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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게임의 이해

by 격암(강국진) 2014. 2. 11.

14.2.11

우리가 어느 날 눈을 떳더니 이 세상의 물리적 법칙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문장을 읽었을 때 보통 사람들은 꿈을 꾼다는 말이로군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게임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군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내게는 이런 반응이 게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느껴지며 이걸 근거로 생각했을 때 세상의 많은 일들을 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상과는 다른 법칙,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현실에서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게임의 본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절대적으로 옳은 게임의 정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게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뭔가 재미있는 것, 근사한 것을 발견할 수 없을까 하고 모색해 보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살인무기로 알고 있던 칼이 다른 문맥에서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듯이 어떤 문맥속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른 용도를 가진 것으로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게임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게임을 이런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 혹은 사건들이 사실상 게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콘서트를 생각해 보자.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떤 대중가수의 콘서트에 참석한다면 그들은 종종 티브이나 소설속에 등장할 것같은 콘서트의 장면을 연출한다. 즉 노래를 크게 따라부르거나 가수에게 열광하는 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그 가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콘서트는 가수와 관객으로 이뤄진 게임이다. 우리는 그 역할극 게임을 그저 즐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통상 콘서트는 종종 물리적으로 어떤 테두리를 가진 경우가 많다. 즉 콘서트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그 안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콘서트장에 들어간 사람은 그 안에서는 흥분한 광적인 팬처럼 행동해도 이상한 사람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 왜 그런가? 콘서트장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해요, 원래 콘서트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라는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 다른 규칙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콘서트장의 바깥에서 가지던 정체성에서 해방된다. 그런 해방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가 통상 전자오락같은 것을 게임이라고 할 때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유와 새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세상에서 게임이라고 불려야 할 것은 단순히 보드게임이나 온라인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우리가 공연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술의 한 형태로서 게임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참여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인 게임이긴 하지만 콘서트같이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존재하는 행사는 이미 예술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는 게임인 셈이다. 강연을 해본 사람은 안다. 강의나 강연도 청중과 함께 하는 게임이다. 심지어 영화를 영화관에서 다른 관객과 같이 본다는 행위도 관객들간의 상호작용이 영화의 실감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미술전시회도 그 전시실을 어떻게 꾸미고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미술을 감상하면서 상호작용하게 되는가에 따라 게임의 일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동제나 굿을 하는 행위도 참여가 그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고 보면 게임이다. 대중목욕탕이나 해변도 게임의 공간이다. 우리는 통상 벌거벗고 남의 앞에 서지 않는다. 그러나 특수한 공간, 특수한 상황에 이르면 여기서는 누구나 그렇게 해요, 그건 원래 그런거예요라는 말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게임의 본질인 현실과는 틀린 규칙을 나누는 선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폐쇄성을 가지고 그 바깥과 안에서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모든 것은 다 게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하여 회사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그 안에서 폐쇄성과 다른 규칙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게임이 되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산다면 우리는 그런 타국에서의 삶자체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미국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일본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우리는 정도차가 있을 뿐 다른 환경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한히 많은 것 거의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전부 게임으로 부르는 방종은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이것저것을 모두 아 이것도 게임이로군, 저것도 게임이로군하고 부름으로서 우리가 거기서 뭘하고 있는가에 대해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방종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고 사람들은 종종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나 회사에 다니는 것은 보드게임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학점을 나쁘게 받거나 봉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보드게임에 지는 것과는 그 결과의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현실’이지 게임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법하다. 그런 말들에 대해 대답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게임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이해를 깊게 하기위해서 방종을 즐기는 것은 이쯤하고 방향을 약간 틀어서 다른 주제로 돌아가야 겠다. 예를 들어 게임은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 가 그리고 게임은 왜 존재하는가, 게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와과 같은 질문이다.

 

