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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공유의 경제, 다른 종류의 게임

by 격암(강국진) 2014. 2. 17.

14.2.17

어느 새 우리주변에는 공유경제라는 이름이 자주 돌아다닌다. 서울시가 공유경제를 추구한다고 하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공유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사가 여기저기에 나돈다. 적어도 몇몇 사람들은 차를 공유하고 집을 공유하고 책을 공유하고 옷을 공유한다. 공유는 단순히 소비에 관련된 것뿐만이 아니라 창업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유 사업을 벌여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열린 옷장이라는 사이트는 옷을 공유해서 돈을 벌거나 아끼려는 곳이다. 정장을 여기저기 입고 다닐 일이 많은 사람들이 옷을 여러벌 사지 않고도 옷을 입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아이디어를 쓰면 당연히 대출서비스 창업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회원들이 가진 물건을 서로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 주요사업이므로 창업비를 크게 들이지 않고 말이다. 공유의 경제는 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검색창에 공유경제라는 이름을 쳐보면 우리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이야기들을 금새 수집 할 수 있다.
 
나는 인터넷에서 흔히 검색할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두가지 여기에 첨부하고 싶다. 그래서 공유의 경제라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전혀 새롭지 않은 게임이며 그것이 발전하면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많이 가진 게임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발전하게 될까하는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생각의 공유라는 것을 통해서 공유의 경제학을 실천하려고 한다고 할까. 사실은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알고 싶다. 공유의 경제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써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가지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과가 적다. 우리는 약간이라도 좀 근본적인 것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선 시장이라는 게임에 대해 몇마디가 필요하다.
 
시장이라는 게임
 
익숙해 진다는 것, 그래서 세상과 삶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어떤 뭔가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된 그것이 무엇일까를 상기시키는 것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이며 거기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장경제에 즉 돈을 쓰고 물건을 사고 파는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 돈을 가지면 안되는게 없다는 사고방식이 드물지 않고 따라서 돈이라는게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먼 옛날부터 돈이나 시장이란게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지금 세상과 한가지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사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에 작은 구역들, 바깥세상의 자본주의 혹은 시장이라는 게임과는 다른 종류의 게임이 행해지는 세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예중의 하나는 가족일 것이다. 가족들은 서로에게 고용관계로 얽혀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상이라 아주 이상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론적으로 말할 때 돈이 있다고 아버지나 아들을 고용하고 아내나 남편을 고용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은 서로 서로에게 그 귀하다는 돈을 당연하다는 듯이 달라고 요구한다. 당연히 그건 시장게임과는 다른 종류의 규칙이 적용되는 분야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그건 학교의 교실일 것이다. 학교는 돈을 벌어서 그것을 사고 파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학교라는 장소에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던가, 밥을 먹기 위해서 식비를 내야 한다던가 하는 것은 제거되어 있다. 그것은 물론 학비를 내는 학부형이 주로 뒤에서 해결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던지 간에 교실내에서 학생들간에 돈을 주고 받을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학생들이 종종 가지는 비극중의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이 그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 살아야 할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것을 잊게 되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은 학교에 적응하고 바깥 세상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것을 정답으로 외우고 친구들과 경쟁에 몰두하고 거기서 이기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두가지 예를 들어보면 돈이면 안되는게 없다고 말해지는 요즘 이지만 그리고 분명 온세상이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여러가지 작은 공동체, 작은 단체, 작은 게임들이 존재하여 시장게임과는 다른 규칙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돈을 받고 일한다는 회사조차 돈받은 만큼만 일한다는 시장의 법칙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한국같은 사회에서 더욱 그렇다. 세상이 그렇다면 사장에게 굽신거리고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일도 훨씬 적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지니스관계일 뿐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진짜 중요한 질문은 학교나 가정바깥의 진짜 세상은 시장이라는 게임의 법칙대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 여기저기에는 다른 게임의 법칙들이 통하는 공간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중요한 질문은 진짜 세상은 우리가 익숙한 시장이라는 게임의 법칙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믿음은 옳은가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진짜 세상이라는게 있기는 한걸까. 그저 게임이 있을 뿐이 아닐까. 눈을 들어 사방을 돌아봐도 어디에도 시장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보인다고 할 때 우리는 서둘러 무슨 비현실적인 이야기야, 시장이라는 게임은 세상 그리고 인생 그 자체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말하기 전에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당연시하고 부모가 주는 혜택을 모르는 철부지나 교실안의 삶만을 아는 우등생이 저지르는 실수를 우리도 꼭같이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부모에 기대는 철부지는 부모라는 존재에서 생각을 멈춘다. 부모가 어디서 돈을 벌어오고 먹을 것을 구해오며 왜 그렇게 하고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가는 애매하게 이해하고 만다. 입시공부에만 몰두하고 학교만 아는 학생은 교실이라는 공간, 선생님이라는 존재, 그 안에서 존재하는 규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바뀌어질 수 있는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원래 그런 것내지는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러냐고 하면 엄마니까라고 답하거나 선생님이니까 혹은 학교니까라고 답할 뿐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당연시하고 종국에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게 옳을까?
 
