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노인이 살기 좋은 마을

by 격암(강국진) 2016. 12. 26.

나는 주변의 노인들의 삶 특히 나의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 노인과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곤 한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노인을 위해 살기 좋은 마을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고민은 자식된 사람으로서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아직은 시간이 있지만 나의 노후에 대한 고민이라는 점에서 그냥 타인에 대한 고민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그 삶에 있어서 공동체의 문제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보면 모든 종류의 공동체가 부실하다. 작게는 가족 공동체에서 지역공동체를 지나 국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허약한 정체성과 무질서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것은 현대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직장이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이런 원인중의 하나는 한국이 짧게 봐도 해방이후 이제까지, 길게보면 거의 조선시대부터 이때까지 사회가 계속 빨리 변해 왔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이때문에 하나의 공동체에 대해 만족스러운 관습이 생기기도 전에 온갖 종류의 변화가 몰려들어와서 새로운 공동체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옛 공동체는 힘을 잃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행복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공동체란 개인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며 보험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외로워졌고 일을 위해 유지되어져야하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이외의 사회적 관계는 모두 약해졌다. 공동체의 약화란 그렇게 일한 댓가를 제대로 돌려받는 것도 어렵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집중하는 직장의 의미도 공동체 문화의 문제로 약화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 특히 나이에 따라 어떤 공동체가 중요한가 또 그 공동체에서 맡는 역할은 무엇인가하는 점이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붕괴되거나 하나의 공동체나 또다른 공동체로 대체된다면 그러한 현실이 가지는 의미도 연령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노인의 경우 직장이라는 공동체를 떠나 있는 상태인 것이 보편적인데 그렇다고 가족 공동체에 의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은 한국에서는 오늘날 세대 차이로 인해서 가족공동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떤 것인가는 얼마전에 내가 들은 한 보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자식은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멀리 미국에 있으면서 부모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부모가 사망하자 재산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자식은 일방적으로 받으려고만 할 뿐 부모의 삶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었고 부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만 투자하고 의지하려고 했으므로 그 부모의 노후는 그다지 평탄한 것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 부모가 자식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사회적 현실과도 연관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 그렇지만 노인의 삶에 있어서도 작은 지역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는 이 마을의 파괴의 역사였다. 한국에서 개발이라는 것은 아파트 건설을 의미했고 아파트 건설은 바로 지역사회파괴와 거의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제 누구보다도 노인의 삶을 아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노인은 직장에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족공동체나 지역공동체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더욱 중요해 지게 된다. 노인은 학습능력과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분야에서는 젊은 분야의 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어도 많은 분야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퇴직하는 순간,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공동체에서 받던 지원이 끊기는 순간 굉장히 무능력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어지는 상황이 벌이지기 쉬우며 이것은 단순히 생활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튼튼한 지역공동체가 오랜 시간 존속하는 상황에서 노인들은 오랜 시간 그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러 인맥과 지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그 공동체의 연장자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존경을 받기 쉽지만 개인주의적으로 인간관계가 약해지고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면서 계속 새로운 공동체에 적응해야 하는 형태의 삶을 살게 되면 이젠 오히려 계속 젊은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와 분리된 노인들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피우고 간섭이나 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는 말이다. 


결국 고립된 노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자칫하면 사기에 가까운 것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런 위험은 자식으로부터의 위험도 포함한다. 그저 자기일에 바빠 부모의 삶에 무관심하거나 노인은 그저 밥이나 먹으면 사는 것이라는 정도의 발상밖에는 가지지 못하는 자식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노인의 삶은 행복한 것이 되기 어려울 것은 뻔한 것이다. 


마을 재생운동은 그래서 노인을 포함한 여러 연령대의 행복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마을 재생이란 공유하는 자원이 증가하고 인간관계가 강화되며 무엇보다 삶을 단순히 먹고 소비하는 것 이상의 수준에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마을만들기 운동의 예를 보면 텃밭가꾸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이 사업이 위에서 말한 모든 요소들을 두루 갖춘 예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을에 존재하는 공동의 텃밭은 농사짓는 기쁨을 같이 누리게 하면서 자연스레 이웃간에 대화를 유도하게 되고 그러면서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작한 고구마를 같이 구워먹는 사람들과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먹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 이 예에서 나는 반드시 어떤 음식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직장의 부속품이 되어버리거나 사육되는 동물처럼 도시시스템에 익숙해져버린 인간은 지극히 한정된 종류의 삶만을 체험하기 때문에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기 쉽다는 것을 말한다. 텃밭이 있는 마을의 주민도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적어도 두가지의 다른 삶, 다른 소비형태를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시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텃밭가꾸기가 마을 만들기의 전부는 아니다. 마을 만들기의 또 다른 좋은 예는 공동육아다.  마을 공동체가 소멸된 상태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육아를 위한 공동의 자원이 있고 부모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문에 특별히 마을 만들기를 하지 않는 경우에도 한 지역의 지역공동체에서 학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그 지역의 공동체 정신이 유지되거나 자라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육아는 노인세대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노인을 위한 마을이 노인을 위한 시설이 가득찬 마을이 되는 것으로는 부족한 이유는 노인에게는 아이들과 접하면서 노년의 삶뿐만 아니라 유년의 삶을 목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손자 손녀뿐만 아니라 동네 마을의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노인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을 만들기에서 거론할 것은 공부다. 인문학강좌같은 것이 마을 만들기와 더불어 개설되는 이유는 이것이 앞에서 말한 마을만들기의 세가지 목적을 충족하는 또다른 예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위해서는 모임이 있어야 하고 소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된다. 


불행한 것은 한국인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대개 파괴하고 그 대신 무한의 독점적 소유욕만 키워왔다는 것이다.  내 공간만 강조하는 아파트로 이사가서는 이웃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편적인 삶이 되게 만들었다. 직장에 가서 돈을 벌고 내 통장의 잔고를 늘리는 일만 하면 행복이 보장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결과 교육비나 육아를 위한 비용은 증가하고 주택의 가격이 폭등하며 외로움과 삶에 대한 불만은 증가했다. 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살률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 다른 무엇보다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각각의 세대는 각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장년은 장년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어딘지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이 계속된다. 


국가공동체는 국민의 행복을 바란다면 텃밭과 공원이 있는 주거환경의 개선을 추진하고 육아에 있어서 공동체 활동을 권장하고 지원하며 동시에 바람직한 삶에 대한 논의를 국민들에게 전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일이 외면된 것이 한국이다. 개발논리가 마을이라는 관점을 지워버렸다. 재벌에 휘둘리는 국가는 그저 평균국민소득 이야기나 하면서 국가를 인력이라는 자원을 생산하기 위한 농장쯤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다. 대학도 효율논쟁에 빠져서 자기 살기도 바쁘니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을 메세지를 생산하는데 한계가 있다. 


지금도 열심히 여러 사람들이 애쓰고 있는 것같지만 마을 살리기 운동이 곧 한국 살리기 운동이라는 점을 여러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게다가 제발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절의 유산인 낭만없는 삶에 대한 시각은 좀 바뀌었으면 한다.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 쌓아놓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같은 사람들로 한국은 가득 차 있다. 건강하고 성공적인 마을이 해 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