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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새로운 인간

개인의 붕괴

by 격암(강국진) 2014. 2. 24.

2014.2.24

개인의 붕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부정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것은 너무나 자동화되가고 기계화되어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기를 잃고 감정을 잃어가는 현대인을 말하는 것같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붕괴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특히 무선통신과 컴퓨터가 발달한 시대에 다가올 공유경제속에서 좋건 나쁘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개인의 붕괴가 필요한 이유

 

요즘 자주하는 말이지만 어떤 것은 그저 단어만 존재한다고 존재하는게 아니다. 즉 아버지로서의 역할, 자각이 없는데 물리적으로 아버지일 뿐이라면 그 사람이 나는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어떤 재떨이가 재를 터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만 쓰이고 있다면 그 물건을 위험한 살인흉기가 아니라 재를 터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항상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한명의 개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보고 듣고 행동할 때만 그 말은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독점적 소유란 개인의 탄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나만이 독점할 수 있는 공간, 물건, 권리를 가지게 되면서 개인으로 자각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그런 의미에서 개인이란 인류문명사에서 최근에 탄생한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니방 내방도 없고 니것 내것도 없이 그저 뒤엉켜 산다면 거기서 개인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말하자면 어떤 게임의 참가자의 이름이다. 축구게임의 참가자는 축수선수고 자동차 경주의 참가자는 자동차를 탄 자동차 선수다. 마찬가지로 현대사회가 만들어 지면서 인간사회는 그 경제적 사회적 게임의 참가자를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의 근간을 이룬다. 즉 사회 혹은 세상은 개인의 합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그 사회안에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여 너희들은 개인이라고 불리는 존재라고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개인이란 우리가 익숙한 대로 법적인 권리와 책임의 주체다.  '나'라는 것은 이 물리적 육체를 말하며 투표권을 가지고 하늘을 독점할 수는 없지만 농지는 독점할 수 있는 존재다. 고용은 되지만 노예는 안된다. 

 

언제나 논의를 시작하는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축구만 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 세상에서 사람들은 축구라는 게임을 삶 그 자체로 알며 따라서 그 세상에서는 사람은 곧 축구선수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사람은 곧 축구선수라는 것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세상의 일들을 아무리 열심히 논의해 봐도 우리는 결국 축구를 하게 된다. 왜냐면 축구선수를 위한 최고의 게임은 축구이지 농구나 자동차경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위한 최고의 시스템 혹은 세상의 정의는 결국 축구라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먼저 개인이라는 개념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기본적 개념은 추상적이라 어느 정도 유령같지만 또한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다. 나는 전에 여러 사람이 한 집의 공용공간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결국 사람들이 싸움이 날 것이고 그러면 살기가 매우 불편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틀리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선진국에서는 이미 상당히 흔한 주거형태인 쉐어하우스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단언하는 것에 대해서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확신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사람은 이렇다라는 것에 대해 당연시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은 본래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당연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것은 사실 그렇게까지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특히 나이든 세대의 문화속에서는 불가능했던 어떤 것이 젊은 세대의 문화속에서는 무리없이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한데 그런 것에 대해 그들은 전혀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린 종종 우리가 선입견없는 태도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것은 절대로 자명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특정한 문맥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이라는 관념도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다. 약간의 관념변화가 전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변화의 이유

 

이렇게 우리가 익숙한 사회게임의 참가자로서 개인을 생각할 때 그 개인이 붕괴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환경이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빠르고 많이 소통하는 사회가 되어 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빠른 무선인터넷과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그것이 성숙해져 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가 가진 통상의 개인개념은 애초에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은 자유입자의 그림과 비슷하다. 즉 거기에는 원천적인 가치로서의 커뮤니티나 공동체가 제거되어 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주의란 모두가 자유로운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최고의 답이 나온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번영을 가져온다고 믿어진다.  커뮤니티 자체는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개념은 날이 갈수록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간다. 이는 커뮤니티 혹은 공동체의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과거라고 해서 공동체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귀족으로 태어나거나 부자나라의 시민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예전에도 물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소통의 폭과 속력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킨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 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러므로 커뮤니티나 공동체는 타고나서 바뀔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일단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의 시장적 교환적 가치는 별로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스템, 커뮤니티, 규칙을 대개는 주어진 운명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어딘가에 태어난다. 게임은 역사나 신에 의해 주어져 있고 우리는 다만 그 게임을 할 뿐인 것이다. 

