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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세계

by 격암(강국진) 2013. 8. 13.

13.8.13

인간의 역사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과 왕권의 유지는 기본적으로 정보독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언어가 발달한다던가 대중에게 메세지를 전달할 매체가 발달하는 것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있으며 소통의 여러가지 형태중 음악이나 문학, 오페라나 영화 같은 예술과 상업적 작품들은 보다 더 눈에 띄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들이 이미 죽었다거나 죽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목격한다. 예를 들어 문학이 죽었다거나 영화가 죽었다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알리는 이런 표현들은 또한 낡은 매체가 전만큼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음번에 세상을 주도할 매체는 어떤 것일까. 미리 말하자면 나도 모른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그걸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글을 시작해 본다. 우리는 우선 과거의 세대교체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림에서 영화로의 변화

 

먼저 과거와 현재의 매체들이라고 할수 있는 그림과 영화를 생각해 보자. 현대인들에게 그림이란 영화와 연결시켜 생각할 일이 별로 없는 매체다. 그림이란 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유명한 대가의 이름과 함께 박제되어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림감상을 하지만 새로운 매체의 시대에 과거의 매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같은 방식으로 감상되지 않는다. 요즘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극장에 가고 티브이를 보는 것만큼 그림을 사거나 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언젠가 인상주의자들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문득 과거 시대에 있어서 그림이란 오늘날 우리가 영화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하게 되었다. 그림은 소설과 달리 직접적으로 우리가 익숙한 시각패턴을 이용해서 메세지와 체험을 전달한다. 신화적 사건을 그린 한장의 그림은 그 자체가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느낌을 전달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신화를 체험하게 한다. 다만 영화와는 달리 화가는 소리신호나 움직임은 없는 한장의 그림으로 메세지를 전달해야 한다. 기술적 발전이 미비했던 과거의 사람들은 그저 그림 한장의 형태로 뜻을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매체의 등장 이전에는 과거의 매체도 훌룡하게 일을 해내고 있었다. 마치 엠피쓰리 플레이어가 보편화되었지만 레코드판만을 쓰던 때에도 레코드판이 나름의 역할을 훌룡히 해냈던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대가들은 한장의 그림이라는 제약조건안에서도 명작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영화는 기술적 도움을 통해 종종 그림보다 더 강한 영향력를 대중에게 끼친다. 영화는 많은 그림들로 이뤄진다. 현대사진기술이 수없이 많은 그림들을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고 여러사람들이 협업을 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진기가 나오고 영화가 나오면서 그림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영화이전의 시대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기는 어려워졌다.

 

영화는 줄거리를 가지고 청각효과를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영화에 몰두하게 만든다. 만화도 줄거리를 가졌지만 영화는 그보다 더 한층 진보한 것이다. 시를 감상하는 것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대개 더 많은 감수성과 지식을 요구한다. 시란 아무래도 이야기보다 더 함축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며 따라서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훈련 그리고 경험이 필요할수 밖에 없다. 영화는 그림에 비하면 훨씬 다방면의 감각적 자극을 통해 이해를 떠먹여 주는 매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분 수십장의 그림이 지나가는 영화보다 그림한장의 가치가 낮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모든 소설보다 시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두줄의 시가 한두권의 책보다 많은 의미를 줄 수도 있는 것처럼 물론 한장의 그림이나 한장의 사진이 몇편의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때도 있다.

 

그것이 시이건 소설이건 오페라이건 고전음악이건 영화이건 모든 형태의 예술의 근본에는 내가 느끼는 것을 재현 한다는 의미에서의 매체적 역할이 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어떤 하나의 세계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체험하게 한다. 슬픈 재즈를 들으며 감상적이 되거나 폭력영화를 보면서 폭력의 간접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결국 형태는 수단이며 핵심은 어느 것이나 같다. 내가 느끼는 것, 상상한 것, 체험한 것을 네가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넘어서

 

그런데 영화가 요즘 한계를 보인다고 한다. 한국은 좀 예외적인 나라지만 왠지 그 영화가 그 영화같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해도 우리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읽는다. 소설이 그런 것처럼 당연히 미래에도 영화는 계속 만들어 질 것이다. 그러나 매체의 진화가 끝났으며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여 지금의 매체를 낡은 것으로 만드는 때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큰 착각일 것이다. 새로운 매체는 또 만들어 진다. 영화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일수 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매체는 무엇일까.

