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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도시의 삶, 시골의 삶

by 격암(강국진) 2015. 10. 13.

도시와 시골도 예전같지 않고 여러 다른 상황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용하게 살다가 훨씬 더 시끄러운 도시로 간 사람 혹은 그 반대로 하는 사람들이 종종 공통적으로 느끼는 경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도시의 삶은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고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며 이것이 누구의 권리이고 소유인가를 잘 따진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시골에서의 삶은 남의 집에 말도 없이 들어온다던가 니것 내것 안가리고 마구 쓴다던가 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도시로 간 사람이 촌놈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엇보다 빨리 배워야 하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환경과 시골환경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시골환경의 극단은 어쩌면 각자의 집일지 모른다. 당신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족들이다. 그들은 가족관계로 이어진, 당신이 아주 잘아는 사람들이다. 아이들의 경우는 또다른 문제가 있으니 예외로 하고 부부가 함께 사는 집을 생각해 보자. 그 집에서 각 배우자들은 서로에게 뭘 얼마나 비밀로 하고 살 것인가. 니것 내것은 얼마나 가릴 것인가. 내가 옆집 아줌마 욕을 하면 우리 아내는 거기로 달려가서 그걸 알려줄까?


그런데 바깥으로 나가면 수없이 많은 낯선 사람들이 오고 간다. 거기에서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신상명세등 당신에 관한 어떤 정보를 노출 시켰을 때 그 정보는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에게 갈지 모른다. 당신이 만나는 낯선 사람들 중에 몇몇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 친구라고 해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요즘 뭘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까 당신 통장에 1억이 현금으로 들어있다같은 정보를 아무데서나 떠들어 대는 도시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도시사람이 되지 못한 할머니나 시골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개인 정보를 마구 떠들어 대곤한다. 


도시의 깍쟁이들은 어떤때는 지나치리만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다음주에는 오키나와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던가, 오늘 오후에는 친구가 놀러온다던가 다음달에는 이사를 간다던가 지난 달에는 이혼을 했다던가 하는 정보들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사실 도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잘 캐묻지도 않는다. 물으면 반대로 자신도 자기에 대해 말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시적인 사귐이다.


정보는 힘이라는 것을 경험에서 배운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예를 들어 내가 가난하게 보인다 싶으면 돈자랑을 하다가 또 넌 풍족하게 사는구나하는 인상을 줄것 같으면 이번에는 자기가 얼마나 궁핍한지에 대해 긴 수다를 떤다.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래서 좀 정신이 없는데 이런 동으로 서로 뛰어가는 그들의 행동의 바탕에는 나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의식적 무의식적 주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깍쟁이들은 앞에서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없다면서 칭찬만 하다가 뒤를 돌아서면 내 저런 나쁜 놈은 처음봤다고 말을 하는 위선자라는 평가도 종종 받는다. 


다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상당부분 사회적 환경이 개인을 변하게 한 결과라는 점이다. 그 환경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한 방식을 찾는데 찾고 보면 어떤 공통점이 들어나는 것이다.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공중 목욕탕이나 해변에서 도시의 거리에서와는 전혀 다른 예법을 따른다. 도시의 길을 팬티만 입고 돌아다닐 사람이나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해변이나 공중목욕탕에서는 그렇게 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도시와 시골이라는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구분의 핵심은 단순히 위치의 차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30년전의 사람들에 비하면 모두가 도시로 온 촌놈같은 사람일 수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정보는 점점 더 빨리 퍼진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도시 깍쟁이에 가깝게 변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일단 성인이 되면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구세대가 신세대에 비하면 촌놈처럼 되어 버린 경우도 많을 것이다. 