 

개혁은 너무 느리거나 아예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축구를 하고 싶어도 주변에 아무도 축구라는 게임을 이해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축구를 좋아해도 대부분이 야구를 하는 상황에서 축구를 하기는 불가능했다. 굳이 굳이 축구를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야구를 못하게 하고 전부 축구를 하자고 해야 했다. 혁명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시장적 규칙의 파탄을 의미한다. 게임중지고 시장주의의 파탄이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 그것을 혁명의 연속으로 보게 되기는 하지만 실은 혁명이란 아주 예외적인 변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간들이나 관련된 일이지 평범한 인간들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시스템은 주어져 있고 그 안의 개인이 자유롭게 움직여서 최적화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 시각이었다. 

 

그런데 통신과 정보처리기술이 발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지구 반대편 사람까지 쉽게 연결한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자 가장 뚜렷하게 생겨난 변화는 여러가지 게시판이 열리고 인터넷카페가 개설되고 커뮤니티가 번성하는 것이었다. 즉 축구를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서로 쉽게 연결될수 있으며 일단 축구를 하는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 그것이 커져서 축구를 하는 것을 대세로 만들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원한다면 모여서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과는 다른 게임을 할수 있다. 그 게임만 하는게 아니라 한 사람이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듯이 복수의 게임을 동시에 참여할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게임에 참여한다고 기존의 시장게임을 탈퇴해야할 필요는 없다. 이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게임을 새로이 설계하고 다같이 시도해 볼수 있다. 가끔씩 존재하는 혁명이후 주어진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게임을 창조하고 게임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인터넷도 안하고 스마트폰도 계속 안 쓰는 너무도 시대에 뒤진 인간이 되버리게 될 것이다. 남들이 공짜로 전화할 때 자신은 요금폭탄을 맞게 될지 모른다. 남들이 싸고 안전한 식품을 먹을 때 자신은 매우 위험한 식품을 비싸게 먹게 될지 모른다. 

 

이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며 이때문에 관계의 의미를 상실한 개인의 관념에 기초한 인간 사회는 큰 변화를 겪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최근에 페이스북이 한국의 카카오톡과 비슷한 왓츠앱이란 메신저 앱회사를 20조라는 돈을 주고 구입했다. 20조의 의미는 단순히 프로그램의 가치가 아니다. 요즘은 페이스북이건 카카오톡이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방법을 써서건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안에 생태계내지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 자체다. 한국에서는 카카오톡이 인기지만 일본에서는 네이버가 만든 라인이 인기다. 한국에서 사이가 인기였지만 세계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뜨자 한순간에 밀리고 말았다. 차이는 프로그래밍 실력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문화건 시장진입의 타이밍이건 결과적으로 큰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면 그것이 엄청난 시장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같은 것이 앞으로 더더욱 커질 것이라는 점은 바로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 커뮤니티가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힘에 버금갈 인터넷 커뮤니티가 만들어 지는 것을 상상하는게 가능하다. 그 말은 그들이 일단 안정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국가의 재정에 버금가는 돈을 허공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설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글이나 애플이 만들어 내는 생태계를 생각해 보라. 물론 거대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낸 그들은 부유해 질 것이다. 문제는 공동체를 만들어 낼, 새로운 게임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신용이 문제일 뿐이다. 

