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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케이티 버틀러의 죽음을 원할 자유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4. 3.

15.4.3

먼저 아버지를 그리고나서 1년후 어머니를 잃은 케이티 버틀러는 2010년 뉴욕타임즈에 심박조율기는 어떻게 우리 가족의 삶을 망가뜨렸는가라는 기사를 싣는다. 그 기사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확장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것이 이 책 죽음을 원할 자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으로 부터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다. 결국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만 가득차서 살아가거나 죽음에 대해 차분히 사색하는 시간이 부족해진다. 죽음을 사색하는 일은 많은 가치가 있는 일인데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으로 아버지를 3개월전에 잃었다. 저자와 비슷한 체험을 했던 셈인데 한국과 미국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 책에 나오는 간병이라던가 의료시스템에 대한 고발 내지 고민에 대해 나는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대개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뭔지 알고 있을까? 우리가 죽음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시를 만들어 낸다. 그 과정을 간단히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죽음이란 삶이 멈춘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정의 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삶을 정의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우리가 죽음을 심장이 멈추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란 심장이 계속 뛰는 것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심장이 계속 뛰기만 하면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죽음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새 질문을 멈추게 만든다. 우리는 심장이 뛰기만 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케이티 버틀러가 계속 묻는 질문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심박조율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심장이 계속 뛰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녀의 아버지의 다른 부분은 망가져갔고 그 아버지를 둘러싼 가족들도 오랜 투병기간에 걸쳐 정신적 육체적 재정적으로 망가졌고 상처입었다. 그녀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있었던 것일까?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나아가 우리 문명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이란 그저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삶을 심장이 뛰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생각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삶이란 원래 이런거다라고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삶을 이야기로 파악해야 한다. 삶을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할 때 삶의 여러부분은 긴밀하게 관련성을 가진다. 길가에 구르는 나사하나는 고물이지만 그 나사가 자동차의 중요한 부분에 있을 때 그 자동차 전체만큼의 값어치가 있듯이 사물은 분리되어져 있을 때와 다 같이 생각할 때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또 무조건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쓸모없는 군더더기를 예술작품에 붙이면 그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저 오늘이 아니다 과거의 연장으로서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오늘 살아있는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삶을 그저 심장이 뛰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 하루의 삶을 그저 하루만큼의 밥을 더 먹는 것이나 하루 분량의 쾌락을 더 소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늘과 어제는 분리되어져 있다. 하루를 더 살면 무조건 하루만큼 이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최고의 걸작인 그림에 붓칠을 계속 더하는 것은 이득이 아니라 그림을 파괴하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하루만큼 더 심장이 뛰는 것이 꼭 사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 하루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은 잊혀지기 쉽다. 

 

이같은 것은 어느 정도 현대 자본주의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오늘날처럼 당연한 것이 아닐 때 죽음을 맞는 태도는 지금과 달랐다. 우리의 조상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대개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쌓여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그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이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지만 그들의 후손은 영원히 대를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순환을 통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이 삶의 계속이다. 

 

기독교를 믿던 서구의 옛사람들은 신이라는 고리를 통해 이야기의 영구적 지속을 믿을 수가 있었다. 우리의 삶은 신이라는 불멸의 존재를 통해서 영구해 지는 것이다. 때문에 죽음의 자리는 종교적인 자리가 된다. 이런 태도들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는 이야기의 붕괴로써의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옳았는가가 아니다.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들을 미개하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거울을 봐야 한다. 당신은 그저 음식을 똥으로 만드는 기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자랑할 만한 삶인가? 많은 현대인들에게 비해 그들은 의미와 가치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날 죽음의 침상에서 종종 무시되고 파괴되는 것은 이런 의미와 가치다. 환자는 의미있는 삶의 시간들을 희생해서는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한 고통은 본인의 고통일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족의 고통이기도 하다. 결국 환자는 자신의 종말을 무의미한 몸부림으로 만들고 자신이 아프기 전의 삶이 가졌던 의미조차 망가뜨리고 나서 후회스럽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  

 

전문화되고 복잡해진 현대의료는 모순적이다. 그것은 환자가 가장 아쉬워 하는 사랑을 줄 수있는 사람들을 환자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케이티 버틀러는 그의 부모가 죽어갈 때 이따금 그녀가 그녀의 사랑을 몸으로 글로 표현했던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이 그랬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하며 그녀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그녀가 더 많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박탈했던 사회적 관습, 의료적 관습을 비판한다. 우리가 죽어가는 방식에 대한 상식을 비판한다. 현대의학은 살아있다는 것을 그들나름대로 정의하고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살아있던 것일까? 

