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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미디어 게임

by 격암(강국진) 2016. 12. 11.

16.12.11

어떤 사람이 어떤 평가를 받는가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에 크게 달려 있다. 축구스타는 대개 축구경기장에서만 스타다. 입시학원에서 우수하다고 해서 장사를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심지어 학문적 연구를 할 때도 대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 게임의 법칙이 무엇인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잊기 쉽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떤 관습이나 환경에 매우 익숙해져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선택과 가정을 전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이것이 유일무이한 현실이라고 믿게 되곤 한다. 사실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권장되는 일도 많다. 예를 들어 입시생은 성적 지상주의에 빠지기 쉽고 주변에서도 그걸 권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축구선수는 마치 축구가 지상 유일무이의 가치를 가진 것처럼 축구에 몰입할 것이 권장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빠져서는 그와 다른 세상을 종종 잊어버린다. 자기가 따뜻한 집에 살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이 비싼 명품을 사고 팔 때면 누구나 그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자기가 권력을 휘두르고 학벌을 자랑할 때면 마치 누구나 그정도의 권력과 학벌은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게임과 그 게임의 승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주어진 미디어 환경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쉽지만 모든 미디어는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식에 적절한 사람이나 뉴스가 그 미디어에서는 대단해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개인이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방법이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대자보를 써붙이는 방법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특정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것이어서 예를 들어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대자보에 써서 발표할 수는 없었다.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컨텐츠가 추천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티비나 라디오뿐만 아니라 신문도 잡지도 매우 한정적인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니 추천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권력싸움과 왜곡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대중들은 관심없어 하는 문학만이 상을 받는 경우가 생기거나 이렇다할 학벌이라도 있어야 글을 실어준다거나 하는 식이 되기 쉬운 것이다. 티비나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미디어는 자기 관점을 점차로 강화해 나간다. 미디어가 큰 돈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결과물을 내놓으면 그 미디어 생산물은 이제 실패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관점을 더 퍼뜨리려고 하고, 강화한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 그 미디어를 무능하게 만들어도 이 일은 계속된다.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기가 힘들고 오직 경쟁하는 미디어가 등장하고 위협이 있을 때만 변화한다. 좋은 예가 공중파방송이 오랜간 독점적 지위를 유지한 일이다. 최근에 종편과 케이블 방송의 약진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어야만 컨텐츠 제작은 바뀌기 시작한다. 

 

인터넷은 진정으로 새로운 미디어 였다. 인터넷통신시대가 시작되자 미디어 게임의 법칙은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수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자기 의견을 발표하기가 전과는 비할 수 없이 쉬워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아마추어 논객과 작가가 등장했으며 그 중에는 엽기적인 그녀처럼 영화화된 소설을 쓴 사람도 있고 미네르바처럼 국회에서 논의가 될 정도의 유명세를 떨친 사람도 있었다. 만화시장도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웹튠작가가 되는 것과 대본소 만화시절에 만화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실 지금의 인기 웹튠 중에는 그 그림체의 수준이 전에는 도저히 출판결정이 내려지지 못했을 것만 같은 것들도 있다. 그만큼 미디어의 지배구조가 달라졌고 그 환경이 요구하는 인재의 스타일도 승자와 패자의 모습도 달라졌다. 인터넷은 그 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다 보여주지 못한 채 아직도 발전중이라는 점에서 라디오나 텔레비전, 잡지같은 미디어와는 다르다. 