그렇지않다는것을 보여주는 예를 우리는 역사나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에서도 발견한다. 역사를 논하거나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 한국이니 중국이니 일본이니 미국같은 나라를 유지하게 만들어 준다. 그 역사가 독도가 어느 나라땅인지 김치가 어느 나라 문화인지, 대만과 중국이 같은 나라인지 다른 나라인지를 결정한다. 역사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인지 침탈을 행한 것인지를 결정한다. 역사에는 장기적 국가적 역사만 있는게 아니다. 단기적 역사, 개인적 역사도 있으니 역사가 결국 정치를 결정하고 개인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게 되는가도 결정한다. 이것은 시장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생존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게임인 것이다.
 
가정이라던가 학교라는 게임말고 다른 게임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가정이나 학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은 가정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학교도 필요하다. 하나의 게임은 다른 게임의 부속으로 혹은 병행하여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는 여러가지 종류의 게임을 동시에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익숙한 시장이라는 게임말고 다른 게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게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은 여러종류가 있고 어떤 게임이든 원칙적으로는 다 가능하다. 단지 그 게임의 참여자, 즉 그 게임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된다.
 
공유경제라는 게임
 
공유경제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서 우리는 종종 신기하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소개를 받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공유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1940년대나 2000년이나 혹은 2008년 언제쯤 부터 생겨난 임시적이거나 매우 새로운 일로 봐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것의 기원을 기독교철학에서 찾거나 사람들의 선의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나는 그런 식으로 공유경제를 소개하는 것은 공유경제의 가능성을 억누르게 되며 우리가 익숙한 시장경제의 대안으로서도 평가받지 못하게 할거라고 생각한다. 공유경제를 착한 사람들이 하는 자선사업으로 이해하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 공유의 경제로의 전환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아주 자연스레 꾸준히 여러번 일어났던 일의 연장이라고 봐야 한다. 놀랍고 새로운 일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런 변화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은 이미 공유의 결과다. 한 아이폰을 사랑하는 네티즌이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삼성의 이건희보다도 더 좋은 핸드폰을 쓴다고. 이건희는 물론 빌게이츠라도 지하철을 타고 싶다고 해서 자기집 마당에 지하철을 깔고 그걸 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도 망을 공유하고 공공시설을 공유하는 경제에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핸드폰을 주문해서 쓰지 않는다.
 
요즘 자기집 마당에 있는 산에서 사냥하고 자기의 영토안에 있는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과거의 왕이나 귀족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성같이 커다란 집에서 살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독점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커짐에 따라 그런 세상은 붕괴했다. 그들이 파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한 공화국의 세상, 민주화된 세상이 온 것이다.

 

우리가 멋진 호텔에 가서 받는 서비스는 사실 서양의 귀족들이 호텔처럼 커다란 집에서 독점하는 하인들과 집사와 요리사를 가지고 손님을 받던 그 서비스를 공유화 즉 사업화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한듯이 슈퍼에 가서 야채를 산다. 집에서 야채를 기르지 않아도 야채를 못먹게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집에 텃밭을 가꾸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는 야채를 기른다는 것이 공유화 되지 않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즉 모든 종류의 시장화라는 것이 실은 과거에 개인적으로 독점적으로 행해지던 것을 공유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유화라는 것은 마치 공짜로 남의 것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댓가를 치루고 같은 것을 서로 나눠쓴다는 의미다. 공유의 목적이나 그 댓가를 치루는 방식은 다양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봤을때 공유의 경제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아주 옛날 부터 계속 일어나던 일이 더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런 추세는 항상 자명하게 일직선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자원의 한계에 따라 지그재그로 일어났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자원이 생산비를 들이지 않고도 무한대로 생산가능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원을 공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두 원하는 만큼 각자 가지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처럼 땅이 남아돌던 나라와 시대에서는 땅의 공유따위는 불필요한 일 나아가 끔찍한 일로 생각되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의 이유로 생산비가 비싸지거나 가질 수 있는 총량이 제한될수록 결국 공유를 하는 쪽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따라서 오늘날 도시에 사는 우리는 각자 만평쯤 되는 정원을 가진 집을 구해서 그런 집의 정원을 산책하는 대신 공원을 만들고 그것을 공유한다. 그런 공유의 경제를 실천하지 않고 독점을 하려는 고집은 경제적으로 말도 안되게 보인다.
 
