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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인테리어 쇼핑/음식과 가구,

오래가는 가게와 행복한 한국인

by 격암(강국진) 2014. 7. 17.

14.7.17

기분 좋은 가게가 몇개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마을을 사랑하게 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역전의 닭꼬치집이라던가 그릇가게라던가 호프집이라던가 스파게티집이라던가 내가 늘상 가서 책을 읽곤 하는 싸고 기분좋은 카페를 우리마을에서 지워버린다면 우리마을은 훨씬 더 쓸쓸한 곳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안타깝게도 우리의 가게문화 혹은 상거래 문화라는 것은 아직 개선 해야할 점이 많은 것같다. 자영업자 비율이 다른 어느나라보다 높다지만 치킨집이며 편의점이며 커피숍이 생겼는가 하면 얼마 못가 사라지고 만다. 한국 소득수준을 생각하면 음식값이 너무 비싼 경우도 있고 화려하게 장사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가게가 참 많다. 정을 붙일 틈이 없고, 가게가 조금씩 수정되어 더 좋은 가게로 발전할 틈도 없어 보인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게들이 마구 생기고 사라지면 새로운 가게를 즐길수 있고 경쟁이 심하니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시장주의적인 시각은 두가지 면에서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로 경쟁과 도태가 만병통치가 아니다. 즉 시장주의는 원래 진리가 아니다. 만약 인간들이 코앞의 이익만 바라보면서 경쟁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문명이전의 야만인으로 동굴생활을 할 것이다. 우리는 코앞의 내 이익만 보는 것을 멈추고 더 크고 넓게 보려고 한다. 그런 전망은 결국 질서를 가져오고 규칙을 가져온다.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니 공동체가 만들어 진다. 무한정의 경쟁이 아니니까 전문가도 생겨나고 예술도 번성한다. 잔혹한 무한 경쟁속에서는 좋은 가게가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소비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가게주인이고 종업원이기도 하다. 치킨집주인이 커피숍들이나 펜션이 자꾸 망해서 나한테는 좋다고 한다면 치킨집은 안 망한다는 말인가. 오래가는 식당이며 펜션이며 찻집이 많이 생기는 것, 좋은 상거래 문화가 정착되는 것은 모든 한국인의 행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물론 가게주인이 아니라도 그렇다. 오래가는 가게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아뭏튼 한국에는 오래가는 가게가 드물고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한국의 그 많은 마을, 지역, 도시가 기분좋은 가게들, 정이 가는 가게들을 가지지 못 한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그 모든 장소들이 그만큼 덜 살기좋고 덜 사랑스러운 곳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의 첫걸음은 우리가 뭔가를 너무 가볍게 보는데 있다. 우리는 장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피자굽는 법 몇달 배우고 닭튀기는 것 몇달배워서 가게를 열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 출혈 세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장사판은 너죽고 나살기의 더러운 판이 된다. 소비자들도 가게가 있어서 좋다면서도 좋은 가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적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소비자와 가게주인들 모두의 패배가 된다.  

 

장사는 복잡한 것이다. 장사라는 것은 여러가지 요소를 절충하여 만들어 내는 하나의 작품이다. 오래가는 가게는 응당 그 사회의 문화적 성취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가는 가게의 주인은 예술가이고 지역박물관의 관장인 것이다. 

 

상거래의 기본은 사고 파는 사람이 서로 뭘 사고 파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고 적어도 고민한다는 것이다. 

 

1. 당신이 어느 까페에 들어가 까페라떼를 하나 시켰다고 하자. 그걸 맛있게 마시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웹서핑을 좀 하다가 까페를 나왔다. 물론 우리는 돈을 냈다. 이런 일상적인 상황에서 우리와 카페주인은 도대체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판 것일까.

 

우리가 지불한 것에는 그 카페에 들인 인테리어 비용, 거기서 일하는 사람의 노동비용, 우리가 먹은 음식의 재료비에서 그런 공간을 쓰기 위한 공간대여비인 부동산 임대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단순화한 것에 불과하다. 인테리어를 위한 안목이라던가 서비스 하는 내용의 개발같은 것에 어떤 개발비를 지불해야 하는가 같은 것은 더 복잡한 문제다. 인건비를 어떻게 정산해야 하는가도 그렇다. 임금이 너무 낮고 직업안정성조차없다면 결국 높은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이 각각의 비용이 어떻게 가격에 기여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카페에 가서 커피 두잔을 마신 가격은 커피 한잔을 마신 가격의 두배여야 할 것같지만 커피의 원재료비가 얼마 들지 않아서 실은 카페에서 지불하는 비용의 대부분이 공간대여비용이었다면 1시간에 한잔을 마셨건 3잔을 마셨건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카페분위기와 호사스런 커피잔, 푹신한 소파, 에어콘 그리고 음악을 가진 그 공간을 1시간 점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피를 파는 곳 중에는 공짜로 커피를 다시 채워주는 곳이 있다. 카페가 공간을 파는지 커피를 파는지는 장사전략, 카페의 크기, 통상의 손님수 그리고 부동산 가격등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사실은 본격적으로 공간을 파는 가게도 있다. 멀티방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여러가지 시설을 해놓은 공간을 대여하고 시간에 비례하여 공간대여비를 받는 것이다. 그런 가게에서는 음료며 간식거리가 무한정 공짜인 곳도 있는 모양이다. 즉 정해진 시간안에 먹고 마시는 것은 공짜인 것이다.