 

개인과 플레이어

 

세상은 차츰 변해온 것이지만 양분해서 설명해보자. 전의 세상은 그저 세상에 있는 대로의 사회게임을 모두가 열심히 하는 것이며 아주 가끔씩 혁명적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 혹은 다가올 세상은 인간들의 연결이 빠르고 넓어서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게임이라도 그 소수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먼저 공동체를 만들고 그 게임을 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게임을 어떻게 구성하건 중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말하던 자유란 실은 대개 사기다. 즉 시장의 규칙같은 것을 당연시한 상태에서의 자유, 부자유를 받아들인 상태에서의 자유랄까. 게임을 만드는 것이 쉬워진 상태에서는 중요한 것은 어떤 최소한의 부자유 혹은 게임의 법칙이 그 게임의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부자유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같지만 규칙을 만들 자유가 있으므로 전보다 더 큰 자유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임의 참가자인 플레이어는 내가 잘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 게임을 하는 커뮤니티의 성장이 곧 나의 번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축구선수라도 자기 혼자서 축구게임을 할 수는 없다. 다른 선수들이 다 같이 축구를 해야 축구게임이기 때문이다. 즉 나혼자만의 정의나 나혼자만의 진리따위는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게임의 규칙에 따라서 움직일때만 전체 게임 커뮤니티는 유지되고 성장할 것이다. 

 

새로운 게임이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다 알수 없다. 하지만 그 예중의 하나가 바로 요즘 말해지는 공유경제인 것이다. 우리는 공유함으로서 더 자유로워지고 부유해 질 수 있다. 소유의 폭을 작게 할 수 있다. 나는 한때 작은 집으로 된 마을을 상상한 적이 있다. 집자체는 작게 짓고 공유공간을 늘려서 살아가는 마을이다. 쉐어하우스의 마을판이랄까. 이런 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다면 그런 마을이 생겨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내가 상상한 것은 작은 단독주택이지만 빌딩의 형태로는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것같다. 

 

어떤 게임에 어떻게 참여하고 어떤 게임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꿀 것이다. 즉 자유가 번영을 가져 오는게 아니라 게임의 이해력, 게임의 규칙에 대한 자발적 동의, 신사적 게임 참여가 인간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이런 변화에 무관심할 때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뒤질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은 플레이어로 변한다. 변해야 한다. 

 

맺는 말

 

우리가 모두 페이스북을 만든 주커버그나 애플의 잡스처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커버그나 잡스처럼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사실 작은 가족 공동체 수준의 공동체만 있어도 훨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전에 가족은 그저 태어나는 것이었지만 이제 가족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미래에 훨씬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미 물리적 거리는 극복되었다. 이사가면 잊혀지는 게 이웃이 아니다. 그들이 당신의 카카오톡 친구로 남아있고 페이스북친구로 남아있는한 원한다면 당신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당신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면서도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집단 채팅같은 것을 통해 매일 매일 여러 사람들과 잡담을 하고 살 수 있다. 그런 소통이 공동체의 씨앗이 될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모여서 어떤 게임의 규칙에 따르는 가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예술적 게임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수 있는가가 문제다. 그것은 페이스북도 카카오톡 채팅도 훨씬 능가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아직도 게임을 바꿔본다는 것은 쉽지 않고, 상상력만 있으면 바로 인터넷에서 사람이 모여서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은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언제까지나 진실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추세는 그쪽으로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주어진 대로 사는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살까를 고민하고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미래로 가고 있다. 

 

우리는 복수의 게임을 하면서 각각의 플레이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 게임도 좀 해봤다가 저게임도 좀 해봤다가 할 것이다. 주식거래인으로서 시장에 참여하지만 한편으로는 귀농하여 공동소유가 강조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찐빵같은 마을 특산품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한쪽게임의 세계에서는 엄격한 독재체재를 지지하면서 다른 게임에서는 지극히 평등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육체로서의 개인이 이러저러한 사회적 의무와 권리를 가지며 살아가는 지금과는 좀 다른 세상이다. 개인이 복수의 플레이어에 의해 대체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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