 

새로운 매체의 특징을 위해 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전자통신과 컴퓨터를 빼놓고서 새로운 매체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문학의 새로운 형태는 블로그의 형태로 이룩되고 있거나 이룩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블로그는 출판의 개념을 바꿨다. 블로그는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으로 책을 출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일기장에 혼자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과거에 출판한 작가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쓸 수가 있다. 아고라같은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글을 쓰면 그것이 때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읽는 글이 되기도 한다. 혼자서 쓴 글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통의 방식이 바뀌었을때 그 내용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마치 대화의 상대에 따라 대화내용이 바뀌듯이 말이다.

 

나는 새로운 매체는 개인화와 참여가 그 특징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림도 영화도 결국 전문가가 그리고 자본이나 권력이 후원해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물론 관람객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전해지는 메세지를 받기만 한다. 그런데 이게 바뀐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그런 매체를 하나 가지고 있다. 게임을 생각해 보자. 게임도 줄거리가 있고 그림이 있고 소리가 있다. 그런데 게임은 영화와 달리 관람객이 수동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이 곧 미래의 매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적어도 아직은 부족하다. 그것은 마치 영화초기 시대의 무성 활동사진을 가르켜 영화라고 단정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익숙한 영화는 여러가지 기법을 개발하여 사실성을 높인 것이다. 장면장면의 단순 나열이 저절로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편집을 다르게 한 영화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를 보면서 이것을 느낀다. 과연 진정한 미래 매체는 어떤 것일까.

 

새로운 매체

 

인기가 사그라든 프로젝트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세컨드라이프라는 게임이 큰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세컨드라이프는 가상현실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사실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심지어 그림도 마찬가지지만 세컨드라이프쯤 되면 이 말이 훨씬 더 구체성을 가진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새로운 매체의 핵심적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먼저 영화나 드라마도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나 감독이 만들어 낸 가상의 삶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지적해 보자. 제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이는 영화나 드라마도 심지어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도 그것은 제작자가 현실을 근사해서 만들어 낸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에 수동적으로 참여해서 그것을 체험한다.

 

새로운 매체는 우리가 각자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 새로운 매체의 핵심은 게임의 법칙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결과를 즐기기 보다는 게임의 법칙을 즐기면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 간다. 게임이 진정한 새로운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떤 게임의 법칙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현실화할 기술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과 같다. 아무게임이나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조잡한 카메라로 만든 영화가 명화를 이길수 없듯이 참여할 수 있게 만든 게임이기만 하면 그것이 옛날 매체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매체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 힘을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게임이 곧 새로운 매체라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도 일종의 게임이며 새로운 매체다. 온라인 상에서 새로운 규칙에 근거해서 서로를 강국진이라던가 김일성이라던가 부르지 않고 격암님이니 피투성이님이니 하고 부르며 관계를 만들때 그 관계는 새로운 사회의 시물레이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이스북같은 것도 트위터 같은 것도 우리는 게임으로 새로운 매체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문화적 윤리적 규칙을 도입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새로운 매체다. 노인이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윤리적 규칙을 배우게 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우리는 그것을 레미제라블을 읽거나 뮤지컬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감동받아 삶의 방식을 바꾼 이야기와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매체의 철학

 

새로운 매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전의 매체에 비해 개인화라던가 참여라던가 하는 철학적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똑같은 영화를 천만명이 보고 감동하는 오늘날의 문화상품소비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이렇게도 볼수 있다. 과거의 매체는 시건 소설이건 그림이건 영화건 일단 만들어지면 그대로 형태가 유지되어 작동하는 기계와 같았다.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10살짜리 꼬마이건 70대노인이건 그것은 묵묵히 자신의 내용을 그냥 풀어나간다. 반면에 새로운 매체는 규칙이 있을 뿐 구체적 형태가 없다. 축구의 룰이 곧 축구 경기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매체에서는 소비자가 생산자이며 스스로 참여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결정한다.