 

카페는 커피를 팔고 멀티방은 공간을 판다. 카페에서 커피값내고 공간을 임대하거나 멀티방가서 공간비 내고 커피를 마신다면 거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대개 그런 손님은 매너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카페에서 커피 한잔시켜놓고 테이블을 차지해서는 오랜동안 공부하고 책을 봐서 가게가 다른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손님이 그렇고 멀티방가서 음료나 간식이 무한정 공짜라고 해서 말도 안되게 소비해 버리는 손님이 그렇다. 이렇게 되면 주인은 손해를 보게 된다. 

 

2. 오래전에 한국방송에서 일본에 있는 한국식당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걸 본 주변의 한국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너나할것없이 두가지 점을 지적하면서 혀를 찼는데 하나는 그 식당에서 접시에 담아주는 깍두기가 겨우 3개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작은 깍두기였다는 거였다. 두번째는 그 깍두기 한접시도 다 돈을 따로 받는다는 점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실로 쪼잔하다라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는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음식평론가의 글을 읽게 되었다. 다른 한국식당도 대개 그렇지만 한국에서 한정식집에 가면 반찬이 커다란 상을 가득 덮게 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다 먹지 못한다. 다 먹기는 커녕 비싼 한정식을 시키면 3분의 1도 먹지 못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중국사람은 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것을 호방하고 풍요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한끼에 몇만원씩 하는 음식을 시켰는데 반도 못먹으면 애초에 그 값의 절반만 받고 팔았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며, 이렇게 남아도는 음식을 혹시 다시 손님에게 내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에서 반찬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적어도 전에는 아주 흔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종류가 그렇게 많으니 질보다 양이 된다. 이건 전형적인 후진국형 식사다. 부자나라 사람들은 살빼는게 고민이다. 적절한 수의 반찬을 최고로 맛있게 만들어 먹을 만큼만 파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물론 먹은 만큼 돈을 내고 싶다. 어느 것이나 나쁘지는 않다고해도 그저 그럭저럭인 것을 돈낸게 아까워서 배터지게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각각의 음식을 최고로 잘만드는 맛집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에게 수십가지 반찬을 한꺼번에 제공하는 것은 대개 실패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전에 먹었던 최고의 집보다 못하니까. 한식집은 음식을 파는데 있어서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이게 한국식이라고 주장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 고민의 부족이 음식자체의 발달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뭘 사는지  뭘 파는지에 대해 혼동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나라건 외국이건 어디서나 피할수 없는 문제이며 종종 주인과 손님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서 해결되는 문제다. 문제는 이 암묵적 합의라는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고, 고의적으로 편한대로 해석하고 우기는 사람도 많으며 장사의 형태, 서비스의 형태가 다양해지다보니 뭐가 그 암묵적 합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역적 차이도 있다. 제주도에 원래 살던 사람이 기대하는 합의와 서울에서 이사간 사람이 기대하는 합의는 다를 수 있다. 물론 시골의 농촌노인이 기대하는 합의와 서울의 젊은이가 기대하는 합의는 더더욱 크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그 합의 또는 규칙을 손님이 모를 뿐만 아니라 아예 주인도 뭔지 모른다.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우리가 뭘 사고 파는 건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는 가게손님이나 가게주인이 기분을 상하거나 억울한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진다. 좋은 거래는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 가게를 하는 것도 소비를 하는 것도 윤리와 철학이 필요하다. 그래야 결국 좋은 가게를 오래오래 가지게 된다. 좋은 것을 싼 값에 먹게 된다.  서로간의 합의를 세련화하고 손님과 주인이 서로 지켜야할 예의에 익숙해 지는 것이 바로 상거래 문화를 발달 시키는 것이고 그런 바탕위에서만이 좋은 가게들이 나타나고 유지 될 수가 있다. 

