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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을 믿는 나라, 법칙을 안믿는 나라

by 격암(강국진) 2014. 1. 3.

과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비극은 세상에는 어떤 피할 수 없는 법칙이 있다라는 믿음과 연관이 있다고 말해진다. 즉 주인공이 어떤 노력을 다해도 정해져 있는 비극적 결말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세상을 그린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칙이 있다라는 믿음이 되고 결국 과학적 법칙의 추구가 되었다는 설명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소설 임꺽정을 다시 읽으면서 참 우리 민족도 그런 면이 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임꺽정뿐만 아니라 대장금같은 드라마며 우리의 옛날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것이지만 항상 거기에는 어떤 예언이 나오고 어떤 도통한 자가 나타나서 미래는 이러저러하리라 라고 하면 그것을 피해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점을 보는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참 뿌리깊은 것인데 점을 보는 것이 미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리스 비극처럼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 즉 점이나 예언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기술이나  신기한 지식을 가진  이 세상의 누군가는 미래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이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있다는 믿음과 이어지게 된다. 법칙이 없다면 미래를 어떻게 보겠는가. 


점치기 좋아하는 우리민족은 뒤집어 말하면 이 세상의 법칙성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가진 민족이며 그것은 점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성리학을 봐도 그렇게 느껴진다. 세상에 조선왕조실록같은 기록을 남긴 왕조가 없으며 한글같이 문자를 만들어 보급시킨 왕조도 당연히 없다. 문자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글로 씌여질수 있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오늘의 일이 내일과 그리 크게 상관없다고 믿는다면 기록을 남겨야 할 이유가 없다. 남들이 보기에 이해가 안될정도로 기록과 문자에 집착했던 조선의 문화는 그만큼 우리가 세상에는 근원적 원칙이 있으며 수많은 관찰과 경험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을 믿었던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그런 의미에서 서구와 관련없었지만 아주 서구적인데가 있는 나라다. 서구의 과학적 정신과 이어져 있는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예로 들수 있는 나라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그 수많은 신사들이 모시는 수많은 신들이 보여주듯이 어떤 절대적 법칙따위는 잘 믿지 않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 라쇼몽이라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쓴 일본의 소설을 평한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방송에 따르면 이 라쇼몽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 졌을때 서양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단다. 라쇼몽의 줄거리는 같은 사건이 벌어졌을때 그걸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기술했을때 이야기가 아주 달라지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서양사람들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일본은 법칙을 믿고 그 절대적 법칙을 추구한 끝에 그런 추구의 한계와 문제점을 깨닫고 다시 법칙없음을 생각한 과정을 겪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일본사회는 애초에 법칙의 추구자체를 크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구와 접하고 그런상황인 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럴수있었던 일본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것은 어른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할때 마치 애초에 세상에 더렵혀진 적이 없는 아이의 상태가 그자체로 좋은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상 아이는 아이답게 무지하고 잔인할 때가 많다. 아이는 아이라서 그런 행동이 그런가보다라고 이해될 뿐이다. 이것은 지금 일본에게 커다란 족쇄가 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은 과연 민주화될수 있는가에 대해 누구보다 일본의 지식인이 부정적이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에 영향받는 한국사람들이 보기에 일본사람들은 윤리적으로 그 뿌리가 매우 약하다. 즉 왕이나 국가를 초월하는 어떤 법칙위에 윤리적 기초를 세운게 아니라 고작해야 메이지 유신이후 천황에 대한 충성정도에 기반하여 윤리를 구성한 상태였다가 세계대전에 패배한 나라라는, 그런 인상이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악도 선도 없으며 각자 자기의 입장이 있다라는 주장은 매우 옳은 것이지만 그것이 일본인의 입에서 나왔을때는 그리 공감이 가질 않는다. 독일이 히틀러시대를 반성할때 그들도 히틀러의 시각에서 히틀러도 할 말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몰랐겠는가?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너무 쉽게 너도 옳지만 나도 옳다는 상대주의적 시각을 도입한다. 그런데 주로 가해자일때 그렇게 하니 문제다. 피해자일때 남을 이해하는 경우가 언제 있었던가?