 

미디어도 하나의 산업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세간에서 말하는 1차에서 4차산업혁명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1차 산업혁명이란 기계의 힘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을 말한다. 통산 증기기관의 등장을 말하지만 미디어쪽을 말하자면 금속활자의 등장쯤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2차 산업혁명이란 분업에 따른 대량생산을 말한다. 헨리포드의 컨베이어 벨트가 이를 대표한다. 미디어도 물론 이 시대에 하나의 분업화된 공장을 이뤄서 거대화되고 전국에 배포망을 가지고 싼 제품을 파는 미디어가 등장할 수 있었다. 큰 신문회사나 출판사의 발전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은 자동화를 말한다. 컴퓨터의 등장이후 공장자동화가 이뤄졌었다. 미디어의 경우는  라디오나 텔레비젼같은 멀티미디어 기계가 보편화된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기계의 보편화와 동시에 미디어의 어떤 기능이 자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쓰는 것을 상당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직접 목소리로 들려주고 그림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찍어오면 대중이 모두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지는 4차산업혁명이란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강력한 정보통신망을 통해서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장과 공장은 더 강력하게 결합하고 소비자가 주문하는 것이  동시에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시대 즉 소비자와 생산자의 구분이 점점 작아지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제 기업은 일방적으로 내가 이러저러한 상품을 만들테니 좋은지 나쁜지 생각해 보고 구매하라는 식이 아니라 소비자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소비자중의 어떤 사람은 회사의 중요한 일부로 끌어들이는 일을 하게 된다. 애플이 앱시장을 개방하고 그 앱시장의 활성화를 통해 애플 종업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애플 스마트폰을 고리로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었던 것이 한가지 좋은 예다. 

 

요즘은 미디어 게임의 게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전에는 미디어 게임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디어의 소비자인 시청자나 신문 구독자들은 이따금 독자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고 신문 잡지 구독을 그만하거나 특정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높이거나 낮출 수는 있었지만 미디어의 생산에 매우 한정적이고 느리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요즘은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미디어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구독자가 때로 가장 인기있는 미디어 생산물의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2년의 대선운동전후를 생각해 보자. 그 당시에는 여러 정치 사회 게시판들이 있었는데 그 게시판들은 대중에게 활짝 열려있어서 대중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이야말로 소비자와 생산자가 거의 구분이 없는 미디어였다. 요즘도 그런 게시판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자신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로 참여하고 때로는 인기있는 필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너무나 열려 있었기 때문에 금방 같은 문제를 겪고는 했다. 말하자면 게임의 법칙이 너무 단순했다. 누구나 글을 평등하게 올리는 게시판은 그 게시판을 지배하기 위해 도배를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여서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에 의해 흥망성쇠를 겪고는 했다. 어떤 게시판이 인기를 얻는가 하면 그 인기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꼭 조직적으로 게시판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되면 정성스런 글을 올려도 그 글은 쓰레기 같이 양산되는 글들에 의해 밀렸으므로 정성스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정성스레 글을 쓰는 보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매체는 금방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 진화의 핵심적 내용중 두가지는 비중립성과 대문글 시스템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집자가 게시판의 글들을 선택하거나 독자의 추천수에 따라 대문글들이 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되면 정성스런 글이 어느 정도 댓가를 받게 되므로 정성스런 글을 쓰는 논객들이 주목을 받기 쉬운 상황이 된다. 국회에서 까지 논의된 미네르바나 진중권 같은 유명 논객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런 환경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글쓰기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또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비중립성이다. 어떠한 전제가 없이 보편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는 글쓰기는 지나치게 소모적이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사이트가 마련된다던가 게임이나 취미등 어떤 특정 문화를 기본으로 깔고 사이트가 만들어 지면 이런 문제가 크게 줄어 든다. 이제 사람들은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기본 공감을 갖추게 된다. 보편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위해 글을 쓰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혹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니 이에 공감하는 사람은 같이 소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신경쓸 필요없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런 사이트들이 여러개 생기고 흥망성쇠를 해가다 보면 구심력을 유지할 수 있는 사이트들만이 살아남는 식이다. 

