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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로버트 퍼시그의 라일라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4. 9. 29.

2014.10.29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MM)의 저자, 로버트 퍼시그가 쓴 두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인 라일라를 읽었다. 이 책은 ZMM을 번역한 장경렬이 최근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그 번역이 훌룡할 것이라고 믿지만 나는 일단 영어로 읽었음을 밝히고 언제나 그렇지만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그 소감을 써둔다. 

 

 

이 책 라일라는 술집에서 만나 한동안 같이 여행을 하게 된 라일라라는 여자와의 이야기라는 뼈대에 저자가 전작 ZMM에서부터 설파하고 있는 질(quality)의 형이상학으로 본 윤리와 문화의 해석을 가져다가 붙인 것이다. 라일라는 이야기들의 구조측면에서 전작보다 그 결합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사실 그렇다. 아무래도 무명의 시절에 반평생을 걸쳐서 고군분투하던 자신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쓸 때와 작가로서 성공하고 자신의 삶을 안정된 기반에 올려놓은 후에 쓴 것은 차이가 있어서 인지 이야기의 긴장감의 정도에서 전작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또한 저자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어느 정도 동적이지 못하고 정적인데 그것은 이 책이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저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기 보다는 이미 만들어 낸 그 자신의 사고 방식의 연장과 적용을 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전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매력은 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에게 이런 단점은 사소한 것이다. 이런 책은 무협소설이나 애정소설을 즐기는 것처럼 오락과 시간 때우기로 읽는 것은 어차피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문제의식, 그의 질문이 무엇이고 그가 그런 질문을 답하는 방식에 우리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적 주제는 질의 형이상학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 윤리와 가치판단의 문제에 대해 어떤 면을 밝혀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철학의 문제란 결국 언어의 오류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저자가 질의 형이상학이란 것을 통해서 하고 있는 작업은 곰곰히 바라보면 언어의 재구성이다. 예를 들어 질량과 질량이 있는 것은 서로 당긴다는 중력법칙을 질량이 있는 것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긴다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객관적 과학법칙과 심리 사회 철학적 지식의 차이는 그저 말의 차이가 되고 객관적 물질을 다루는 분야와 사회적, 철학적 질서를 다르는 분야는 간격없이 이어진다. 기존의 말은 애초에 있지도 않은 차별과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의 재구성, 언어의 재구성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치유하는 것이다. 사실 형이상학이란게 본래 그렇다. 그것을 바꾼다고 해서 해가 거꾸로 뜨거나 하지 않는다. 있던 과학이 없어지지 않는다. 정해진 조건에서의 실험결과는 앞으로도 계속 같을 것이다. 하지만 훌룡한 형이상학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준다. 존재 하지 않고 필요없는 장벽은 없어지게 만든다.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고 이것은 결국 주로가 아니면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언어의 문제인가. 예를 들어 이 세상을 주관적 대상과 객관적 대상으로 나누는 언어의 문제다. 여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런 언어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주관적이 아니면 객관적인 것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음과 육체의 구분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전작에서 부터 이런 구분이 있기 전의 것을 가르켜 질 (quality)이라고 부르고 질의 형이상학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을 일원론적으로 볼 때 우리는 많은 미망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질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그냥 추상적인 말장난처럼 들리는데 이런 것이 철학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생활에 무슨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설사 질의 형이상학이 추상적인 말장난이며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통상 믿고 있는 생각도 그의 생각만큼이나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매우 추상적인 형이상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있다.

 

나는 형이상학따위는 몰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분자로 되어 있고 분자는 원자로 되어 있다 같은 말은 알 것이고 믿을 것이다. 그러면서 전자나 원자핵은 질의 형이상학이니 주관과 객관적 실체니 하는 것보다 훨씬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거기에는 어떤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나 원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질문이다. 양자효과가 등장하는 세계는 이미 우리가 일상에서 발전시키고 쓰는 통상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추상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는 온도라던가 크기같은 말에서 위치라던가 색깔이라던가 하는 말이 다 통하지 않는다. 전자를 노란색 탁구공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정확히 반반으로 나눌 수 있는 덩어리처럼 생각한다면 전혀 틀린 것이다. 그 절반이라는 것을 상상 할 수 없는 존재, 그 위치도 정확히 정의 될 수 없는 존재가 추상적이 아닐 수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종이 위에 쓰인 쉬뢰딩거 방정식만큼이나 추상적인 존재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쓴다. 그게 우리의 현재상태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고 무한히 튼튼한 토대위에 서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완전히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억하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 형이상학적 논의를 얼토당토않은 쓸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며 진지한 생각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알지도 못하는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을 그냥 받아들이고 산다고 인정하자. 하지만 그래도 나는 과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인데 내 일상에 복잡한 철학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걸 위해 여기 숲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당신은 이 숲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고 생각해 보자. 즉 당신은 약간의 시간과 돈만 들인다면 이런 숲쯤 금방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개발사업때문에 이 숲을 왕창 훼손하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할 것이다. 해보고 안되면 까짓거 다시 만들면 될거 아닌가. 그게 뭔지는 알고 있는데. 이런 태도가 언제나 틀린 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 숲에 대해 많이 알수록 이런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그 숲에서 어린 시절 내내 뛰어놀면서 그 숲의 구석구석을 수없이 본 사람은 오히려 이 숲이 일단 없어지면 그것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보존을 주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이 그걸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중의 하나는 주어진 숲에 대해 우리가 뭘 안다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가치 판단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언어는 기본적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는지 뭘 모르는지에 대한 믿음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우리의 가치판단, 우리의 결정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줄도 모르면서 그걸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건 이거니까. 그건 원래 이렇고, 그건 내가 다 아니까.