21세기에 공유의 경제가 관심을 받는 이유는 세계 전역이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자원의 한계가 있는 가운데 인터넷과 컴퓨터의 발전으로 공유의 경제를 실천할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이 미국을 앞질러 전세계 최고 무역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미국대신에 어느나라가 패권국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왕정이 무너지는 시대에 다음 왕이 누구일까를 물어보는 질문처럼 들린다. 우리는 왕이 없는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시대에는 지난 시절의 왕족과 귀족이 그랬듯 지금의 선진국 국민들이 당연시하는 소비수준은 말도 안되는 낭비로 비판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자원의 한계는 아주 분명한 미래다. 중국인들이 참치회를 먹기시작하면 참치값이 폭등하는 그런 시대다. 다시말해 요즘은 더더욱 공유가 강화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은 미래에는 마치 성에 사는 사람들의 습관처럼 기묘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꼭 두려워 할 필요만은 없다. 사실은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상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 비하면 새로운 세상이고 공유의 경제를 실천해서 이렇게 변한 세상이다. 우리는 성같은 집에, 마당이 커다란 집에 대개는 살지 않지만 성에 살던 과거의 사람들을 부러워 하지도 않는다. 공유함으로써 시장은 다양해졌고 삶은 더 풍요로워진 면도 있다.  
 
어쩌면 독점적 소유란 인간의 수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긴시간이지만 역사적 시간기준으로는 과도기에 생겨나는 사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은 땅을 맘대로 소유한게 아니라 땅에 대한 개인적 소유의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땅이라는 자원은 마음껏 사치스럽게 소유되었고 이제 그 자원이 귀해지면서 공유의 개념은 증가하고 있다.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에는 소유의 대상이라는 개념도 없는 것을 독점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지적소유권이란 개념도 없었던 때가 있다. 유전자를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유전자가 뭔지를 알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요즘은 종자의 유전자에 대한 소유권은 중요한 사회적 문제다. 이렇게 많은 것이 소유의 개념이 없다가 소유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자원의 한계와 기술의 발전이 함께 하면 그것은 점점 공유화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원을 독점한자가 사회적 악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소유란 마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속력때문에 어쩔수 없는 필요악으로 가져야 하는 재고같은 것일지 모른다. 사과를 팔던 차를 팔던 뭔가를 파는 사람은 상품이 잘 팔리지 않아도 재고량을 비축해 놓아야 상품이 잘 팔릴때 팔 물건이 부족해 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재고를 마련하기 위해 창고를 마련하고 공간과 돈과 시간을 낭비해서 그걸 준비해 놓는다. 하지만 관리기술이나 조달기술의 발전때문에 상품의 조달이 쉽다면 많은 재고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필요할때 바로 그 물건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뭔가를 애초에 독점적으로 소유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우리가 필요할 때 그 순간 그 물건을 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인구나 자동화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점점 즉각적으로 물건을 구할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모든 것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소유하기 위해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것일까? 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아져서 폐품이 될뿐인 물건들을 집안 가득히 채워놓아야 하는 것일까. 쓰지도 않는 방을 언젠가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면서 준비해 놓아야 하는 것일까. 일주일에 한번밖에 안타는 자전거는 왜 대개의 시간을 녹이 슬면서 혼자 서 있어야 하는것일까.
 
