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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프랭크 도나휴의 최후의 교수들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1. 14.

2015.1.14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영문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프랭크 도나휴가 2008년에 쓴 최후의 교수들을 읽었다. 나는 전부터 대학이나 교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오곤했는데 그런 생각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준 독서였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메세지는 1차적으로 제목에서 요약된다. 즉 교수라는 직종 자체가 지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도 교수라고 불리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교수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문학에서 더 그렇다고 스스로가 인문학 분야의 교수인 그는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소위 산업화때문이다. 그는 책 전체에 걸쳐서 어떻게 산업논리가 대학을 변화시키고 교수들을 단순하고 자율권이 없는 학원강사처럼 변화시키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문제의 핵심이 단순히 산업화에 있다는 생각 자체도 문제라고 말한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꾸준히 변해왔는데 그런 누적된 변화 자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은 교수나 강사들이 스스로에 가지는 이미지에서 표출된다. 즉 스스로를 노동자로 파악했을 때 그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한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화이트 컬러나 블루컬러 노동자들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초중고 교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대학과 이를 둘러싼 세상은 점점 더 큰 위선과 착취의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도너휴에 따르면 요즘 세상에 있다는 인문학의 위기같은 말은 착각이다. 사실 그런 변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이제와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도너휴는 책속에서 19세기의 미국대학이 겪은 의미 심장한 변화를 설명한다. 19세기에는 대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었고 대학의 1차적 목적은 목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대학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쓰는 과목을 가르쳤으며 미국 사람들은 대학에는 왜 가는 가하는 질문에 대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라는 답을 가장 많이 했다. 이제 그런 고전과목들은 대학에서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모르며 그들이 대학에 가는 이유는 취업하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대학은 앞으로도 변할 것이지만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과거와는 달라졌다. 

 

멸종위기에 처한 인문학교수들에게 도너휴는 두가지 조언을 한다. 그 조언들은 약간 애매하게 표현되었는데 내가 이해한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대학교육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과도한 기대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진행되고 있고 사람들은 공학이나 과학 회계 경영등 실용학과들이 취업이나 돈을 버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우리도 알고보면 돈버는데 쓸모가 있다'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돈과는 무관한 어떤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해서는 안된다. 도너휴는 한마디로 인문학은 돈을 버는데 쓸모도 없고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다만 인문학교수들은 대중의 착각에 대해 한가지 지적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당신들이 대학의 다른 비인문학과에 가면 돈을 벌거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대학교육이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학교육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알려야 한다. 이런 주장은 다소 어리둥절하게 들릴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두번째 조언을 설명한 후에 다시 정리해 말해 보겠다. 

 

도너휴의 두번째 주장은 대학노동의 실상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몇푼받지 못하면서 고강도의 노동착취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명예 따위에 빠져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인문학을 더 곤경에 처하게 한다. 

 

도너휴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내가 이 두개의 조언을 합치고 정리하여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이렇게 된다. 대학교육도 지금의 고등학교 교육처럼 되어야 한다. 대학교수도 고등학교 선생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고등학교 나온  것만으로 큰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이 사회의 지도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대학도 이미 그렇게 변했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등학교 교과목은 반드시 시장논리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윤리나 국어 영어과목처럼 인문학은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실상 지금 고등학교선생님보다 훨씬 열악하게 살고 있는 많은 박사들은 고등학교 선생님 정도의 직업적 안정성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특별한 인간이라는 허세만 희생하면 말이다. 

 

이게 놀랍게 들린다면 우리는 사실 한국에서 고등학교는 한때 대학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 귀하던 시절 고등학교 졸업생은 이미 지식인이었고 고등학교 교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평준화되었다. 설사 한국 최고 명문고를 나왔다고 해도 고졸생이 대졸생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제 세상의 지식이 더욱 더 축적되어 대학도 그렇게 될 차례가 된 것이다. 

 

도너휴가 묘사하는 대학과 교수의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종신재직권이다. 도너휴는 전체적 그림을 보면 종신재직권은 학자와 학문의 자유를 상징하는 지위에서 학자와 학문을 구속하는 상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핵심적 이유는 오늘날에에는 사실 교수가 학문적 이유로 사회와 불화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종신재직권은 20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 조차 정착되어지지 않았던 제도였다. 교수들은 정기적으로 재계약을 해서 그들의 위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재계약을 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조화로운 삶의 저자로 유명한 스코트 니어링같은 사람이 노동문제에 대해 언급한 이유로 대학에서 계약을 거부당하는 일같은 것이 생긴다. 즉 학자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와 불화하고 이로 인해서 대학에서 쫒겨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 당시만 해도 교수라는 지위에 있던 지식인들은 세상을 혁신하는 일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사회적 압력이 그들에게 가해졌다는 말이다. 이런 압력에서 교수들을 보호하고자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종신재직권이다. 

