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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예술과 게임

by 격암(강국진) 2014. 2. 10.

14.2.10

어떤 것이 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달려 있고 어떤 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을 만드는데 들어간 솜씨나 정성 이상으로 그것이 놓여지는 문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예를 들어 대개의 경우 아이들이 흙으로 만든 인형은 그야말로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만 어른이 만든 예수나 부처의 동상은 예술이 된다. 아이들이 별생각없이 만든 것은 대개 어떤 의미를 주지 않지만 예술가가 정성을 다해 만든 종교적 동상은 종교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대개 그런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때와 장소에서 만들어 지고 놓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나 소설 그림이나 조각이나 음악 그리고 영화등을 예술의 형태로 아는데 익숙하며 따라서 소설가나 음악가 영화감독들을 예술가로 생각하는데에도 익숙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들을 예술로 여기는 시대를 우리가 이미 지나왔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통상 예술로 인식되면 우리는 그것을 하는 사람을 예술가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생산하는 것을 그 사회의 최고의 지식인이 해야 마땅한 일로 인식하게 된다. 즉 그들의 작업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적어도 한때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최고의 지식인으로 알던 시대를 살았던 것이며 지금도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설하는 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우리를 바꿔줄 의미나 메세지를 전하는 예술작품이 만들어 지는 것을 목격해 왔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런 메세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인간의 사회가 더 복잡해지면서 더 많은 것을 표현하면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개인의 내적인 분열로 인해 생기는 고통이나 권태를 물리칠 방법이 요구됨에 따라 인간은 여러가지 예술활동을 벌이고 그를 해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앞선 두개의 글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적 형태로서 게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그림이나 음악에서 영화로 발전되어 온 흐름이 스스로를 더 확장하게 되어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이미 존재하는 예술적 형태가 오늘날의 세상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그 힘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즉 이야기의 생산과 그 힘이 가진 한계때문에 게임은 세상에서 점점 더 불어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떤 것이 예술의 새로운 형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예를 봐도 그렇듯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종류의 행동이나 작업이 하나도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음악이 대중적 예술의 한 형태라는 점은 오늘날 분명하지만 음악은 굳이 따지자면 인류의 시작부터 있었던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이는 정도는 다르지만 소설이나 역사, 시 그림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것이 주류적 예술의 형태로 인식되기 전에는 그런 행동이 개인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일어났으며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그런 행동에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즉 소설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소설을 하나의 예술이나 교양으로 생각하던 시대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나 누군가를 소설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현대의 눈으로 과거를 보면 자신이 소설이라는 예술의 형태를 가진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고 있었던 소설가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게임은 우리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놀이와 치유의 힘을 발휘해 왔다. 개나 원숭이도 동료들과 놀이를 한다. 그로 미루어 생각해 보자면 인류의 시작부터 게임은 우리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게임은 게임의 법칙과 게임안의 사물들 그리고 게임에 참가하는 참가자들로 이뤄진다. 즉 게임의 참가자들이 게임의 사물들을 게임의 법칙에 따라 사용하는 행위들이 게임이다. 예를 들어 야구나 축구 그리고 주사위놀이나 카드놀이등이 모두 게임이며 롤플레잉게임 같은 전자게임이나 정신적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심리역할극도 게임인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언어를 쓰는 사회적 활동도 게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등장하게 된다는 말은 게임이 이전에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상과 삶에 대한 중요한 가치를 표현하게 되는 일에 이름이 붙고 대중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런 대중화가 본격화 되기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 먼저 그런 일들이 퍼지게 될 것이다. 기술적인 발전이 부족한 초기의 실험적 상황에서는 그것은 물질적 시간적 대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예술이 된다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특이한 상상으로 들릴지 모른다. 게임이란 지금의 사회적 통념으로는 아이들이 지나치게 하는 것을 말려야 할 저속한 행위로 인식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예술의 다른 형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소설도 그 사회적 지위가 확실해 지기 전에는 저속한 상상을 적어내는 유치하고 불온한 놀이로만 생각되어졌을 것이다. 낙서나 음란한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을 처음부터 예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어떤 중대한 의미를 전달하게 되고 그런 역할에 대해 사회적인 인식이 확고해지면 화가는 가장 진취적이고 선도적인 지식인으로 인식되게 된다.

 

게임이 예술이 된다는 것은 과거 귀족이나 부유층이 오페라를 보러 가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배우고 행하는 것을 교양의 일부로 혹은 고상한 오락으로 생각했듯이 게임을 하는 것을 고상한 행위로, 우리가 뭔가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을 배우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앞에서 말한 심리역할극같은 것에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게 된다고 생각한다.