공유의 경제가 극도로 발달한 미래에는 뭔가를 독점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극단적으로 떨어지고 모든 것이 대여와 공유로 바뀔수 있다. 예를 들어 차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주차공간의 비용이나 자동차의 가격이 개인이 감당할 수준이기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의 문제, 환경문제따위로 자동차의 유지비용이 극도로 올라간다면 쓰지도 않을 차를 차고에 세워둔다는 발상은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공유의 환경이 극도로 좋아지면 집앞에 나가서 그냥 거기 서 있는 차를 탄다라는 개념이 아주 당연해 보이게 될 것이다. 그건 zip카 값은 공유형 자동차 서비스 일수도 있고 스마트폰같은 것이 안내해주는 대중교통이 매우 효율화되는 것일 수도 있다.
 
거실이라는 공간의 공유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집값이 상승하는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비싼 부동산 가격도 어느정도까지는 투자라고 생각해서 감당해온 면이 있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평당가격이 거의 어디나 천만원을 넘는다. 3천만원을 넘는곳도 있다. 그러니 5평정도의 거실을 가지기 위해서도 서울에 사는 사람은 부대적인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5천에서 1억정도의 돈을 들여서 그것을 독점한다고 해야 한다. 만약 대가족이 산다면 그나마 거실을 가족들의 공간으로 공유하는 셈이지만 독신들의 경우에는 그 돈을 들여서 거실을 독점하느니 커피숍이나 피씨방이나 찜질방등 여러가지 공공공간을 사용해서 혹은 미래에 생겨날 어떤 공간 서비스를 이용해서 살거나 여러 세입자들이 모여서 그런 공간을 공유하는 쪽이 경제적으로 이득일 수 있다. 각자의 집을 연료비써가면서 난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회관을 난방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 마을회관에서 주로 시간을 씀으로써 연료비를 절약하는 것도 공유의 경제다. 각자의 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각각 책을 사는게 아니라 마을 어린이 도서관을 만드는 것도 공유의 경제다. 그렇게 보면 공동체부활을 통해 경제적 부흥까지 노리는 마을만들기라는 것도 새로운 공유의 방식을 고민해보는 시도중의 하나인 것이다. 즉 거대한 시스템으로 표준화시키는 시장화만 공유가 아니다. 지역화하고 다양화하는 것도 공유의 경제다. 그 핵심은 인간을 자유롭게 행복하게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만평짜리 정원을 가지는 것이 정원도 없는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 훌룡한 것처럼 넓은 공간을 독점하는 쪽이 그런 공공공간을 활용하는 것보다 근사해 보일테지만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집에서 직접 만든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고 직접 만든 음식만 먹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는 싫어했을 법한 것들을 공유의 경제로 바꾼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러는 가운데 공유에 대한 우리의 감정도 바뀌었다. 상업화를 하는 가운데 독점적으로 그것을 했을 때보다 오히려 훨씬 더 훌룡한 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주거공간의 공유만 해도 그렇다. 집에 찜질방만큼 좋은 공간을 가졌거나 상업영화관처럼 좋은 영화시설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반기지는 않을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자유에는 댓가가 따를 것이다. 서울에서 만평짜리 정원을 가진 단독주택에서 살면서 쌀을 살 돈도 없어서 굶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땅 한구석만 팔아도 그런 고생을 해야할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공유의 경제를 활용해서 삶의 질을 유지하고 돈을 절약하는 대신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비싼 이자를 내가며 거액의 돈을 빌려서 아파트를 구매하는 젊은 세대, 죽도록 일해서 그 돈을 갚아나가며 늙어가는 젊은 세대는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상적이라던가 원래 그런거라던가 하는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그런 것이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를 생각하고 변화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나치게 변화에 몰두하는 것도 아파트 투기처럼 위험하다. 산업화에 몰두하면 우리는 인간을 기계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속도에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더빨라서도 곤란하지만 너무 늦어서도 곤란하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파산하기 쉬운 선택일 것이다. 공장시대가 열렸는데 농사만 고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적절한 변화의 속력이 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통신과 컴퓨터의 발전이 예전과는 다른 어떤 게임이 경쟁력을 얻게 만들고 있다. 
 