환경을 의식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우리는 적응에 의해 금방 환경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의식적으로 뭔가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자신의 환경적 인식을 자꾸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무인도에서 홀로 살고 있다면 당신은 나는 개인적인 공간이 좋아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당신이 유명인들처럼 날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그들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개인적인 공간이 꼭 가지고 싶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우리의 환경을 잊어버린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환경의 결과라고 인식하기 보다는 그저 우리의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무인도에 살면서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유명인으로 살면서 사람은 원래 고독한 시간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을 말하고 마르크스는 경제적 상황을 말해서 우리의 사고는 우리가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나 경제적 상황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점은 당연히 좀 더 넓은 의미의 환경에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스마트폰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안에서의 인간의 마음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환경과 대화하고 있다는 것은 잊기 쉽다. 그래서 그것은 반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회적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아파트를 선택하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나는 아파트가 좋아. 아파트는 원래 단독주택보다 좋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문제의 사회적 환경도 변화가능한 것이며 한국에만 특이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아파트는 원래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한다. 그냥 아파트 패러다임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렇다고 할 때 아파트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생각일까 나에게 주입된 생각일까? 또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때 아파트는 좋다라는 것이 나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할까 위험하지 않을까? 그것은 마치 장마철이라서 날마다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금새 나는 우산이 좋아서 우산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장마가 끝나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우산은 들고 다녀도 큰 문제가 안되지만 지나친 빚을 낸다던가 과도한 주거비를 지출한다던가하는 것을 '나의 취향'이나 '나의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환경에는 무수히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이글은 정보소통의 속력차가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로 시작되었으므로 그에 대해 좀 더 말해 보고 이 글을 마치는 것이 좋겠다. 21세기에는 결혼제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외국은 둘째치고 한국에서도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있고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 아직은 사람들이 이것을 주로 경기불황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같지만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시골과 도시의 예로 돌아가면 결국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도시화로 인한 공동체 파괴다. 지역공동체는 너무나 많은 외부인들이 오고 가는 도시로 환경이 바뀌면서 파괴된다. 공동체가 아니니까 서로에게 안전하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도시화는 분명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파괴는 삶의 질을 보통 하락시킨다. 이득과 손실의 폭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방면에서 일어나는지는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대로 사람들은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서 그런 손실 이득을 판단하는 사람 자체도 드물다. 


결혼제도의 붕괴란 결국 가족 공동체가 붕괴하는 것의 일부다. 도시화는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가족공동체까지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이혼이 선택의 하나가 되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약해지는 시대에는 가족들은 이제 서로에게서도 비밀을 가지기 시작한다. 자식에게 부모가 내가 얼마만큼 돈이 있는지를 안심하고 말해줄수 있는 경우는 점점 줄어든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이 노인정마다 가득하다. 남편과 아내도 재정을 분리해서 사는 경우가 많아진다. 아내는 남편이 얼마를 버는지 모르고 남편도 아내가 통장에 얼마있는지 모른다. 거듭말하지만 물론 우리는 이러한 변화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우리의 욕구로 파악한다. 부모로 부터 독립할 욕구. 자식으로 부터 홀로서고 싶은 욕구. 부부지만 서로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욕구. 


요즘 연애하는 사람들은 2-30년전에 비하면 한시도 쉬지 않고 서로를 느낄 수 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시대의 연애는 삐삐도 없이 유선전화만 있던 시대의 연애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연애하기 좋은 시대인 것같지만 도시의 사랑이 흔히 그러하듯 현실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건축학 개론이란 영화가 좋은 예다.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시대의 배경을 과거로 돌려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에는 저런 순수한 감정이 있었지 하는 추억에 젖는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러브스토리가 드물다. 있어도 그것은 아주 많은 장벽 너머에 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안의 전지현과도 다르다. 


현대의 사람들은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순진한 시대에도 사랑의 고백은 쉽지 않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은 비밀을 잘 가리지 못했기에 결국 그 마음은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비밀을 감추는데 너무나 능수능란해진 나머지 자신의 그런 능수능란함을 원망할 경지에 이른다. 썸만 타다가 말거나 사랑은 그냥 섹스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전달이 안되거나 섹스가 아닌 사랑이 뭔지가 이해가 안되는 경지에 이른다. 이런 시대에는 결혼이 하기 어렵고 결혼을 해도 유지하기 어렵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이것은 나의 욕구다라고. 


도시화 정보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몸에 좀 무리가 가도 직장에 나가야 하듯이 우리는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과 나의 관계를 의식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마음자체도 지배당하고 삶에 기쁨이 없어질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동시에 이것을 피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고, 좀 불편하게 살아보는 것도 필요하고, 필요없는 번잡함을 피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행을 통해 자기를 재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기의 집, 자기의 직장, 자기가 살아가는 고장에 대해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전에 말이다. 특히 이것은 젊은 세대에게 중요할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일찍 부터 도시화되고 정보화된 세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치유가 필요한게 아니라 아예 마음이 처음부터 말살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찍 부자가 된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도시를 탈출하고 치유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그런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 인식의 폭과 깊이가 너무 작은 것같다.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환경은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는 그저 자신의 욕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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