 

작가는 그의 질(quality)이라는 개념을 여러가지로 설명한다. 전작에서는 노자의 도와 그것을 비교했으며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quality란 우리가 뭔가를 개념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의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불교에서의 다르마 라는 개념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게 뭔가. 결국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이므로 나는 나의 말로 설명해 볼 수 밖에 없다. 나는 quality를 감각신호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감각신호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그 감각신호를 해석해서 그게 뭔가를 말하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감각신호란 물론 빛이나 소리같은 신호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게 아니다. 왜냐면 빛이니 소리니 하는 개념들은 이미 그걸 인식한 이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식하기 이전의 감각신호란 어떤 개념 이전의 것이다.

 

통상의 과학은 물질과 신호, 힘등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라는 형이상학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인식된 것이다. 그것을 누가 인식했는가라는 질문은 무시된다. 그래서 종종 과학에는 관찰자가 실종되어져 있다고 말해진다. 그렇지만 이제 그 이전의 문제 즉 이 세상은 결국 인식의 결과라는 것을 무시하지 말아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은 결국 자기의 뇌가 이 세상의 신호를 해석하여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이 부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이 부분에서 멈춰서서 우리가 뭘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가를 기억해 두자. 우선 인식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우리의 지식은 인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인식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내부적 조건에 따라서 감각신호를 해석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시광선만 통과하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에 자외선이나 적외선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그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설사 우리에게 뭔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로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기합리화와 자기 일관성의 세상을 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화시켜 가면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일단 그것을 보게 된 후에야 전에는 그게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질의 형이상학이든 감각신호의 형이상학이든 이런 사고가 지적하는 것은 거대한 공허, 무지, 불확실성의 존재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인 적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낸 것을 고정된 패턴을 통해 기억하지만 동시에 세상과 우리 자신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 낸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정적인 질과 동적인 질이다. 정적인 질은 우리가 체험하고 개념화해서 정리하고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동적인 질은 우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와 접하면서 우리의 무지를 깨어나가는 접촉면이며 창조의 공간과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들의 형이상학속에 무지와 공허, 불확실성을 품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유럽문화는 미국 문화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름의 기원은 바로 개척자시대에 인디언들과 접촉하고 살면서 야생화된 미국 카우보이들이 인디언 신비주의의 철학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말한다. 그가 인디언들과 마약성분의 약초를 쓰면서 체험했던 제례는 개념화를 통해 이거고 저거고를 따지는 문화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개념이전에서 느끼는 인디언의 문화였다. 서구인들은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지만 그 말들은 종종 그저 여러가지 개념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의미가 없다. 반면 인디언들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미있는 말을 던지고 문제에 직접 다가간다. 유럽의 철학적 시스템을 던져버리고 실용주의를 태동시켰던 미국은 개척자 시대에 그런 삶의 태도를 인디언에게서 배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다안다고 생각하는 문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인디언의 문화는 미국이라는 나라안에서 계속 싸워왔으며 톰소여와 허클베리핀의 형태로 문학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유럽의 문화는 차이를 강조하는 도시의 문화이며 계급의 문화이고 방어의 문화다. 반면에 인디언의 문화는 화합을 강조하는 시골의 문화이며 평등의 문화이고 겸손의 문화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인식하고 해석한다. 그렇게 하는 대상들 중에는 자신과 타인이 포함된다. 우리가 무지의 영역을 가진 새로운 형이상학을 근거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서로간의 차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미친 사람도 그냥 미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고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말하고 무시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영화관에 가거나 티브이를 보면서 그 안의 세계에 빠져서 낄낄 거리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와는 달리 퍼시그는 여기서 정적인 질과 동적인 질로 세상을 나누고 다시 정적인 질을 비유기체적-생명체적-사회적-지성적 단계로 나누는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단계는 바로 동적인 질이 체험을 통해 제공하는 정보가 정리되어져서 질서를 만들어 가는 진화적 과정으로 하나의 단계와 다른 단계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움직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통상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세포가 인간을 만든다는 생각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것으로 사회적 단계의 유기체는 그 나름의 방식을 통해 발전하고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는 특이한 주장을 하는데 바로 도덕이란 이 다른 차원의 것들이  충돌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욕구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억눌러 질수 있고 억눌러 져야 한다. 이것이 절대적 도덕이다. 그리고 사회적 욕구는 지성적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실패해서 사회적 필요가 개인의 욕구로 망가지거나 지성적 필요가 사회적 욕구로 망가지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범죄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내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의 세포 한둘이 망가지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를 구하기 위해 한 둘의 개인을 포기해야 한다. 지성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둘의 사회도 포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해석의 극단으로 가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도덕적 판단이 이런 식의 진화론적 질서구조에서 저절로 도출되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미는 문맥에서 나오고 문맥은 무한히 가능하다. 어떤 절대적 기준은 있을 수 없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자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그런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그 국가의 국민이라는 개념도 없는 사람에게 그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자명하지가 않다. 다시 말해 어떤 구조나 문맥도 자명하고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화론적인 정적 패턴의 정리와 그 질서간의 충돌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우리의 법과 윤리는 이런 진화론적인 환경 변화속에서 변해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고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을 진화적 변화과정의 결과로 보게 하고 그 진화과정의 이해를 추구하게 한다.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같은 수학적 정리가 수천년전부터 있어왔듯이 지성적 수준의 진리가 언제나 있어왔다고 생각한다. 즉 진리의 세계는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문맥에서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과학도 수학도 사회공동체의영향속에서 발전해온 것이고 지금 이순간 더더욱 빨라진 전자통신 같은 것들의 영향하에 범지구적 공동체가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범지구적 진리 즉 지성적 단계의 패턴이 자기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고 인식하는 어떤 질서와 관념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고 진화에 의해 새로이 생겨난 것이다. 