공유의 토대
 
어떤 사람이 공유경제라는 것에 대해 그런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의문점을 표한다면 나는 앞에서 한 말을 통해서 공유경제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공유경제를 통해서 과거에서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의 질문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왜 더더욱 전폭적으로 공유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대중화되지 않고 있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여러가지를 소유해야 하는가. 왜 공유경제의 시도들은 종종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가. 공유경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공유경제의 문제점으로 통상 지적되는 것은 신용의 문제다. 즉 공유를 하자면 그 공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믿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유의 폭을 넓히자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를 하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 예를 들어 내가 여행가서 그곳의 사람들의 방을 빌려 쓰는 대신에 누군가가 우리 도시에 오면 내 방을 쓰게 해주는 공유를 생각한다고 하자. 이런 공유가 잘 통한다면 우리는 여행비를 크게 아낄수 있겠지만 이런 공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우리집에 들어왔다가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 이 문제는 공유의 형식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심적인 문제일 것이다.
 
나는 공유의 과정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속 있어왔던 과정이라는 점에서 역사를 다시 보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일이 풀려갈 것인지, 지금 어떤 식으로 일이 풀려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용의 문제는 역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공유의 경제를 소개하는 글들이 더 새롭고 윤리적인 경제활동이 공유경제라고 선전하는 이유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부자나라에 오면 가끔 그런 말을 한다. 차표를 속인다던가 줄을 새치기해서 얼마든지 속일수가 있는데 속이지 않는 그 부자나라의 국민들은 멍청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게임의 목표,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게임이 바로 부자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들어 주었고 그들의 나라가 가난한 이유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유의 경제를 위해서는 우리가 익숙한 게임의 규칙과 그게 뭐가 다른지, 그런 게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게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게임도 그저 가능한 게임의 하나일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나는 이 글의 맨 앞에서 시장의 게임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이것으로는 물론 충분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유경제의 목표와 윤리와 철학에 대해 더 배우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유경제를 말하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윤리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공유경제를 착한 사람들의 자선활동쯤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이 열린 금광이라고 소개되어야 할지 모른다. 
 
다시 신용문제로 돌아가보자. 세계무역이 활발해 지던 시절 인류는 마찬가지로 신용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지구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화상통신도 바로 하는 시대이지만 과거에는 소식을 듣거나 거기에 가는데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다. 그런 곳과 사업을 한다는 것은 신용의 문제를 만들어 냈을 수 밖에 없다. 지구반대편에 물건을 보내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누가 책임지는가. 그 사람이 어디론가 잠적해 버리면 나는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두가지 종류의 변화가 이 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나는 통신이다. 대서양을 건너는 통신의 속력이 빨라질수록 교통수단이 빨라질수록 멀리 떨어진 사회는 하나의 경제로 융합되기 쉬워졌을 것이다. 또하나의 변화는 법인의 출현이다. 신용이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는 담보나 보증을 통해서 신용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담보란 많은 돈을 의미하고 보증이란 이번에는 보증인의 신용은 어떻게 만드는가라던가 보증서는 사람이 보증설 사람의 신용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만들기 때문에 신용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다.
 
