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답답할 때가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나에게 있어 매우 지루했고 부자유스러웠다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어린 시절에 무슨 극적인 불행이라도 있었는가 싶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대단한 일은 없었다. 그저 흔한 유년기의 기대와 실망 이야기정도다. 그저 보통의 일상, 변변치 않은 보통의 아이가 비슷하게 변변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는 그런 생각에 빠져서 스스로를 어느 정도 실패자로 느끼며 답답해 하던 그런 일상이었다.
누구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삶도 어떤 기준에 따르면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과 실패 그리고 뜻밖의 변화와 돌파구 같은 것으로 이어져 있는데 오늘 문득 자판기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유를 찾아 헤맨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느 새 속박이나 코를 꿰는 것을 아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자유를 느낄 수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뭔가- 돈이라던가 명예라던가 업적이라던가 인맥이라던가 화려한 이력이라던가- 를 산처럼 쌓아놓아도 자유가 없으면 그 쌓여져 있는 것이 진짜 내 것이라고 하기도 쉽지 않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내게도 좋은 것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전에 그게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걸 내 맘대로 쓸수 없으면 그걸 내가 가진게 맞는가 하는 것이다.
흔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정말 공짜가 없다. 뭔가를 가지면 대개 그 댓가로 어떤 속박이 따라온다. 로또를 맞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 중에 파산하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다. 내가 이건희나 빌게이츠 같은 부자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 방어없이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서 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에 대해,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방어막을 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운전할줄 모르는 사람이 차가 생겨서 고속도로에 나간 꼴이다. 우리 앞에서 버글거리는 수없이 많은 기회주의자들과 아첨꾼들과 사기꾼에게 우리는 뼈도 안남기고 뜯길 것이다. 유명인은 화려한 호텔방이나 사무실이나 집에서 자기가 아는 검증된 사람들에게 둘러쌓이거나 혹은 혼자서 최고급 술을 마시고 최고급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보통 사람들이 가는 인기 있는 가게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어보는 것 같은 소시민적인 행복은 누리기 어렵다.
로또맞는 것같이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대개 의식적으로는 물론 무의식적으로도 앞에서 말한 방어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만들어지는데다가 곧 익숙해 져서 우리는 곧잘 우리에게 그런 방어막이 있다는 것도 잊게 된다. 이건희나 빌게이츠만 방어막이 있는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평범한 우리도 다 그런게 있다.
그래서 가끔 연예인들중에 뽑혀서 가난한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참상을 보고 오는 사람들중에는 정신적인 충격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울지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런 프로그램의 핵심적 의미가 누군가를 대표로 뽑아서 사회적 보호막의 바깥쪽을 경험하게 하고 그 결과를 사회에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그들은 일종의 온도계같은 측정도구로서 낯선 나라에 던져진 것이다. 감수성이 뛰어날것 같은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은 거기에 적합한 재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를 외칠지 몰라도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은 물론 지구상의 과반수 이상의 인간들에 비하면 왕족처럼 산다. 당신은 마실 물이 없어서 죽거나 청결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기때문에 감염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그런 삶과는 분리되어져 있다. 국경으로 분리되었을뿐만 아니라 정보적으로 정서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우리를 보호하는 보호막은 여러측면에서 쳐져 있다.
그 보호막중의 하나는 물론 정치적 국경이지만 경제학적 논리같은 것도 그런 예다. 내가 종종하는 말이지만 경제학의 가장 큰 효과중의 하나는 우리의 인간적 책임감을 없애는 것이다. 즉 이웃이 굶어죽었는데 그것은 잔인한 내 심성때문이 아니라 경제학적 법칙의 결과로 어떤 노력을 해도 그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경제학의 본질인 것이다. 경제는 우리의 선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초월해 존재하는 자연법칙같은 어떤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돌맹이를 던졌는데 그게 떨어지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중력법칙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어쩌면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경제학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의 존재를 위한 기존 전제가 잘못되어져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제학뿐만 아니다. 국내와 외국만 그런게 아니다. 모든 분리에 대해 우리는 방어막을 만든다. 문화적 방어막은 직장상사와 부하직원간에 생겨나고, 남자와 여자간에 생겨나며, 선생님과 학생간에 생겨나고 경찰과 범죄자간에 생겨나며, 정치인과 국민들 사이에 생겨난다. 귀농인들은 시골사람들의 텃세에 대해 불평한다.
물위에 손을 넣고 손을 저으면 물결이 생겨나듯이, 우리 주변을 공기와 지구 자기장이 둘러쌓고 있으며 그것들이 우리를 태양풍에서 보호하듯이, 우리가 변해가고 이동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방어막을 만든다.
그리고 그 방어막은 우리를 보호하고 동시에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우리의 눈을 멀게하고 우리가 아무 맛도 느낄수 없게 하고 결국 우리가 행복할수 없게 만든다. 어떤 방어막은 너무 단단해서 사람을 완전히 바보나 노예로 만든다. 그러면 재산이 천조건 사회적 명예가 백두산 꼭대기에 이르도록 높건간에 그 사람은 행복할수가 없다. 껍데기의 노예일 뿐이고 실상은 남에게 보여지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매순간 고통속에서 채찍질 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 불쌍한 것은 뭔가가 안좋다고 느끼는데도 탈출구자체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 그녀의 세계는 닫혀있으니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래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자유라는게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람사는데 다 자유지 자유가 아닌게 어디있냐고 하는 사람이나 사람사는데 자유가 어디있냐, 다 부자유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모두 맞고 모두 틀리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란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신이란 고정된 자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자신이다. 자신을 긍정한 다는 것은 실패나 성공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실패한 회사원이나 성공한 학생이 될 수는 있지만 부모님의 자식이 되는데 실패했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린다. 나아가 나는 오른팔의주인이 되기에 실패했다는 말은 더더 이상하게 들린다. 고양이가 스스로를 가르켜 실패한 고양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우리가 본다면 우리는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로 살뿐인데 고양이가 고양이 되기에 실패할 수도 있는가하고.
우리는 어떤 것을 원한다. 그런 그 욕망이 집착이 되는 것은 즉 빵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단순히 빵을 먹고 싶다는 생각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어떤 계획이 붙고 계산이 붙게 되는 단계가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공과 실패를 말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양이는 고양이가 되기를 실패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를 실패할수 있는 것은 인간을 앞에서 말한 그 보호막, 어떤 문맥 속에 집어넣어서 의미와 계획을 가져다 붙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라는 별에 조막손이라고 불리는 고양이가 태어나서 호기심을 가지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죽었다라고 하는 문장에는 성공과 실패의 판단이 없다. 그러나 이 지구라는 별에 철수라는 인간이 있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거나 혹은 별 재산도 모으지 못하고 가난뱅이로 살다가 죽었다거나 하는 말을 하면 우리는 거기서 분명하게 성공과 실패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이기를 실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나는 이따금 자유를 느낀다. 항상 그렇지 못한 것은 여전히 내가 이 세상의 여러가지 말들과 의미로 돌아오기 때문이고 그렇게 살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한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내게 말할 때이다.
나는 나이기를 실패할수는 없다. 나는 자유다.
언젠가 이런 말을 내게 다시 들려줄 필요가 없을 때가 되면 나는 매순간이 자유롭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때가 언제가 될까에 조바심을 내는 것이 부자유스러워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런 때가 언제가 되면 어떻고 안되면 어떤가. 그냥 나대로 사는 것이지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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