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6
인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한가지 중요한 태도의 변화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순서대로 순종의 시대, 발견의 시대, 혁명의 시대 그리고 게임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있었던 순종의 시대에서 이 세계는 신의 통치하에 있었던 곳으로 파악되었다. 모든 것을 창조한 것도 신이고 그것을 소유한 것도 신이며 이 세상이 이러저러하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모두 신의 의지라고 여겨졌다. 인간은 이 신의 의지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순종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심리이다.
그리고 발견의 시대 혹은 법칙의 시대가 온다. 이 시대는 반드시 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을 거의 혹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신은 이제 법칙으로 바뀌게 된다. 그 법칙을 만든 것은 신이지만 한번 만들어진 법칙은 신조차도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실질적으로는 법의 통치를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 내는 것이었다.
발견의 시대는 순종의 시대에 비해서는 인간 중심적이지만 아직은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다. 법칙을 발견할 이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의미는 커졌지만 여젼히 그 법칙은 그저 주어진 것이고 수동적으로 그 법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뉴튼이 중력법칙을 발견한 것이지 중력에게 이러저러하게 작동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듯 인간은 그저 관찰하는 존재다. 그리고 관찰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발견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바로 과학자였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찾아내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발견의 시대를 넘어서자 바로 혁명의 시대가 온다. 혁명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마르크스다. 혁명의 시대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이상 수동적으로 통치받아야 하는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 과거의 규칙은 폐지되거나 바뀔 수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발견의 시대다. 물론 이는 인간이 가지는 의미가 훨씬 더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의 책무가 된 것이다. 인간은 비로소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게 되었다.
이런 발견의 시대도 게임의 시대로 대체되고 있다. 순종의 시대에서 발견의 시대까지 기본적으로 가정되었던 것은 이 세계가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즉 법칙이 주어지건 우리가 만들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하나 뿐이다. 반면에 게임의 시대는 수없이 많은 게임의 공간들이 자치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는 그런 게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모자이크다. 말하자면 농구도 있고 축구도 있으며 야구도 있는 것이 스포츠의 세계이지 올바른 스포츠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계라고 파악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 사회의 개혁과 혁명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반대로 오늘날 그런 혁명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기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단일한 법칙에 지배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게임의 경계에 주목하면서 여러개의 게임들이 때로는 병렬적으로 때로는 수직적으로 분포하는 세계에 살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사회에서 절반의 사람들은 공화정에 살고 절반의 사람들은 봉건왕조국가에 산다던가 그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하루의 몇시간은 공화국 시민으로 살고 다른 시간은 봉건왕조국가에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것은 당연히 백년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명의 인간과 그 인간의 권리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법인이 등장하기 전에는 사업이 파산하면 그것에 대해 그 사업주는 무한책임을 졌던 것이다. 그러나 법인이 등장하자 이제 인간과 사업체가 분리되고 제한된 룰이 지배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주식을 통해 회사를 소유하는 인간들은 유한한 책임만을 진다.
이같은 변화는 계속 이어져서 온라인 게임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기괴한 싸움을 만든다. 한 여성은 온라인 게임을 하는 남편이 그 게임속에서 사이버 결혼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다. 그녀는 이것을 불륜으로 여기고 화를 냈지만 남성은 이것은 게임의 세계속의 일이므로 불륜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더욱 더 기괴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이버 결혼의 상대는 온라인 공간속에서는 여성을 연기했지만 실제로는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같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파편화내지 게임화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난 성추행도 오프라인 세상에서 사법처리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누군가는 그 세계는 그 세계의 규칙으로 지배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같은 의견은 아니며 그런 범주화, 파편화, 게임화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법인의 등장같은 예에서 보듯이 그런 변화가 가져오는 장점이 없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게임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봉건사회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어가는 변화에 저항하는 시대에 뒤진 사람일지도 모르며 이런 변화는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혁명의 시대와 게임의 시대의 가장 큰 차이는 혁명의 임계점이 게임의 시대에는 지극히 낮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대는 모두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임의 시대는 동의 하는 사람들의 참가만 있으면 모든 새로운 게임은 시작되어질 수있다. 그리고 만약 그 게임이 성공적이라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게임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트코인같은 코인경제가 얼마나 커졌는가를 생각해 보라. 통화통제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이다. 때문에 불과 10년전만 해도 암호화폐같은 것은 절대로 국가가 허락해 주지 않을 판타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암호화폐가 설사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비트코인같은 코인의 성공을 보면서 우리가 게임의 시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 암호화폐는 확실히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는 거의 시작도 해볼 수 없는 게임이 요즘은 세계적 규모로 실행을 해보고 실패 성공을 따진다.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게임의 시대에 도달했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시작하고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순종의 시대나 발견의 시대를 되돌아 보면 알 수 있는 한가지는 이런 변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답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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