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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다큐3일 서울촌 산새마을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3. 11. 22.
서울 은평구 신사동 237번지에는 산새마을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아파트로만 꽉꽉 들어찬 서울답지 않게 다닥다닥붙은 단독주택으로 이뤄진 이 마을을 다큐3일 제작진이 취재하여 소개를 했다. 산새마을은 박원순시장이 서울시장선거출마선언이후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다. 박원순시장은 여러가지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마을만들기가 해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산새마을은 본래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재개발은 취소되고 마을만들기운동을 벌인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지에서 살고 있는 분들의 재정을 생각하면 재개발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좋아보인다. 애초에 막노동을 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 소위 달동네인 이 지역에 깨끗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면 서울중심부에서 멀지도 않은 그 집의 가격이 그분들이 살아갈 수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마을은 파괴되고 그분들은 뿔뿔히 흩어져 보상금을 가지고 살길을 찾아야 할텐데 그길이 지금의 모습보다 좋아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큐에서 나온 노인들은 나는 죽어서야 여기를 나갈것이라고 강조하시고 계셨다. 그만큼 이웃들이 그들에게 큰 의지와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어디가서 무슨 돈으로 그분들이 그것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마을만들기는 으례 그러하듯이 마을 미화작업과 함께 행해졌다. 대안학교 학생들이 벽화를 틈틈히 그려넣어 마을이 예쁜 벽화마을로 변했고 이제는 마을 텃밭으로 쓰고 있는 옛날 개 사육장터는 원래는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던 흉물스러운 곳이라고 했다. 


산새마을에는 초라한 건물이지만 마을회관도 있다. 거기에 모여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손으로 뜨는 수세미를 만든다. 그걸 팔아서 나오는 돈이 마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이다. 여러 할머니들이며 아주머니들이 돈받으면 내가 이걸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마을을 위해 자원봉사한다니까 한다면서 열심히 수세미를 만들고 계셨다. 


아직 이렇다할 수익사업이 있는 것같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웃간의 상부상조정신을 발휘해서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김장을 해도 너나 할것 없이 도와주고 가난한 이웃이 고물을 팔아 살수 있도록 장소를 양보해 주고 고물도 내놓아준다. 이동네에 와서 차로 생선을 팔던 생선장사는 이 마을이 좋아 아예 이사를 왔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에게 그는 매우 헐값에 생선을 넘긴다. 페인트가 남는다고 옆집 벽도 칠해주는 사람들에게 내것 네것은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동네 슈퍼 한구석에서 일을 나가지 못한 동네남자들이 술자리를 벌리는데 싼 술값에 반찬을 내주는 동네 아주머니의 인정은 이 동네가 자본주의적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도와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은 서울 여기저기의 옛날 골목들이 수리되고 리모델링 되어 멋진 카페거리나 관광장소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도 서울사람이었지만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곳들이 인터넷에서 이따금씩 불쑥불쑥 사진 몇장들과 함께 소개되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 변할 수 없게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는 이제 시대에 매우 뒤진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부암동 같은 곳이 그렇다 (사진은 이쪽을 보라)


산새마을은 아직 그런 곳이 되지 못했고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름을 알려서 인지 인터넷에 보면 마을 공동체 만들기의 모범예로 사람들이 관광하듯 많이 찾고 있는 듯하다. 그들도 식당을 만든다던가 텃밭을 이용한 어떤 사업을 한다던가 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미래다. 그들이 그런 수익사업에 실패한다고 해도 재개발같은 것과는 달리 큰 부담은 없다. 그냥 이대로 살면 그만이다. 투자되는 것은 대개 관심과 노력이지 한방에 크게 부자되려고 전재산을 밀어넣는 것같은 개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금씩 자라는 나무처럼 커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해 의문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게 강렬하게 다가온 질문은 부와 가난 그리고 허세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자가 된 경우가 너무 많은 것같다. 그래서 각자 자기것을 지키겠다고, 각자 나만 좋겠다고, 편하겠다고 벽을쌓고 공동체를 허물고, 이웃인심을 저버리며 무엇보다 자기 고향을 떠난다. 산새마을의 주민들처럼 30년씩 이웃으로 사는 경우는 점점 드물어 지고 있다. 


부자가 되어 니것 내것을 가리겠다고 선을 긋기 시작해도 당장 통잔 잔고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부자가 되었으니 전국의 산천을 구경하고 나아가 해외여행도 즐길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량화되는 것, 겉으로 잘 보여지는 것 즉 통장에 얼마있는가, 해외여행은 몇번이나 해보았나 같은 것을 통해 우리가 잘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재다보면 잘 보이지 않는 것에서는 가난해 진다. 