 

그런데 도너휴는 말한다. 아직도 많은 교수와 일반인들은 착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교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대부분의 교수는 사회적 개혁의 추진자가 아니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학문도 그것을 전공하는 전공자 몇몇을 제외하면 이 세상 사람 누구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그들의 학문과  주장때문에 그들의 교수자리가 위험해지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학문이 사회적 압력때문에 왜곡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제는 오히려 반대로 종신재직권을 따내기 위해 학교와 학자들은 학문을 왜곡한다. 평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학자를 끼워 맞추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학자가 학자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 종신재직권이었는데 이제는 종신재직권이 학자를 학자답지 못하게 만든다. 이제는 그것을 위해 평가가 학자의 기준을 만든다. 그래서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글들을 양산해서 어딘가에 출판하면 그것이 훌룡한 학자가 되는 것이 되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 진짜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이 훌룡한 학자가 아니라 그저  논문과 책을 많이 양산한 사람이 훌룡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들은 마치 학교선전에 쓰이기 위한 장식물같은 모습을 할 때도 있다. 

 

종신재직권이라는 당근을 아직 차지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교수나 교수지망생들은 노동착취의 현실에 시달린다. 대학원생은 박사받는게 소원이고 박사를 받으면 테뉴어(종신재직권) 트랙에 들어가고 싶고 테뉴어 트랙에 들어가면 종신재직권을 얻기위해 뛰어야 한다. 인문학전공학생도 불행한 위치에 있지만 공학도도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기업이 스스로 연구소를 차리지 않고 대학에 연구를 외주보내는 이유는 실은 노동력이 싸서다. 노예처럼 부려먹어도 불평하지 않는 대학원생이 있는 대학이 직원이 연구하는 연구소보다 돈이 훨씬 싸게 들기 때문이다. 이제 종신재직권은 노동착취를 위한 당근이 된 것이다. 

 

그나마 종신재직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남은 희망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다. 일찌감치 그런 경쟁에서 조차도 가망없어진 강사들은 아주 열악한 조건으로 강의를 이어간다. 보수도 형편없고 직업안정성도 없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대학교육이란 점점 더 그런 강사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대학교수란 점점 시간강사와 같은 말이 되어 간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대학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때 사람들은 아직도 망상에 빠져서 종신재직권을 가지거나 가지게 될 소수의 교수들의 권리에 대해 논하는 것이 대학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은 마치 이 나라 사람은 행복한가를 논하는데 왕의 음식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용문제로 대학이 점점 강사들이 강의하는 곳으로 변해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실은 압도적 대다수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불행하다. 그들의 학문도 우울하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기 보다는 절박한 출판압력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허세를 버린 대학은 그저 고등학교처럼 될 것이다. 이미 정보기술을 이용해서 대학졸업장을 양산하는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진짜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초청받는 곳은 따로 만들어 질 것이다. 그곳을 대학원이라 부를지 연구소라고 부를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사람들은 그 것을 기업이나 시민운동단체 같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문학공동체로 불릴지도 모르고 오타쿠들의 동아리처럼 불릴지도 모른다. 어찌되건 고등학교가 세상을 바꿔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 없는 것처럼 대학이 세상을 바꿔간다고는 세상은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꿔가는 그 곳은 한때 대학이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 될 것이며 대학의 이름이나 건물 혹은 커리큘럼따위가 아니라 그 기관에 있는 사람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개성을 가지고 서로 다를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대학이 그러는 것처럼 단순한 기준으로 평가되고 경쟁되지 않는다. 그곳은 한 때 대학이 그랬던 것처럼 작은 수도원이나 절의 공동체 같은 모습을 가질 것이다. 그 문화에 공감한 소수의 오타쿠가 참여하는 곳이다.  세상은 그런 곳에 의해 바뀐다. 

 

대학은 이미 그  길을 지나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미 많이 표준화되었고 대학의 개성도 죽어버렸다. 때문에 명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따지고 보면 공허하다. 대학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명문이나 비명문이나 같기 때문이다. 미식축구로 대학의 이름을 알리는 것도 공허하고 입학생들의 성적으로 대학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도 공허하다. 

 

더이상 대학은 세상을 개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진정한 혁신자가있다면 그들은 종종 대학 바깥에서 발견된다. 인문학자들이 모두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학문이라는 것도 더 이상 세상과 불화하지 않는다. 불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제한적인 가치만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이고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서 습관이 만들어 낸 환상을 제거하면 진짜 세상이 보일 것이다. 그 세상에서 대학은 더이상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지식인은 대개 우리가 보통 교수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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