 

상거래 문화의 발달이 미흡한데에는 한국 특유의 대충대충정신이 크게 기여하는 것같다. 원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하고 그를 바탕으로 규칙과 가격을 생각하고 거래를 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은 종종 별로 없어 보인다. 대충 판다. 덤을 팍팍주는 기분좋은 주인은 선을 약간만 넘어가면 덤같은 거 필요없는 사람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주인이 된다. 이는 한국에서 상거래의 역사가 짧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호텔이건 식당이건 어떤 규칙으로 거래를 해야 주인과 손님 모두가 만족할만한 거래가 되는 것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문화는 아무래도 시간속에서 쌓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문제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대충대충 정신말고 한탕주의 정신도 있다. 우리는 장사하는 사람을 장사치라고 부르며 낮은 신분으로 깔보는 편견도 없잖아 있다. 그러니 장사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할수만 있다면 장사안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대기업에 다니고 연구소에 다니면서도 할수만 있다면 카페나 라면집을 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즉 나는 이 가게를 죽을 때까지 할 것이며 죽고 나면 자식에게 물려줘서 대를 잇게 하겠다는 식의 정신은 한국에서 드믄 것이다. 식당주인들은 성공한 식당의 주인조차 대부분 내 자식에게는 이런 일 안시키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식당간판에 대한 애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게를 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한다기 보다는 먹고 살자니 하는 것이지 이런 건 사는게 아니다라는 식의 언행이 몸에 붙어 있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이런 정신이라면 거래의 혼돈으로 백원밖에 원가가 안들었지만 3천원에 팔아서 이문이 많이 남으면, 즉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바가지를 씌우게 되는 상황이되도 이대로 쭉 해서 부자되자고만 생각할 것이다. 밀가루 값이 올라도 가격을 못올리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내려도 가격을 안내리는 가게주인이 있다. 양심없고 규칙 생각 안하는 손님도 문제지만 주인도 손님과 가게가 공동의 이익을 만들고 그런 관계를 오래 오래 길게 이어가자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게주인들이 다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손님은 그러니까 최대한 빼낼건 빼내야 손해를 안본다고 생각하기 쉽다. 

 

말하자면 손님과 가게주인이 상호적 약탈관계다. 과연 그런 사회에 좋은 가게라는게 생길까? 모처럼 가게를 유지하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손님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손님과 가게의 관계를 길게 가져가려는 양심적인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그런 사람의 가게는 망할 것이다. 좋은 가게를 키워보려고 가게를 믿고 소비해주는 소비자가 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번번히 사기를 당할 것이다. 

 

거래란 파는 사람의 문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고 파는 사람으로 이뤄진 공동체의 문제다. 거래의 뿌리는 공동체정신이다.  50년된 우동집이나 돈까스집, 백년된 찻집이나 설렁탕집은 손님과 가게주인이 같이 만들어 낸 문화적 성취, 명작인 것이다. 

 

한국도 지역자치시대가 열린 이래 사방에서 지역축제를 한다. 그런데 그 지역축제라는 것은 대부분 보면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다는 말은 외부에서 손님 하나도 안와도 우리끼리 이러고 지내면 즐겁다라는 축제가 아니라 있는 것은 외부에서 손님을 끌어와서 그 손님의 돈을 빼내겟다는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좋은 장사라는 것은 공동체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역민들이 매일같이 매주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장사가 있다면 그들은 하루 이틀보고 헤어질 사람들이 아니니 그 장사는 바람직한 거래로 발전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뜨내기 외부 손님만 보고 만든 장사는 이 손님 언제 다시 올지 알수도 없고, 이걸 얼마받고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부족해서 서비스는 엉망이고 질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번 장사하고 나면 또 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다. 또 지역적 문화적 특색도 없이 아무거나 판다. 앞에서는 축제를 말했지만 모처럼 전국적 화제가 된 지방의 가게들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들, 뜨내기 손님 대상으로 하는 장사는 대개 겉만 번지르르하고 비싸다. 현지인들이 잘 가는 가게가 통상 가격대비 훨씬 훌룡하다.  

 

좋은 상거래는 공동체적 관계에 의해서 생기는데 그 공동체가 깨지거나 애초에 존재하질 않으면 거대 자본이 만든 체인점 같은 것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부당한 취급을 받으면서 미래를 걱정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체인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체인점도 좋은 가게가 될 수있다. 문제는 공생의 의식이 있는가하는 것과 독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돈의 논리에 쉽게 휘둘리고 전국적으로 영업하는 거대업체는 공동체 의식이 없고 독점적 상황을 쉽게 만들어 낸다. 일단 독점이 되어 버리면 그들은 종업원의 임금과 소비자들의 돈을 착취 할 것이다. 고용인들도 소비자들도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상거래 문화가 발전되지 못할 때 기회주의자나 큰 돈가진 사람이 잘먹고 잘살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사람은 허탈해 지기만 한다. 

 

나는 공부가 부족하지만 박원순같은 사람이 시도했던 아름다운 가게라던가 희망제작소의 사업들을 보면 가게를 만든다는 것이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서 듣게 된다. 공동체는 21세기 한국의 화두다. 마을만들기 사업의 핵심도 공동체복원이다. 사적인 공간을 넘어 공적인 차원에서 말할 때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는 가게다. 오래가는 가게가 없는 세상은 쓸쓸한 세상이다. 오래가는 가게가 바로 지속가능한 경제의 핵심이다. 경제거품의 시대가 끝이난 지금 어떻게 오래가는 가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 우리의 상거래 문화에 대한 고민의 문제는 한국인의 행복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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