집을 드나들면서 이웃과 웃으며 인사할수 있는 것의 가치는 얼마일까. 나나 나의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신경써줄 한무리의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살수 있다는 것의 가치는 얼마일까. 우리 아이가 집 바로앞에서 어떤 이상한 짓을 해도 내일 아니라면서 간섭하지 않을 이웃들과 사는 것과 우리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서로 인사하고 가족처럼 지내는 것의 차이는 과연 없을까. 고민스러울때 같이 술한잔하고 파전한장 같이 나눌수 있는 이웃의 가치는 과연 없을까. 무엇보다 세상일에 어두운 주제에 사람들과 떨어져서 외로워지는 것을 피하는 것의 가치는 없을까. 


있다. 그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실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좋은 이웃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천국에 있어도 외로우면 별로고 나쁜 이웃이 있으면 지옥이다.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돈을 잘벌어도 첫번째로 잘버는 집 옆에 살면 당신은 왜 저남자처럼 돈을 못버냐는 핀잔을 듣게 되어 있다. 사막에 살아도 재미있는 이웃하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해 지는것이 삶이다. 그런의미에서 부자가 되어 공동체를 포기한 우리는 실질적으로는 가난해 졌다. 웃을 일도 줄어들고 가족구성원들이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면 그걸 돈으로 메꾸느라고 결국 그돈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잘난 '부자'가 되었다. 사람이 그 돈을 감당할 만큼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검소하고 절제하면서 좋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며 살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가 못하다. 부자가 되면서 그런 것을 내팽겨쳤다. 그래서 누군가가 공동체에 대해 말하면 아예 인간은 본래 사악하여 그렇게 살수 있을리가 없다고 단언하는 경우도 많을 정도다. 


새로 지어지는 주택단지를 보면 타운하우스도 커뮤니티 기능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전원주택으로 지어진 곳이란 그저 뚝뚝떨어져서 큼지막하게 각자 성을 만들어 사는 곳이다. 홀로 세워진 전원주택은 말할것도 없고 마을을 이뤄서 집을 지은 경우라도 그렇게 짓는 것이 새로운 주거문화의 대안이 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수도권지역에서 땅한평이 얼마인가. 평당 5백씩하는 땅 그 이상으로 하는 땅이 흔하다. 그러니까 백평짜리에 집을 짓는다면 땅값만 5억이상이 된다. 투기적 목적으로 살지 않는다고 할때 한국사람중에 7억 10억씩 하는 집에 살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 그들이 과연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살려고 할것인가. 


있어도 없는 척하고, 나만 좋자면 그럴수도 있지만 모두를 위해 좀 불편한 것도 참아줘야 이웃공동체라는게 유지될텐데 있어서 있는 척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없어도 있는 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한국의 문화가 공동체를 어렵게 한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내다 파는 할머니를 다큐는 보여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곳이 외국의 어디라고 상상한다면 그렇게 할수 있는 한국인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위스나 프랑스나 미국의 어딘가에서 살면서 자기 밭에서 키운 채소를 조금씩 내다팔면서 느긋하고 느리게 사는 한국사람은 기꺼이 그런 삶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을 바꿔서 한국에서 그런다고 하면 서글프다, 어쩌다 내신세가 이렇게 되었나라고 말할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똑같은 삶을 살아도 외국에서 그렇게 살거나 외국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는 왠지 있는 척을 해야 할것같다. 빚을 내서 비싼 옷사고 비싼 차를 산경우라도 그렇게 있는 척하면서 살아야 사는 것같은 느낌이 들것 같다. 체면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결국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의 중요한 첫걸음은 삶의 거품을 버리는 것이다. 이 거품때문에 모두가 실질적으로는 볼품없이 골치썩으면서 살면서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돈을 쓸때 쓰고 돈이 많더라도 좀 불편하게 사는 것을 선택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더 풍요롭게 살수 있는 것 아닐까. 꼭 감옥처럼 생긴 공간에 자기 가진것 다 집어넣고 그것 누가 훔쳐갈까봐 전전긍긍대는것처럼 살고, 남앞에서는 하나 가져도 열가진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국인의 허세는 거의 사회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허세에 빠진 것을 잘 못느낀다. 오히려 종종 나정도면 허세없이 수수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하는말이지만 호칭만 보면 한국인의 허세는 쉽게 들어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공식자리를 제외하면 한국사람처럼 부장님, 교수님, 회장님, 박사님, 여사님 높게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사람처럼 외출할때 늘상 비싼 옷입고 화장하는데 신경쓰는 나라도 없다. 일본은 그런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한국인의 허세가 훨씬 더 심하다. 


한국사람들이 있는 거 좀 숨기고, 잘난거 좀 숨기고 아름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허세가 부동산 문제를 포함해서 한국이 가진 많은 문제의 근원에 있다. 허세는 결국 허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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