 

물론 정말로 형체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새로운 매체는 다만 그 진실된 모습을 한차원 위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매체는 그 실체를 문화와 게임의 법칙속에 가지고 있다. 같은 게임의 법칙은 다른 참여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거의 매체는 분석적이고 환원주의적이다.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 새로운 매체는 보다 통합적이고 전체적이다. 우리는 영화를 절반만 볼수도 있지만 게임의 법칙을 절반만 알고서는 게임을 전혀 시작해 볼수 없다. 영화의 내용이 일관성을 가지는 것에 실패하면 그저 재미없을 뿐이지만 일관성이 없는 게임의 법칙을 가지고는 게임자체가 성립되질 않는다.

 

이렇게 말해보자. 과거의 매체는 건물을 지어서 주는 것이라면 새로운 매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는 다른 중력법칙을 가진 세계를 창조한 다음에 그 안에서 살면서 우리가 직접 건물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뭘하든 자유가 있지만 자연의 법칙을 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의 무한정한 자유가 있는 것같지만 실은 그 세계가 만들어진 윤리적 문화적 형식적 기반속에 제약이 있다. 새로운 매체는 이러한 특징때문에 메타 매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만들어 지는 것은 소통되는 내용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지고 분배되는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안에서 그림을 보여줄 수 있듯이 메타매체는 그 안에서 영화를 보여주고 만들 수 있다. 메타매체는 그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매체의 일부로 쓴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를 능가하는 것이다. 메타매체는 잘만들어진다면 아주 크고 넓은 세상, 길을 잃을 것같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온라인게임 중독자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이미 확인한다.

 

누가 메타매체를 만드는가.

 

메타매체는 기술적 발전과 정신적 발전 두가지 다를 요구한다. 우리가 아직 그런 것을 이룩한 단계가 아니라서 아직은 메타매체의 시대가 제대로 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그게 뭔지 모두 알게 되는 시대가 될 때쯤이면 그런 혁명은 이미 다 일어난 후다. 혁명의 시대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무슨 변화가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변화를 인지할 개념자체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메타매체의 핵심은 게임의 법칙 혹은 세계관을 짜서 하나의 생태계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온라인게임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나아가 페이스북, 트위터 심지어 아이튠즈로 만들어 낸 애플 생태계에서도 본다.

 

게임의 세계관이 풍요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야 게임은 저절로 풀려나간다. 우리는 그 세계가 어떤 사람들로 이뤄져있고, 어떤 제약조건이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관의 기본이 틀리면 제아무리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을 넣어도 사람들은 그 세계에 붙어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컨드라이프같은 아이디어는 좋은 것이었지만 결국 지나치게 현실세계와 다를 것이 없는 복제품세계를 만든 것뿐이었다. 메타매체의 핵심은 새로운 세계관과 규칙과 문화를 상상해 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모범을 보여줘야 일은 빨리 진행될 것이다. 영화의 역사나 회화의 역사에서 여러천재가 했던 그 일들이 또 다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깊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천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진보가 필요하다. 영화감독은 카메라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매체도 기술적 진보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훗날에는 애플컴퓨터나 페이스북이 성공하는 과정은 내가보기엔 새로운 매체의 발전과정으로 소개될지 모른다. 최초의 과학자는 자기가 과학자인지 모를 것이고 최초의 영화감독은 자기가 영화감독인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의 창조자에 대해 이름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다.

 

기술적 진보는 폭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불과 20년전에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몰랐다. 유튜브 방송같은 것도 트위터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약간의 기술적 진보와 세계에 대한 상상력으로 어떤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준이 되고 있다. 스티브잡스도 마크 주커버그도 언젠가는 영화감독처럼 이해될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핵심은 그들이 그럴것이다라던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매체의 핵심을 이해하고 우리도 창조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시대에 민중가요가 한 역할은 컷다. 지금 애플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아니다. 끝일수가 없다. 우리가 지금 과거의 삐삐같은 것을 추억하듯 1-20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래 그런 유치한 시절도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새로운 미디어를 이해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에 크게 영향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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