 

이러한 것은 인터넷에서는 채널을 가지고 다툴 필요가 훨씬 적기 때문에 가능하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훨씬 빠르게 연결해 주기 때문에 심지어 사회적으로 소수파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미디어도 발달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티비나 신문의 경우는 이것이 훨씬 어려웠다. 운영비가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인터넷 미디어는 계속 발달한다. 요즘은 팟캐스트가 대중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팟캐스트는 이전의 게시판 글쓰기와는 몇가지가 다르다. 첫째로 그것은 보다 조직화되고 규모를 가진 미디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집에서 혼자 동영상을 찍고 음성파일을 만들어 방송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정도 투자로는 멀티미디어 환경이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여러 전문가들이 동시에 참여해야만 경쟁력이 있는 방송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둘째로 그것은 게시판에 글을 쓰는 논객이 가져야 할 재능과는 다른 재능을 더 많이 요구한다. 논객의 글도 어떤 의미에서는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목소리나 화면은 훨씬 더 감각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대본을 가지고 읽는다고 해도 그걸 누가 읽는가에 따라 전달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그런 멀티미디어 환경은 보다 상호작용하는 부분을 강하게 요구한다. 공중파방송의 예능프로그램들이 보여주듯이 대본없는 드라마를 만들어 내려면 주어진 환경에서 임기응변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스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쌍방향 상호작용이라는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참여를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미디어 게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간혹보면 인터넷을 이용한 미디어를 그저 공중파 방송을 인터넷 채널을 통해서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방송국을 차려놓고 자신이 KBS나 MBC 사장이나 직원이 된 것같은 만족감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옳지가 않다. 오히려 깊게 참조해야 할 것은 위에서 말한 애플의 앱시장 개방같은 것이고 스타 논객을 탄생시켰던 게시판들이다. 방송도 대본없는 예능의 시대이고 경연프로그램의 시대가 아닌가. 사람들은 소비자였거나 무명이었던 사람들도 미디어의 스타. 미디어의 생산자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생태계를 원한다. 일방적으로 유명인을 섭외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게 아니라 말이다. 

 

아프리카 티비나 유튜브에는 이미 새로운 스타들이 있고 그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가능한 생태계는 그것말고도 또 많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SNS도 새로운 게임중의 하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하나의 작은 방송국으로 회사는 사람들을 쉽게 자기 방송을 할 수 있게 생태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소셜네트워크에서 영향력을 늘리는데 있어 중요한 점중의 하나도 상호작용이다. 

 

요즘 시국을 지배하고 있는 촛불집회도 하나의 게임으로 그 형식을 분석할 수 있다. 촛불집회의 대표적 형식은 바로 촛불이다. 그것은 당연히 평화집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화행사를 하는 일도 이제는 거의 관례가 되어 촛불집회는 일종의 문화제처럼 되었다. 이런 전통이 쌓여 가면서 촛불집회에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축구를 하러 가거나 콘서트에 가는 것처럼 무슨 행사에 가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게 뭔지 안다는 것, 그 게임의 법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불안감을 줄여준다. 또한 그 게임의 법칙을 어기려는 사람들을 자체적으로 제약하는 힘을 발생시킨다. 촛불집회에서도 과격파들이 몇몇 있었지만 경찰보다 시민들에 의해 먼저 그들이 제지당했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촛불집회의 시공간적 제약에도 익숙하다. 광화문 앞의 차도를 걸을 수는 있지만 아무 도로나 점거하고 걸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목욕탕에서는 벌거 벗고 걸을 수 있지만 거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촛불집회가 행해지는 시공간속으로 들어가면서 게임은 시작되고 게임이 끝나면 그들은 다른 게임이 행해지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패턴이 분명할 수록 촛불집회의 참여율은 올라갈 수 있고 그 힘은 더 강력해 질 것이다. 

 

쌍방향 상호작용이 강조되면서 미디어와 다른 게임과의 구분은 더욱 적어졌다. 예를 들어 소셜네트워크나 촛불집회는 모두 게임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두 미디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자기를 표현하고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미디어 게임인 것이다. 

 

아직도 구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게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훨씬 느리고 이미 결과가 정해져 버린 게임을 계속하려 한다. 특히 소통과 상호작용이 없는 게임을 말이다. 그들을 이기는 방법은 그들의 게임판에서 게임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게임을 구상하고 출발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4차산업혁명의 시대이며 게임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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