 

심리역할극은 심리치유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말하자면 배역을 적당히 정한 후 대본없이 즉석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으나 이러한 연극을 통해서 그 참가자가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다툼처럼 두사람간의 다툼이 있을 때 두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뒤집어서 연기하는 연극을 해보면 두사람은 상대방이 가지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그 다툼을 그만둘 수도 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비슷한 효과를 그런 상황을 노래한 음악이나 시나 소설이나 영화를 감상하면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개개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기존의 예술형식보다 더 깊은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 이런 심리역할극이다. 왜냐하면 어떤 고정된 상황을 모두가 꼭같이 간접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참여하여 자신의 상황에 맞는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런 심리역할극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게임의 한 싹으로 생각되어진다. 그것은 참가자가 있고 게임의 소도구라고 할 수 있는 사물이 있으며 또한 게임의 규칙이 있다. 앞에서 말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바꾼 극에서 참가자는 물론 며느리와 시어머니이고 게임의 소도구는 그런 연극을 위해 쓰이는 장소와 물건을 포함하고 나아가 연극의 일부가 되어줄 다른 연기인들을 포함한다. 게임의 법칙은 각자가 누구로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며느리는 자신이 시어머니가 아니라 며느리라는 것을 알지만 게임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시어머니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 즉 시어머니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게 된다. 

 

게임의 창작자가 해야할 일은 게임의 참여자가 따라야할 법칙을 정하고 게임에 필요한 사물을 정하는 일이다. 게임창작자가 그런 것을 잘 정할 때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으로 체험하기 어려운 어떤 의미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게임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보기위해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의 문화를 가진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게임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다.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게임의 참여자이며 그 게임의 법칙은 언어와 사회적 관습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등을 모두 포함한다. 게임의 사물에 해당하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진 자연환경까지를 포함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떠나서 외국에 가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쓰면서 살아본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하고 새로운 게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게임은 참여자로 하여금 즉 이 경우 외국에 살게 되는 그 이방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의무와 권한을 가졌는가에 대해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치 자신을 며느리로 생각하는 시어머니처럼 우리는 종종 외국에 나가서 전혀 다른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곤하는데 그것은 이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이런 외국생활을 통해 자기 나라에 대한 그리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외국을 여행한다는 행위를 통해 인간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게임을 통한 배움을 실천해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여행하고 여기저기에서 살아보는 일을 이미 부유한 국가의 젊은이들은 종종 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나는 앞에서 게임은 게임의 규칙과 게임안의 사물 그리고 참가자로 이뤄진다고 말했지만 그런 식의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며 무엇이 오늘날 혹은 가까운 미래의 사람들에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형태의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부족하다. 그 질문에 대한 최종적 답을 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약간이라도 더 구체적인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어떤 게임이 우리를 바꾸는 능력을 가졌는가, 어떤 게임이 대중화될 수 있는가, 어떤 게임이 우리 시대의 첨단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을 발휘하여 최고의 지성층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가끔씩 우리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때가 있다. 그러면서 게임을 하는 효과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훈련이라는 점을 느끼곤 했다. 게임에 몰입하면 심지어 어른도 게임때문에 흥분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만 어린 막내는 게임의 승패때문에 매우 실망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막내 아이에게 이 게임의 의미는 누군가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고 상기시켜 주곤했다. 즉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 완전히 젖어들지 않고 그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게임을 초월하게 되고 그 게임을 본래의 목적인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라는 것을 위해 활용하게 된다. 그래서 미묘하게 균형을 맞춰서 게임이 일방적이 되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을 막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인생은 게임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게임의 사회적 인상이 좋지 못해서 이 말은 그다지 멋지게 들리지 않겠지만 정해진 대본에 따르는 연극보다는 정해진 상황과 룰이 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택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 우리의 삶의 상황을 더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생이 게임이다라는 말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도 들릴테지만 그것은 반대로 우리가 인생의 표면적인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야기 일수도 있으며 나는 여기서 그것을 의미한다. 즉 표면적인 성패에 몰입되다 보면 우리는 인생을 더 높은 시야에서 바라 볼 수 없게 된다. 인생을 이기는 것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내아이에게 내가 말했듯이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게임바깥의 눈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는 작은 인생의 테두리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직 그렇게 할 때 현재의 게임에 충실하면서도 우리는 여러가지 사회적 관습이나 역사가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을수 있지 않을까?

 

사실 게임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일상의 눈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런 역할을 한다. 또한 스포츠가  교육에서 강조되어 왔던 이유는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이유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게임의 이런 부분을 잘 활용할 때 그것을 예술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에는 인터넷이나 가상현실기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의 융합이 필요할 지 모른다. 사진기술이 있고서야 영화라는 형태가 탄생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다른 형태의 예술도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술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융합에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이 사회라면 예술작품은 우리 코앞에서 우리눈에만 보이는 것을 벗어나서 사회전체를 조망하고 남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술로서의 게임이 구체적 형태를 띄고 활성화된다고 할 때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효과중의 하나는 사회적 안정과 융합의 정도가 아닌가 한다. 여기 어떤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하자. 이 마을은 어울려 게임을 하는데 아주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좀 더 안정적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클 수 있다. 마을 축제같은 것은 그런 게임의 형태가 아닐까. 보다 규모를 작게 해서 가족의 경우를 말해도 마찬가지다. 가족들끼리 게임을 하는 것은 그 가족의 행복을 증진 시킨다. 가족안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사회게임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게임을 하면서 가족은 서로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오히려 가족이라는 테두리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수천만명 수억명이 볼수 있다. 게임은 어떨까. 우리는 과연 수천만명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게임의 형태를 만들어 낼수 있는가. 그런 게임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진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럴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커다란 사건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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