신용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정보다. 통신도 법인도 모두 정보에 대한 것이다. 허무하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킬 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보는 곧 권력이고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를 신용해달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내 정보를 전부 공개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사업을 하겠다고 내 소득과 지출을 전부 공개한다면 그 정보에는 우리 집사람이 어디에 무슨 물건을 쓰는지,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 내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같은 정보까지 다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것은 잠재적으로 나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종이위에 존재하는 법적인 인간 즉 법인인 것이다. 법인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처럼 거래를 한다. 법인과 인간의 주요한 차이는 법인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정보를 전부 공개할 수 있고 따라서 진짜 인간보다 신용을 쌓기가 좋다는 것이다. 법인은 자기가 돈을 얼마를 가졌고 어떻게 썼고 어떤 거래를 해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전부 공개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외부인사에게 감사도 받는다. 아니 법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법인을 설립하고 법인끼리 거래를 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거래는 개인간의 거래보다 훨씬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신용이 보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유의 경제가 화제가 되는 요즘 한국에서 협동조합의 설립이 화제가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공유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투명성과 신용의 문제를 협동조합을 설립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때 애매한 기억력과 인간적 감성 즉 개인적 윤리에 의존하는 공동체가 되는것이 아니라 책임과 권한이 비교적 분명하여 자신을 지키면서도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법인의 문제이전에도 사회적인 의미에서 개인이라는 존재의 시작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의 권리, 개인의 의무, 개인적 소유라는 개인으로서의 행동이 없이 개인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자각이 일어난 것은 사회가 하나하나의 인간을 그렇게 자각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눈 뜬 것도 근대 국가가 작동하기 위해 경제적 법적 책임과 권리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개념이 교육되고 선전되어 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 개인은 이제 법인으로 확대된다. 개인이라는 개념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신용문제의 범위 이상의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터넷과 무선통신이 확장된 시대인 21세기는 그 안에서 인터넷 정체성 즉 인터넷 아이디가 보다 확장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즉 우리는 사이버 정체성을 만들고 그것을 운영하면서도 그 사이버 정체성과 자신을 어느정도 분리해서 운영하게 될 것이다. 즉 법인이 그렇게 하듯이 인터넷 아이디가 독립해서 서로 대화하고 거래하는 경제적 활동을 하게 되는 시대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했을 때 법인의 신용은 그 법인의 소유자들의 신용과는 다르다. 계약의 당사자가 개인인가 법인인가에 따라 그 계약의 성공과 실패로 인해 생기는 결과도 달라지게 된다. 아마도 법인 시대 이전을 살던 사람들은 법인의 이야기를 하면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 모른다. 법인같은 오직 종이위에 존재하는 허깨비를 믿고 어떻게 사업을 하냐고. 법인따위 내세웠다가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도망가면 나는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현대인이라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보증이 빌게이츠의 보증보다 믿음직하다고 믿을 것이고 삼성의 보증이 이건희의 보증보다 믿음직하다고 믿을것이다. 법인은 그냥 도망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 법인이 소유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옥션거래를 통한 중고거래가 활발하지 않은듯하지만 일본의 인터넷 옥션사이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중고나 새 물건을 내다 팔고 있다. 그런 거래를 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은 그 거래를 하는 아이디의 과거 이력이다. 옥션거래도 결국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어떻게 보내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게 된다. 옥션사이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아이디의 과거 평가를 기록하고 공개한다. 그 기록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고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사기를 쳐서 그 아이디의 신용을 붕괴시킨다면 그 아이디의 소유자는 피해를 입게 된다. 사람들이 거래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다른 아이디를 만들어 내가 사실은 저 유명한 어떤 아이디였다고 말해도 같은 효과를 보기는 쉽지 않다. 실로 컴퓨터 아이디 자체는 마치 상표나 독자적 생물처럼 스스로 자라나서 자신의 이력과 신용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거래가 증가할 수록 공유의 토대는 점점 굳건해 지고 사람들은 자연인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사이버공간에서의 아이디를 하나 혹은 하나 이상 소유하고 그 신용을 관리해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들은 각각 하나의 인간처럼 각자의 신용을 쌓아나갈 것이다. 반대로 다수의 인간이 하나의 인터넷 아디를 공유하는 쪽이 경쟁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버인간들간의 거래가 활발해지고 그 사이버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 사회가 시대가 온다면 그런 사회는 지금의 사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이미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 아이디를 수십개 수백개씩 가지고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체성이 가지는 신용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나 아이디가 가지는 신용과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이 가지는 신용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인터넷 아이디를 수없이 만들고 그것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사실은 여러 사이트들이 각자 회원제를 유지하면서 한가지 사이버 아이디가 여러 사이트에서 통하게 만드는 일도 아직은 널리 행해지고 있지는 않다. 사이버 아이디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법률적 정리도 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오직 네트웍위에서만 존재하는 인터넷 인격인 인터넷 아이디만 믿고 어떻게 거래를 하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런 행동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변화는 시간문제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구글이 만든 세계에서 구글 아이디로 살던가 애플이 만든 세계에서 애플의 아이디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의 사이버 아이디가 사이트를 넘나들며 존재하고 그 신용을 기록에 남기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법인들이 활보하는 시대에 개인으로서만 경제활동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용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신용은 오늘날 사실 돈 그 자체다. 신용의 문제를 해결한 법인들이 서로 활발히 거래를 하면서 신용을 점점 쌓아나가면 그 쌓여진 신용은 그 자체가 돈이 된다.
 
내가 돈을 지불한 선불카드를 쓰면 나는 그 순간 신용에 기반하여 선불카드회사와 함께 돈을 허공에서 만들어 낸 것이 된다. 왜냐면 내가 지불한 돈은 회사의 손에 그대로 있는데 내 손에는 아직 쓰지 않은 선불카드가 또 있기 때문이다. 법인과 법인들이 서로를 신용해서 대출서비스를 한다면 그들도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법인의 시대에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작은 신용을 가지고 뒤에서 허덕이는 동안에 법인들이 허공에서 엄청난 돈을 만들어 내면 그들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가난해 진다. 만약에 어떤 사이버머니만으로 그 안에서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사이버 아이디들의 생활공동체가 사이버 공간에 생긴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이미 비트코인 같은 것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보고 있다. 이미 인터넷 통화가 국가당국에서 논할 정도의 규모로 자라날 토대가 갖춰진 것이다. 비트코인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시도가 있을 것이다. 아무 것에나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추세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은 산업혁명시대에 양키우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될지 모른다. 
 