 

퍼시그는 사실 남북전쟁에서 1차세계대전 사이의 미국인을 빅토리안이라고 부르고 1차 세계대전이전까지는 사회라고 불리는 것 즉 지금 기준으로는 국지적 사회나 국가가 절대적 기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진리의 기준은 사회였던것이다. 그러다가 1차세계대전으로 비극이 싹트자 범지구적 지성차원의 질서가 등장해서 사회를 규제해야 한다는 쪽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보편의 지평이 달라진 것이다. 

 

사회가 뭔지 모르는 인간에게 모든 판단의 근거는 내 몸의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 살게 되면 보다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고 그 사회에 애착을 느끼며 그 사회가 그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이미지를 조작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단일한 사회나 국가는 이제 전지구적인 공동체 차원의 사고로 확대되어지고 있다. 그런 전지구적 공동체안에서의 질서를 지성적 단계로 해석할 때 전지구적 공동체와 국지적 국가 사회 공동체의 질서가 충돌하는 것이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전지구적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지성적 개념 즉 평등이나 자유 혹은 질의 형이상학 같은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장마가 오려고 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길이 질척거리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외치던 히피들같은 반항자들은 종종 오류를 저질렀다. 그들은 사회적 구조가 그들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옳았지만 그러한 사회적 구조를 그 사회를 초월하는 새로운 지성적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생물학적 자기를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적어도 그 두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사회적 억압을 거부하는 것이 다 옳다고 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사회의 구조가 단순히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동은 사회적 안정성만을 해칠뿐 대안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를 제약할 수 있는 지성적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피시그라는 작가 혹은 철학자의 최대의 장점은 그가 바로 철학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 질문이 뭐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답을 내놓는다.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삶을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형식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너무 쉬운 길을 택한다. 즉 남들의 이야기를 참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남이 닦아놓은 길을 생각없이 그냥 달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시그는 미술사학자가 미술에 대한 정보를 모으듯 철학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게 아니라 자신의 질문과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생각을 거듭해 간다. 그것이 진짜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답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 성실성을 나는 진짜 인간의 성실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라일라는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은 아니다. 나도 몇번이나 읽다가 중단한 기억이 있다. 그것을 기억하고 책을 읽으면 꼭 독후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 책을 읽기를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진지한 자기성찰과 자기수양이 너무나 쉽게 포기 되는 시대다. 우리는 무의미한 저항대신 더 큰 지성을 이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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