 

나 개인의 경험을 약간 덧붙이지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그저 몇번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한국의 관습에서 다 큰 남자들이 서로를 안아주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만약 당신의 부모님이 치유불가능한 병에 걸렸다면 기회가 있을 때 더 많이 안아 주라고 권해주고 싶다. 관습따위는 상관없다. 해보면 더 일찍 더 많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안아주는 것이 암을 치료하고 심장을 치료하지는 않는다고 과학적 마음은 말할테지만 그런 말에는 귀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효과도 크고 의미도 크다. 

 

의료전문화는 의사와 환자가 인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만든다. 즉 책임감도 없고 깊은 관찰도 하지 않는 기술자 같은 의료인이 컨베이어벨트 위의 부속처럼 자기앞으로 밀려온 환자를 쓱 보고는 정해진 메뉴얼대로 몇가지 처리를 하고 다시 환자를 어딘가로 보내버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체의 부분에 불과한 의료인들은 그 결과나 환자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식이 되기 쉬운 것이다. 기력이 없는 환자는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건강이 더 나빠지기 쉽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투병을 할 때도 지속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관심과 사랑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은 거의 없다. 그 병에 대한 분명하고도 간단한 치료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복잡한 의료절차속으로 환자를 던져넣는 것은 재정적으로 또 환자의 고통이나 건강측면에서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케이티 버틀러가 책에서 여러번 환자의 선택을 제한 하는 현실에 대해 지적하고 있듯이 정작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발생하면 시스템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환자를 빨아들인다. 아이나 부모가 혹은 자신이 죽을 병에 걸린 경우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란 가장 사치스러운 일이 된다. 죽을 병에 걸린다는 것은 물론 급박한 상황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고통스럽다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당장. 이러한 환자와 환자 가족의 마음가짐에, 분업화되고 상업화된 현대의 의료 시스템이 결합되면 종종 일들은 통제할 수 없게 빠르게 진행된다. 이것은 원래 그렇다. 이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자꾸 나온다. 그러나 급할 수록 차분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렵기는 하지만 급할 수록 잠깐을 외치고 일이 진행되는 것을 완전 정지시키고 사태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발뒤로 물러서는 것이 많은 손실을 예방해 준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이 책은 의료현실과 죽음에 대한 책 이상으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책은 본인과 부모의 관계 그리고 형제들의 태도와 그 결과들에 대해 많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인간을 부속품으로 만들고 소비하고 욕망하는 주체만 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시스템안에서 어느새 그런 것이 당연한 걸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성장하면 바빠서 부모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에서 인간은 소비하는 욕망을 달성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생각에 이르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생활의 파편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다. 이런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생활을 이루는데 그것이 큰 파국을 일으키는 장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자본주의는 죽음앞에서 당황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더 많은 소비가 무슨 소용있겠는가. 우리는 다시 슬그머니 의미라는 것에 대해, 의미를 가진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부품으로 열심히 돈을 벌고 노동하고 그리고 열심히 소비하는 인간은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한다. 나는 법과 메뉴얼과 관례를 따랐을 뿐이라고. 그런데 그 법과 메뉴얼과 관례는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일까. 케이티 버틀러가 보여준 세상은 거대한 자본이 로비를 하고 법을 만들고 윤리적 판단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그 세상은 죽음의 의미, 삶의 의미를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법적 윤리적 비난을 날린다.  자유를 빼앗아 간다. 그것은 살인이고 자살이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또 의료보험이 어떻게 의사를 보상하는가 하는 것은 환자가 누워있는 의료현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추상적 사고 끝에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의사에게 보상을 할 때 한시간동안 환자와 상담을 해준 것과 한시간동안 심박조절기를 장착한 것에 대해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 것인가. 답은 애매하고 항상 같지 않지만 일반적인 결론은 내려진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바로 의료현장의 관례를 만들어 낸다. 

 

케이티 버틀러 개인의 삶을 보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의 문명에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 하는 것이다. 내 삶, 내 부모, 내 가족이 중요하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될 수없다. 사랑과 가족과 죽음과 삶의 의미가 점점 더 흐릿해지거나 이미 알 수 없게 된 것이 오래전이라면 우리는 그녀같은 사람의 체험을 통해서 다시 자기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죽음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삶 자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언젠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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