콘서트는 콘서트장에 들어서면서 참여하게 되고 거기를 나오면서 참여가 끝나게 된다. 콘서트는 시작을 알리는 시작음과 함께 시작되며 컨서트가 끝났다는 선언과 함게 끝이난다. 그러나 진정한 게임의 시작은 그저 시작을 알리는 시작음과 함께 일 수가 없다. 그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게임의 목적과 그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드게임의 규칙도 모르는데 게임시작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게임이 시작되려면 참여자가 존재해야하고 그 참여자들이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콘서트 티켓은 하나도 팔리지 않을 것이다. 관객이 없이는 콘서트라는 게임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연의 기획자 혹은 주최측은 사람들에게 이 공연이 어떤 형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게임에 있어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대개 어떤 현실세계 안에서 혹은 하나의 문화권안에서 게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게임의 바깥쪽이 존재한다. 그 게임의 바깥쪽은 그 게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모두가 공분할 반인륜적인 게임이나 아예 불법적인 행사를 기획한다고 할 때 사회일반은 그런 게임이 존재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실이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킨다면, 즉 어떤 불만이나 억눌러진 욕망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게임이 필요없을 것이다. 즉 게임은 현실사회가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떤 부분에 대해 해방구를 마련하여 그 부분의 긴장과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게임은 그 혼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이라고 불리는 어떤 다른 게임에 대한 대안이나 보충요소로서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게임이 현실사회의 문제로 인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도 고대 로마의 검투사 시합이었을 것이다. 로마에는 한 때 물자가 부족하여 로마시민들이 굶주리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시민들의 불만은 크게 올라갔으나 그것이 사회전복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검투사시합이라는 게임을 계속 주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시민들은 거리에서 사람을 죽고 죽이는 혁명을 하는 대신에 사람이 죽는 시합이라는 게임에 참여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현실사회가 주는 모순의 누적을 해소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와같은 일은 고대국가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프로스포츠나 음란한 영화같은 것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현실이 주는 답답함을 해소하는 예는 가장 뻔한 예다. 현실사회는 법과 윤리로 어떤 것들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는 미워하는 이웃을 공격해서도 안되고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매혹적인 이성과 불륜을 마구 저질러서도 안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충동이 사람에 따라다르고 정도의 차가 있을뿐 개개의 사람들의 내부에 전혀 없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어떤 해방구에서 어떤 특수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예외를 인정받게 된다. 우리는 잔인하게 사람을 살인하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이종격투기 선수가 서로를 죽일것처럼 때리는 것에 환호하기도 하며 불륜이 마구 일어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도 한다. 나라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춤이나 사교모임이라는 형태로 남녀간에 존재하는 통상의 예절에 제한적으로 예외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도 대학생들이 가끔 남녀가 같이 참여하여 이런 저런 게임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내가 들은바에 의하면 그런 모임에서는 그저 이것은 게임이다라는 말을 선언하는 정도로도 남녀간의 접촉을 꺼리는 예절은 금새 무너지고 보통의 경우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쉽게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의 규칙이 주는 답답함과 모순의 누적을 해소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없이도 이것은 그저 게임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정도로도 사람들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이것은 그저 연기라는 말로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이성들의 키스나 스킨쉽이 받아들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전통 굿에 대한 이해도 할 수 있다. 오구라는 영화에서 잘 표현되고 있지만 마을에서 문제가 있을 때 굿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미신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나 어떤 현실에도 의식되건 의식되지 않건 즉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지지 않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건 형식이 있고 규칙이 있다. 그런데 그 형식이 그 공동체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 그 모순은 누적된다. 그것은 윤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빈부의 격차때문에 생기는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런 모순이 너무나 많이 누적되면 그 공동체는 비록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일지라도 와해되고 만다. 마치 땅을 파는데 맨손보다는 삽으로 파는 것이 좋지만 삽의 특정부위가 손의 특정부분을 긁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때 계속 삽을 쓰면 손이 너무나 많이 망가져서 삽을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삽을 쓰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하고 손을 치료한다. 왜냐면 문제점이 있더라도 항상 맨손으로 일을 하는것 보다는 삽이 좋기 때문이다. 굿이란 마을에서 어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을 해소하겠다는 규칙의 무효화를 의미한다. 굿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평상시와는 다른 게임을 하게 된다. 다른 식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 다른 식으로 재화를 소비한다. 따라서 굿을 통해서 사람들의 내적 불만은 다스려지고 상처는 치유된다. 그렇게 될 때 다시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굿이란 가장 예술적인 게임을 하려는 노력으로 이미 존재해 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과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여 대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예술적 표현을 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말하자면 굿을 미신이라고 비웃으면서 열심히 프로야구를 보거나 막장드라마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은 생각이 깊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임의 역할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할수 있는 것은 현실과 게임의 전복일 것이다. 이제까지는 현실에 대한 보충으로써 게임을 이야기해 왔지만 게임의 내부가 커지면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현실과 게임의 전복현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언제나 일어나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복고풍을 주장하는 테마파크를 걸으면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 몇십년전 혹은 몇백년전의 거리를 유지하거나 흉내낸 그런 마을에서 우리는 과거를 재현하는 게임을 즐긴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현실이며 과거의 것을 재현한 그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지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작은 실험적 게임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것이며 장사를 한다던가 물건을 만든다던가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긴다던가 하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작은 게임으로 생각되어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저 특이한 한무리의 사람들, 한무리의 오타구같은 별종들이 별 도움은 안되지만 그런 일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지금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이었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게임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인기를 얻고 그 유용성을 인정받아 확장되면서 현실을 압도하고 현실과 게임은 전복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과거를 게임으로 즐기고 우리가 가진 것을 현실로 인식하는 것이다. 공화국에 사는 사람에게는 왕정이 게임이지만 왕정을 사는 사람에게는 공화정이 게임이다.  이런 게임의 전복중에는 현실과 현실에 대한 보충재역할을 하던 부분이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상한 짓을 하던 사람들이 과학자였는데 이제 세상은 과학의 시대가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이 사람이 먹고사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는데 이제 농사를 짓어서 먹고 사는 사람쪽이 오히려 극소수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그저 재미삼아서 혹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텃밭을 일군다.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테지만 낚시가 그렇게 되었듯이 농사는 일종의 게임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게임은 혁명의 씨앗이며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현실을 인정하면서 작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게임이 충분히 성공적이었을 때 현실을 압도하게 되면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게임이라고 부를 것이고 무엇을 게임이 아니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게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뭔가를 게임으로 인식하고 불러보았을 때 우리가 전에 보지 못했던 뭔가를 새로이 느끼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실의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중독되어 몸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을 수 있다. 즉 몸은 신나게 달리기를 하고 춤을 추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머리는 나의 신분으로 보아 체신머리없이 땀을 흘려서는 안된다며 나는 땀흘리기를 욕망하지 않는다고 부정만 하고 있을 수 있다. 현실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그 욕망은 우울증이나 나쁜 건강이나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실패하는 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악귀를 몰아낼 굿판이 필요한 것이다. 그 굿판의 본질, 그 게임의 본질을 고민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가 억눌렀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현실의 여러측면이 보이게 될런지 모른다.

 

또한 이것이 사회가 변해가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한측면을 추구하기 보다는 참여자가 있을 만한 게임을 고민하는 일에 시간을 써야 것이다 게임은 특이한 사람의 해방구정도로만 남을지도 모르고 훗날 어쩌면 현실을 전복하여 현실이 게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게임의 전환과 게임의 출현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우리는 축구판에서 야구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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