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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게임과 경계

재미와 의미

by 격암(강국진) 2015. 10. 30.

2015.10.30

인생은 원래 무의미한거다, 의미같은거 인생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간단히 말해주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이 말에는 많은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에 따르자면 현대인이 삶이 무의미해지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라고 할 때 문제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전에 애초에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잘못했다는 거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가끔은 의미를 찾아 헤매고 그것을 찾을 수 없어서 우울해 한다. 그리고 특히 현대인의 삶의 모습은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매우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바위를 한 줄의 선에 의지해 매달아 놓은 모습이다. 그 줄이 끊어지면 그 바위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다. 과거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 싼 세상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를 들어 가족의 일원이다. 누군가의 자식이다. 또 당신은 어느 고장출신으로 무슨 면 무슨 리의 누구네집 아들인 것이다. 또 당신은 한국인 혹은 조선인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친족적 지역사회적 국가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강력한 의미를 가졌었다. 

 

이런 것이 약화된 것은 반드시 나쁜 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것을 학연이니 지연이니 혈연이니 하면서 비판한다. 그러나 또 좋기만한 것은 아니다. 이제 점점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대답할 길이 적어진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 많은 한국사람들에게는 이제 그 사람의 직업이 곧 그 자신의 정체성이다. 당신은 학생이다, 당신은 무슨 대기업의 사원이다, 당신은 경찰이거나 자영업자이거나 교수거나 야구선수다. 그게 전부다. 현대인은 고독하다. 현대인은 외롭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여러가닥의 줄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 때 당신은 그저 그냥 살 수 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살아는 질 것이니 내 하고 싶은대로 살겠다는 여유와 배짱을 부릴 수 있다. 그럴 때 당신은 자유롭게 자라나서 자신의 개성을 가지는 나무처럼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공포다. 이 줄마저 끊어지면 정신병원에 끌려갈 것같은 공포를 느낀다. 친구에게 뒤쳐지면 어떻게 될까? 취업을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은퇴를 하면 난 뭐가 되는 것일까? 그러니 그냥 살 수는 없다. 단순하게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그 한가닥의 줄에 결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빌딩과 빌딩사이에 놓인 좁은 다리위를 걷는 느낌이다. 평지에서는 쉽게 걸어도 그 위에서는 공포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뻔한 플라스틱 싸구려 트리처럼 개성이 없는 뻔한 모습이 된다. 

 

우리는 직업적 정체성에 자기를 모두 던지고 거기에 몰두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더더욱 그런데 그들은 좌절이 있을 때 그것을 견뎌낼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젊은이와 어린 학생들이 바로 이 사회적 약자들의 좋은 예다. 그들은 한국 사회로 부터 지속적인 교육을 받는다. 만약 당신이 사회적 인재되기라는 이 줄에서 이탈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 말은 누구도 자신이 그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죽는 수 밖에 없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자살하는 이유가 여기에 많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애초부터 존재적 위기에 있었다. 

 

어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가 즐겁고 노는 곳이 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그래서 학교를 재미없고 긴장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도 물론 어느정도는 어른의 진실이 있다. 그러나 학교에 재미가 없을 때 아이들의 삶은 위태로운 것이 된다. 전교1등은 1등을 계속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이고 1등을 못한 아이들은 1등이 아니라는 사실때문에, 1등은 커녕 중간도 안된다는 사실때문에 시커먼 구멍속으로 떨어지는 자기 자신을 느낀다. 어떤 어른들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와 도시락을 나눠먹는 것이 그 친구를 위한 일이 될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분위기는 떨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친구가 좌절하지만 내가 좌절하면 누가 잡아주겠는가? 내 성적밖에 안보는 부모가? 각자 자기 도시락만 먹는 아이들이? 남을 외면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외면당할 공포때문에 더 깊은 고독에 빠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재미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삶의 길이 있고 어느쪽이 나를 당기는가를 알려면 공포없이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자가 될 재능이 있는 아이라도 취업이나 취직걱정에 과학책을 보다보면 자기가 그걸 그냥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걸 좋아하는것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야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어떤 것에 몰두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아 내가 이걸 아주 좋아하는구나라고 실감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독이 있다. 그래서 칭찬도 독이 있다. 어떤 대학교수는 수학을 무지 재미없게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을 계속하는 사람만이 수학의 즐거움을 위해서 계속 수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진짜 수학전공자가 될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보면 국가에서 뭔가를 키우겠다면서 유혹하고 칭찬하고 일을 쉽게 만들어 보이게 하는 것에는 독이 있다. 많은 과학전람회는 과학을 완구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종종 더 많은 과학자, 더 훌룡한 과학자를 키워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과학자가 과학을 하는 것은 아주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견뎌내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만한 가치는 있다라고 말해주는 쪽이 좋을 수도 있다. 공부를 재미없게 가르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당근과 채찍이라는 발상이 애초에 틀렸다는 것이다. 당근도 채찍도 외부적인 것이다. 비현실적인 것이다. 진짜 재능이 있는 아이의 경우라면 너무 많은 당근과 채찍은 그 아이를 망칠 것이다. 자기를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인생에서 의미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말은 절대를 찾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의미는 어떤 테두리, 어떤 문맥에서 나오니 더 큰 테두리나 더 큰 문맥을 가지고 혹은 다른 테두리, 다른 문맥을 가지고 보면 비판되기 쉽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절대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믿고 사는 것은 현대적 환경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워낙 말이 많고 워낙 삶이 빨리 변하니까 그렇다. 

 

절대적 의미를 포기했다면 우리에게는 재미가 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철학도 대단한 사회적 업적이나 명성도 대단한 재산도 기본적으로 재미라는 차원에서 접근 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이 주말조기축구팀의 강력한 스트라이커라던가 만화 오타쿠라던가 여행사진찍기나 도보여행에 매달린다던가 어떤 음악에 미쳐있어서 음악을 하거나 혹은 음악을 열심히 듣는다는 것들에는 절대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재미를 느낄 때, 그것이 주는 임시적인 의미가 어떤 때는 당신의 생명을 구한다. 나는 누구누구의 음악이 아니었으면 10대를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들은 존재의 위기속에 있었고 그런 그들을 이 세상에 묶어 놓을 수 있던 것은 마음에 드는 음악뿐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모든 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쁘다. 우리는 그냥 살 수 없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뭔가가 되려고 안간힘을 다해 매달린다. 그건 재미가 있어서 몰두하는게 아니라 이 줄이 끊어지면 나는 죽으니 안간힘을 다해 이 줄을 더 튼튼하게 만들겠다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마음이 평안하지않고 공포에 쫒겨서 살 때 우리는 열심히 사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판단이 엉터리라서 그렇다. 편안한 마음으로 보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서는 아둥버둥대다가 그것을 진짜로 만들고, 고생고생해서 뭔가를 얻어놓고는 그걸 가볍게 한방에 날린다. 그러면서 열심히 산다고 자신을 평가한다. 그게 정말 열심히 사는 것일까?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 무의미라는 악마에게 쫒기면서 공포에 빠져 있을 뿐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던가 찾을 필요가 없다던가 하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멈춰서서 그걸 사색해 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일단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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