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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심야식당, 숙성된 도시의 정서

by 격암(강국진) 2014. 3. 3.
내가 일본에 산지도 이제 십년이 가까워 간다. 나는 여러가지 일본적인 것을 보기는 했지만 유독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야식당의 시작에 나타나는 정서가 현대 일본을 잘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은 도시 소시민의 삶이라는 보편적 정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서양은 서양대로 한국이나 중국은 한국이나 중국대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은 일본만의 것이라고 할만한 섬세한 표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심야식당의 약간은 우울한 듯한 주제곡이 퍼지면서 음식이 만들어 지는 소리가 들리고 주인공의 담담한 목소리가 나올 때 나는 그것을 거듭 거듭 들으면서도 아 그래 이게 일본 생활의 정수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도시의 정서라고 하면 사실 내게는 약간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건 마치 매우 못생긴 무엇을 보면서도 그것에 끌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랄까. 


물론 도시라는 것은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도시라고 하면 그것은 크고 넓고 화려한 것을 말할 때도 있다. 백층이 넘는 고층건물의 스카이라운지 같은 것이나 화려한 쇼핑몰이 주는 힘과 정복감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도시의 얼굴에는 사실 별로 깊은 정이 가질 않는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한달 한해 십년이 가고 나면 그래서 더 화려한 것이 등장하면 고작 아 맞아 그런 곳이 있긴있었지라고 할것 이다. 때문에 제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한 무엇을 봐도 나는 일회용 물건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심야식당에서 표현하는 도시의 정서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멋지게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낡고 부서져가는 도로가 비에 젖어있는 모습이 보여주는 정서다. 그것은 화려한 스포츠카가 보여주는 정서가 아니라 출근 기차나 버스역이 보여주는 정서다. 도시의 콘크리트 벽밑에 피어난 작은 민들레가 보여주는 정서다. 


결국 내가 말하는 도시의 정서가 주는 정이란 인간에 대한 정이다. 무수한 인간의 발자취, 도시의 톱니바퀴같은 삶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원래 만들어진 대로가 아니라 세월과 인간의 손때속에서 길이든 것이다. 그것은 진정 콘크리트 블록으로 포장된 길에핀 민들레 같은 정서다. 민들레는 도저히 자라날수 없을 것같은 틈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고 마는 것이다. 


자연을 찬양하는 사람은 종종 도시의 삶을 비판한다. 자연을 찬양하지 않아도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같은 영화에서 기계화된 현대인의 일상이 비판되었듯 도시의 삶이란 대개 인공적인 것이고 사람을 쥐어짜는 것이다.


도시서민의 삶이란 새벽같이 일어나서 만원버스나 붐비는 통근 전철을 타고 일자리로 가서는 이런 저런 일들로 녹초가 되어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들의 집이라고 해봐야 마당에는 정자가 있고 개가 뛰어놀며, 보기 좋은 나무도 서있는 그런 집은 아니다. 그저 몸을 눕힐 작은 공간일 뿐이다. 여러가지 의무에 눌려서 사람들은 날마다 똑같아서 금새 그 의미가 뭔지를 잊게 되는 그런 삶을 하루 하루 해나간다. 


도시의 삶이란,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도시의 삶이란 붐비는 인간틈에서 산다는것을 말한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붐비고 가게는 엄청많다. 사람은 아주 많지만 그들은 대개 서로를 보고 있지 않다. 자기 동료나 가족을 보는 정도다. 그래서 더더욱 도시의 삶은 외로운 것이 된다. 


이렇게 좋은 것이 없어보이는 도시의 삶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순적으로 때로 짙은 향수를 풍겨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가르켜 노예의 생활에 중독된 상태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일본을 떠난다면 자주 가던 서민적 라면집이나 길에서 서서 먹어야 하는 닭꼬치집 역앞에 있던 술집이나 집앞의 슈퍼 같은 것이 그리워 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나는 깨끗하고 완벽한 것들보다는 금이가고 좀 낡은 것들을 그리워 하게 될 것이다. 산이나 바다만큼이나 도시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이든다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말긴 하지만 곰곰히 생각하면 이 정이든다는 현상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나는 인간이 만든 것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좋고 나쁨을 말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그것이 인간미를 어떻게 흡수하는가에 있는게 아닌가 한다. 어떤 것들은 세월이 가면서 그냥 세월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 인간의 생활에 물이 든다. 마치 어떤 요리의 재료가 짙은 소스에 담가져서 그 소스를 흠뻑 빨아들이듯이 그것은 주변 사람의 삶을 흠뻑 빨아들여서 낡아져 갈수록 점점 더 소중한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금방 만든 포도주나 김치가 완벽하지 않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손때가 뭍혀지면서 제대로 숙성되어 완성되어져 간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 물건의 본래의 근본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낡은 아스팔트도 책상도 기차도 벽도 쓰이지 않는 고물이 되어버려서는 도시의 정취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것은 잊혀질 것이다. 낡았지만 여전히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과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 것들이 정이 드는 물건의 특징이다. 그것은 마치 오랜 세월 사귄 친구같다. 나와 맞춘듯이 적응해서 편안하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친구의 모습이 나에게 의지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이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고층 아파트의 단점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층이건 저층이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고 게다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좋은 물건이라도 질을 잘못들여서 그것을 망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는 대개 세월과 함께 그리 멋지게 낡아가질 못한다. 심야식당에 나오는 가게는 낡아빠진 시계와 낡은 나무로 된 실내장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실내가 낡아지면서 가지는 정서를 낡은 고층 아파트가 가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조선시대의 집중에는 낡았어도 보존하고 싶은 집이 있지만 현대의 고층아파트는 그 기능이 다했을때 길이길이 보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세월과 함께 숙성되는 도시란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자연을 찬양하며 미래에는 보다 자연에 가깝게 살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꿈은 일정정도 착각에 불과하다. 미래에도 도시는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 것이다. 그 도시는 오히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도 더더욱 많은 인공적인 것으로 가득찬 곳일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기괴한 기계와 기괴한 집들이 가득차 있는 곳이랄까. 미래에도 도시의 서민이 몇백평짜리 토지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왕 인간이 만든 것으로 도시를 가득 채우게 된다면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더 숙성되는 것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멋없이 지어진 낡은 아파트들이 그대로 아무런 숙성을 거치지 못하고 폐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그것이 이제는 쓰레기로 변하여 도시를 썩어가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여기저기에 얼마 쓰지 못해 치우기 어려운 쓰레기가 될만한 것으로 도시를 채워버리면 결국 우리는 가난해 질 것이다. 금전적으로든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든 말이다. 


세월과 함께 숙성되어지는 것은 인스탄트만 논하는 시대에는 시대에 뒤진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고속발전의 시대가 끝난 한국에서는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되어간다. 미친듯이 써버리고 던져버리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은 얼마지나지않아 가난해 질 것이다. 물건이든 마을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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