사이버 아이디가 신용의 주체로서 신용을 발생시키는 시대가 오게 된다면 그 새로운 공유의 시대에 사이버 아이디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사람이나 사이버 아이디와 자기 자신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남들은 만원주고 타는 자동차를 자신만 5만원씩 주고 타는 일이 벌어진다. 일이 본격화 되면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고 실질적으로 시대에 뒤진 사람들은 거의 약탈당하는 수준으로 경제적으로 뒤쳐질 수 있다.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다. 시대가 공유의 경제가 확장되는 시대라면 그것에 동참하지 않고 뒤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회, 그런 국가에게는 그 댓가가 따라오게 될 것이다.
 
맺는 말
 
공유의 경제는 낡고도 새로운 게임이다. 그것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 낼수 있다. 내 생각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거라고 생각된다. 아니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고 앞으로 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스마트폰 어플중에는 배달음식에 관한 앱이 있다. 이 앱은 어느 지역에 가면 현재위치를 확인하고 자동적으로 그 주변의 배달음식점을 검색해서 보여주며 각각의 배달음식점에는 이전 사용자들의 평가가 붙어있다. 자신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각 음식점들의 이름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인터넷 아이디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고자 할때 호텔닷컴 같은 어플을 쓰면 그 지역의 호텔들이 가격과 평점 순서대로 죽 나열된다. 그것은 매우 편리하고 또한 각 호텔에 대한 사용기가 다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호텔을 찾는다. 거기에서 나열된 순서에서 뒤로 쳐지는 호텔들은 사실상 거의 죽은 호텔처럼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름들을 보지도 못한다. 호텔예약은 그 순서의 위에서부터 차서 내려갈 것이다. 위로 올라가려면 신용을 가진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유명블로거나 신문 컬럼리스트의 추천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파워블로거의 횡포같은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자면 예로 부터 평판이라는 것이 중요했었다. 그러나 요즘에 그 평판이라는 것에서 사이버 평판이 가지는 중요성은 점점 압도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말이다. 현실공간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세워진 광고판이나 신문광고, 티비 방송 사이사이에 나오는 광고 따위는 점점 시대에 뒤진 것이 되고 있다. 그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소비자가 그 소비를 원하는 그 순간에 앞에 나타나는 정보 즉 인터넷 검색을 통한 정보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예들은 공유경제가 금새 매우 편리한 게임이 될거라는 것도 말해준다. 당신이 남과 공유한 것은 모두 기록에 남고 자선행위가 되는게 아니라 크고 작게 당신에게 포인트같은 형식이나 신용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내가 공유하고 싶은 물건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실시간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느 지역에 가면 자동적으로 공유를 허락할 자전거의 위치가 내 스마트폰에 뜨고 내가 그것을 사용하면 자동적으로 댓가가 지불되고 그 자전거의 소유자는 댓가를 받는 식의 서비스는 물론 신용문제만 처리되면 가능하다. 각자의 집에서 노는 방을 원할 때마다 하루씩 대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시대에 우리가 독점적으로 소유해야 할 것들의 양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새로운 사업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개념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게아니다. 단지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일 수 있다. 어디선가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한걸음 두걸음씩 지금도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고, 더 열광적으로 참여할 수록 그 게임은 더 강력한 것으로 성장할 것이다. 오늘날은 법인이 지배하는 시장의 세계가 가장 강력한 게임중의 하나다. 지금은 공유경제가 그저 작은 소수자 게임이지만 미래에는 사이버 인격체가 활보하는 공유의 경제라는 게임이 주류 시장게임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게 되지 않을 까. 아니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게임도 유일한 게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게임은 여전히 공존할 것이다. 다만 공유경제는 우리를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전에는 돈을 내고 써야 했던 것이 거의 공짜로 변하는 것을 보게 해줄 것이다. 스마트기기를 쓰는 사람들이 이미 자주 느끼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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