내가 일본에 온지 몇해가 되었을때 일본에서는 중국산 만두를 먹고 사람이 죽은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자 일본방송은 중국의 불결함, 시스템의 문제있음을 어찌나 오래동안 이야기하던지 중국인이 아닌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내가 이제까지 살았던 경험에 근거해 말해보자면 만약 후쿠시마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한국에 있는 것이라면 일본사람들은 화성정도에 다다를정도로 펄쩍 뛰면서 중국이나 한국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방사능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유럽사람들이 체르노빌의 경험때문에 벌벌떠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어쩌면 중국이나 한국으로 여행도 금지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기나라에서 그 사건이 일어나니까 갑자기 다 별일이 아닌 것으로 지나치게 축소해서 인식한다. 애초에 방사능 위험기준 수치가 일본의 수치는 국제수준보다 더 낮았는데 갑자기 그 수치를 국제기준보다 크게 올려서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상대주의적 입장이 악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으며 절대는 없다라는 성숙한 인식이 아니라 그저 이기주의에 이리저리 살을 붙인 어린아이의 태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어느나라고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지만 일본은 윤리적으로 적어도 존경할만한 나라는 아니며 그때문에 그 경제력이 그토록이나 대단했던 시대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적인 존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진정한 존경이란 결국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원적 법칙을 추구하지 않고 표면만을 보는 문화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일본은 수많은 명품을 만들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 것을 만든 적이 없다. 일제자동차가 세계에 유명하고 한때 소니의 워커맨은 지금의 애플의 아이폰을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자동차를 일본이 만든게 아니고 녹음기를 일본이 만든게 아니다. 그들은 있는 것을 작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반면에 지금 세계를 뒤흔드는 스마트폰의 뿌리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세계최초로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만들고 한때 pmp로 세계사람들을 감탄시켰던 한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얼마전에 세계의 첨단로봇들에 대한 광고를 모아놓은 비디오를 본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주로 미국과 일본의 로봇들이 등장했는데 나는 거기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로봇들은 겉모양이전에 내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는 느낌이다. 즉 얼굴표정을 만든다고 하면 얼굴의 어떤 근육들이 저런 표정을 만들까를 고민하는게 미국식이라면 내부야 어찌되건 표면적으로 인간의 얼굴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일본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표면에만 집중하는 것은 상품을 만들때는 좋지만 결국 가장 깊은 힘은 원초적 법칙을 찾아내는데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로봇들은 그 미래가 밝아보였지만 일본의 로봇들은 어딘지 모르게 겉만 흉내낸 장난감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번 후쿠시마사태때도 로봇대국이라는 일본이 방사능 현장에 투입할 로봇이 없어서 미국이 로봇을 빌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는 말을 들었을때 나는 많은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깨끗한 무대위의 장난감에서 그리 멀리가지 못했던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초적 법칙에 대한 추구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조선이 망한 것이 좋은 예다. 또한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이 몰락하고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운 미국이 부상한 것이 다른 예다. 법칙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시각을 점점 더 작게 만든다. 예외적인 것에 대해 관용이 줄어든다. 뭔가를 절대적으로 믿고 추구하게 된다. 히틀러를 믿었던 독일인처럼,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조선인들처럼 그럴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야할 법칙의 추구와 법칙에 대한 믿음이 사람을 억압하는 방식이 되고 만다. 법칙을 믿을 수록 사람들은 극단적이 된다. 마치 튼튼한 자동차와 고속도로 표면에 대한 믿음이 깊을 수록 우리가 고속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따금씩 도로에 구멍이 있을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시속 백킬로나 백오십킬로로 달려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죽을테니까. 


한국사람들은 유달리 귀가 얇다. 일본에는 버젓이 공산당 홍보 포스터가 걸려있고 공산당 선전차가 돌아다닌것에 비하면 아직도 종북이나 빨갱이니 하는 말에 나라가 흔들린다. 중국이 우리나라 최대 무역상대이며 공산국가라는 사실이 망각된다. 내가 보기엔 귀가 얇다는 것도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도 결국 세상을 보는 방식이 법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법칙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귀가 큰 사람은 성격이 좋다는 법칙을 귀의 법칙이라고 불러 보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 몇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모두 귀가 컷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귀가 큰 사람은 성격이 좋다는 법칙을 믿는다. 그리고 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귀만 본다. 귀가작은데도 성격이 좋아보이면 그럴리가 없어, 거짓말일거야 라고 말한다. 


법칙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그 사람을 다시 평가하니, 느리고 가지고 있어야할 정보가 너무 많다. 귀의 법칙을 믿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처럼 호쾌하게 이리저리 일처리를 할수가 없다. 그러나 호쾌한 일처리를 하는 그 법칙론자는 물론 매우 위험하다. 


일반화를 서두르는 한국사람들은 패륜적 뉴스에 매우 민감하다. 어떤 한국사람이 부모를 필리핀에 버리고 왔더라고 하면 우리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흥분한다. 물론 어느 나라사람이 그걸 좋은 일이라고 하겠는가만은 일본과 한국사람의 반응은 상당히 다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뉴스를 듣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그 뉴스를 한국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를 판단하는 자료로 본다. 즉 한국사회라는 커다란 존재에 대한 법칙을 찾는다는 느낌이다. 그 뉴스가 사회적인 금기가 전반적으로 다 붕괴되었다는 증거로 느낀다. 일본사람들은 그 뉴스를 그저 나쁜 사람이 있다로 느낀다. 일반화가 훨씬 약하다. 그러니까 저기 멀리 어느 동네 사람이 어떤 엽기적인 일을 했다고 해도 한국사람에 비하면 그런가 보다 할뿐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다. 


한국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이렇게 법칙을 찾고자 하는 욕망은 강한데 모두를 만족시키는 법칙은 찾아지지 않는 가운데 섯불리 자기는 그 법칙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확신범들이 세상을 흔들어 대는 일이 많아서다. 다양한 사람이 숨쉴 공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아파트가 돈이 된다고 하면 모두 아파트사는데 몰두하고, 새로생긴 국제중학이 미래에 대한 보중수표라고 하면 모두 국제중학못보내서 야단이고 해외유학이 그렇고, 성형수술이 그렇다. 확신을 가지고 절차 다 무시하고 4대강을 밀어버린 대통령도 있다. 


그래도 만약 모두가 지쳐서 떨어지기 전에 우리가 모두를 만족시킬수 있는 세상에 대한 어떤 설명, 철학, 시스템을 찾아낼수 있다면 그건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강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될것이므로 바로 한류열풍처럼 문화적 영향력을 한국사회에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세계를 흔들 뭔가를 찾아낼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한국드라마가 동남아에 인기가 있는 것은 부족하나마 한국드라마안에서 보편성을 달성한 어떤 윤리적 규칙을 발견하는 것에 힘입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끄러운 한국이 큰 법칙, 큰 시각을 발견하게 되기 전에 이일의 불가능함에 지치고 한국사회가 늙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안좋은 시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한국은 이미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으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거나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안에서 한국의 새로운 미래와 질서를 제시하는 문화운동은 아직도 뚜렸하지가 않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게 어떤 일일까. 우리는 이미 적어도 한번 그런 일을 겪었다. 바로 조선의 패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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