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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3. 13.

15.3.13

일본에서 한국에 돌아온 이사후 정착에 바쁜 어느날 그래도 도서관 구경은 해야겠다 싶어서 가까운 전북도청 도서관에 가서 회원등록을 했다. 나는 몇권의 책을 빌려 돌아왔는데 그것들은 한권의 전주 소개책자와 한권의 독일문학소개서 그리고 아트 슈피겔만의 쥐였다. 

 

 

만화책으로서 유일하게 퓰리쳐 상을 받았다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유태인 학살을 주제로 한다고 통상 말해진다. 나는 그다지 열광하면서 이 책을 집어들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이 엄청 유명한 만화를 부분부분 본적이 있었다. 게다가 유태인의 비극 이야기란 워낙 많이 들었던 지라 그다지 끌리는 주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비극은 많으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칭찬하는 이 책에 뭐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나를 붙잡았다. 

 

이러한 나의 입장때문인지 나를 이 책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유태인 학살이라는 주제가 아니라 독자의 바로 옆에 서있는 것같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작가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책 자체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등장인물들의 일상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유태인 학살사건이라는 주제를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데 도움이 된다. 결국 그 고난을 겪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작가나 작가 아버지의 일상에 대한 솔직하고 거침없는 묘사는 오히려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건 같은 엄청난 사건조차 그저 작자나 작자의 아버지의 내면을 묘사하기위한 작은 소도구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야기는 생각보다 짧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부분이 이 책을 위대한 책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결국 예술이 위대해 지는 것은 엄청난 사건을 그려서가 아니라 인간을 설득력있게 묘사했기 때문인 것이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묘사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비극을 겪은 사람은 세상에 많다. 비극은 흔하니까. 작가처럼 부모가 유태인 수용소를 체험하고 엄마가 일찍 자살해 버린 사람은 드물테지만 이런 저런 다른 종류의 비극은 또 많이 있다. 게다가 비극이란 본래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이 친구에게 불친절한 말을 듣고 눈물흘린 사건이 저기 바다 건너의 누군가가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었다더라라는 이야기보다 더 가슴이 아플 수도 있다. 

 

문제는 비극을 겪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는가에 있다. 체험과 그것의 묘사는 같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그림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가 모두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소화해내고 만들어 낸 창작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저 솔직하게 말하자는 것으로 솔직하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살게 된다. 이야기를 하려면 그 이야기를 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작자는 우리 아버지는 좀 무뚝뚝하다던가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참 간섭하기 좋아한다던가 하는 정도의 말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할 수도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비슷한 체험을 하면서도 그정도 밖에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말만 못하는게 아니라 사실 그 정도 밖에는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저러한 것들은 다 원래 그런 것이며 따라서 놀라울 것도 없고 특별히 길게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는데 말을 못하는게 아니라 사실 알지도 못한다. 남들이 들으면 기가막힐 엄청난 일을 겪어도 이것은 그럴 수 있다. 우리가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종종 착각이다. 

 

사람들은 보통 아트 슈피겔만의 쥐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그래 맞아 이거 대단하군, 참 별난 아버지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별남은 물론 그 아버지가 겪었던 유태인 수용소 사건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하며 극적인 사건의 결과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인과론을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 유태인 수용소를 겪은 모든 사람들이 작가의 아버지같은 것도 아니고 모든 아들들이 아트 슈피겔만 같은 것도 아니다. 

 

작가는 만화 안에서도 솔직한게 뭔지에 대해 고민한다고 고백한다. 그의 아내의 입을 빌려 그저 솔직하게 쓰세요라고 말하게 하고 그에 대해서 이 세상에 창작의 과정없는 당연한 솔직이란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솔직이란 그가 발견해 낸 솔직이다. 그리고 그 솔직의 주제는 세계도 역사도 아니고 자신 그리고 부자간의 관계다. 

 

작가가 이 책 쥐에 끼워넣은 지옥혹성의 죄수라는 만화는 그의 어머니의 자살에 대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그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사랑을 요청하는 어머니를 외면한 일화에 대해 쓴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자살은 그의 행동과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마지막으로 그는 어머니가 그를 영구히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고 말하는 고백을 한다. 그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했던 행동이나 그녀의 죽음이후 그가 실제로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묘사가 모두 사실이라도 이것은 하나의 창작이다. 사실들을 선택함으로써 그것들이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나열하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이전에 그의 부모가 다퉜다는 내용이나 그 아버지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별난 사람인가하는 내용을 삽입한다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게 들릴 것이다. 이제 그것은 아버지탓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솔직하게 말해서 솔직을 달성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걸 표현하고 기록할 때 자기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나 사람들 안의 어떤 것에 대한 선택적 묘사를 하고 때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쥐의 경우 그것은 부자관계 그리고 사랑과 행복에 대한 내적인 갈망과 갈등인 것으로 보인다.

 

2권을 합본으로 해서 출간된 이 책은 1권을 그리는데만 8년이 걸린 작가 일생일대의 작품이다. 작가가 작품을 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작가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 이 책을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때로 생각을 하고 느끼고 그리고 그것을 그림이나 글이나 조각이나 노래같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만듬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려고 한다. 자기가 그리거나 자기가 써놓고도 그 결과물을 보고 읽으면서 아 그래서 그랬던거군 하고 자기가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자기가 납득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 버둥대는 인간을 보았다. 이 작품이 감동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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