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보다 바람직한 게임을 설계하고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수렵채집을 하면서 초원의 침팬지처럼 살 던 원시인이 현대인들이 돈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위해 일하고 그 돈이라는 것을 쓰면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이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그들은 결코 수렵채집의 세계를 벗어나 문명인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 관점의 삶을 살아온 우리의 지금 입장이 그렇다. 오늘날 세계에는 온갖 추상적 게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섣불리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고 위험한 게임에 뛰어들어서도 안되지만 그 게임들이 단지 추상적이고 낯설다는 이유로 이건 말도 안되고 전부 사기라고 등을 돌리다가는 우리는 금새 현대 사회속의 원시인이 되고 만다.
다행히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변화에 익숙한 나라다. 불과 70년 전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는데 지금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가 될 정도로 한국은 변해왔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전세계 최초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지만 그것을 가장 먼저 잘 쓴 나라는 한국이었다. 우리는 변화할 의지가 있고 변화의 고통을 감내할 각오가 있는 반면 많은 외국은 한국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같다. 이 차이는 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세계적 변화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변화의 의미에대해 잘 숙고하고 그것을 잘 따라간다면 우리는 역사상 어떤 사회도 이룩하지 못한 대단한 변화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게임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빛나게 하고 부유하게 할 것이다. 단합하고 모이면 우리는 그걸 해낼 수 있다. 지금의 세계는 그런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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