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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4. 12.

15.4.12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라는 긴 제목의 이 책은 여러가지로 읽히는 책이다. 우선 이 책은 르네상스시대의 문학을 주제로 학위를 한 솔 프램튼의 몽테뉴 수상록 독후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풍부한 자료를 통해 몽테뉴의 시대를 소개해 주는 역사서나 문화기행기로 읽히기도 하며 몽테뉴의 전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이 옛 시대가 쇠약해지고 새로운 혁명이 본격화되기 전에 시대의 모순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리고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몽테뉴는 1533년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592년에 죽었다. 그는 38세의 나이때 아버지가 죽고 영지를 물려주자 영지에 있던 서재를 갖춘 작은 원형 건물에서 은둔하였으며 거기서 죽을 때까지 그가 에세라고 이름지은 책을 계속 쓰고 수정했다. 그는 사색과 글쓰기에 전념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결정적 계기는 그가 살던 시대에 만연하던 죽음이었다. 38세의 은둔이라니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른 것같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통상 30대에 죽곤 했기 때문에 그 역시 30대 중반을 넘기자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영지를 물려준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것은 물론 그가 가장 깊은 우정을 품었던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죽음에도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죽음과 우정에 대해 사색한다. 그의 슬픔을 지혜로 승화시킨다. 

 

그가 서있던 시대는 인쇄술이 보편화되고 루터의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불안해진 시대였다. 과거의 사상은 한계를 들어냈는데 아직 새로운 사상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과도기였던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갈라져서 싸웠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면 죽자고 싸우는 사람들도 그들간의 진짜 차이가 뭔지는 알수 없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시대였다. 이 시대는 대량학살이라는 뜻의 마서커라는 단어가 최초로 만들어진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 있어서 낡은 사상이란 바로 종교다. 면죄부를 돈받고 팔던 당대의 세속화된 종교는 이미 그 관습의 근거를 알 수 없는 미신처럼 보였고 영혼의 안식이나 평화로운 마음 혹은 진리추구보다는 그저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처럼 변했다. 그렇기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운동이 공감대를 얻고 시대를 뒤흔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구교냐 신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혼란 이후 데카르트를 거치고 과학의 시대가 열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혼란의 본질은 세상이 더이상 낡은 생각만으로 질서를 가지고 운영될 수 없을만큼 투명하고 복잡해 졌기 때문이었다. 출판문화의 발전이란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고 이건 결국 낡고 모순된 부패가 지적되기 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발전이 곧 혼란의 본질이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만해도 이 인쇄술의 발달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성경이 번역되고 출판되면서 일반인들도 성경에 대해 쉽게 알게 되었다. 루터의 95개조 발표가 유럽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인쇄술이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던 때문이다. 즉 정보처리기술의 발달로 지식은 빠르게 축적되고 보급되었으며 그만큼 사회는 복잡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에 비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시대적 정신은 낙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았다. 싸움이 났다. 전쟁으로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빠른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즉 총이나 대포따위의 발전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기계적으로 죽어나가는 전쟁이었다.  귀족들이 칼로만 싸우던 시대의 전쟁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서로에게 주는 피해의 정도를 조절하며 누가 죽을 것인가를 이성적으로 구분할 수 있던 느린 전쟁이었다. 다시말해 어느정도 인간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총이나 대포의 희생자는 특히 당시의 나쁜 정확도를 가진 총이나 대포로 죽는 것은 그냥 운이 나쁜 것같아 보였다. 즉 강력해진 기술과 빈약한 정신은 시대적 불확실성을 크게 만들었고 사람들을 크게 불안하게 했다.  

 

다시 죽음의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 이후의 과학시대로 돌아가보자. 따지고 보면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된 큰 이유가 바로 죽음의 문제다. 누군가가 살아있었는데 죽는다. 친족의 죽음 그리고 자기의 죽음은 큰 공포다. 그것을 느낀 인간은 왜를 묻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삶이 뭔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종교는 이런 질문에 대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답이다. 

 

몽테뉴가 친구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느꼈던 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몽테뉴 이전의 종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만들어 낸 이유였다. 그 방식은 소위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에 가깝다. 금욕과 수행을 통해서, 권위에 복종하고 규칙을 지키는 삶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경지 즉 아파테이아를 이루면 세상의 불확실성과 혼돈때문에 생기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한다. 심지어 가족이 죽어도 그것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상이란 그저 허깨비니까 그 안의 혼돈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삶과 죽음을 모두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종교 수행자들이 자신이 가야할 길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계를 느끼는 방식이기도 하다. 산중에서는 득도한 것같은데, 홀로 기도할 때는 부동의 경지에 오른 것같은데 시장바닥같은 세상에 오면 유혹의 힘이 너무 크다. 이래서는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될 수 없다. 

 

과학의 시대는 무엇을 성취했던가. 바로 법칙의 발견을 통해 절대적 확실성을 찾아나서는 돌파구를 발견한다. 이 세상은 허깨비같고 이유없이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신성한 절대적 법칙에 따라서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 세상에 대한 자세한 관찰은 우리를 법칙의 발견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우리에게 다시 확실성을 돌려준다. 뉴튼의 역학은 무수한 마법과 귀신들에 대한 해독제였다. 적어도 뉴튼에게는 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확실히 알려주는 발견이었다.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한 구원이었던 것이다. 근대과학이란 적어도 그 출발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널리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물질적 이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발견을 통한 영혼의 구원이나 마음의 평정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법칙을 계속 찾다보면 우리는 진짜 진리를 아는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것, 발전은 곧 영원한 행복의 시대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이 바로 과학의 시대의 약속이었다. 이제 진리가 밝혀지고 있으니 그것을 보급하기만 하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었다. 바로 계몽의 이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서있는 것일까? 우리는 전자통신과 컴퓨터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독교가 중세에 세속화되었듯이 과학은 더이상 영혼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득을 추구를 위한 것으로 세속화 되었다. 우리 시대는 바로 세계대전과 이데올로기 전쟁 이후의 세계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경제적 법칙을 실현하는 자유시장을 꿈꾸었지만 20세기사람들은 그런 희망을 버렸다. 계몽의 꿈은 깨어졌다. 일방적 진리의 보급으로 세상은 더 좋아지지 않는다. 더 빨리 발전하는 기술은 더욱 더 비인간적인 세계를 만들어 냈고 과학이 세계에 희망과 행복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많이 줄어들었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했지만 인류가 망해가는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문화물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상은 다시 불확실해졌다. 세상은 점점 로또복권뽑기놀이 같아졌다. 시대적 불확실때문에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투기적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종종 우리를 더 눈멀게 한다. 예를 들어 스토아주의적 삶이란 반드시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다. 그것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 지혜다. 다만 그 적용의 한계가 있는 지혜일 뿐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그것만 보게 만들면 그것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대적 불확실성에 대해 등돌리게 만들고 눈멀게 만든다. 바로 과학과 종교가 충돌했던 역사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세상이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데 낡은 종교적 태도는 그것을 무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과학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 지혜다. 그러나 그 힘이 무한하지는 않다. 과학이 인간을 더 어리석게 만들 수 있다는 예중의 하나는 스킨쉽의 중요성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통해 볼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이미 대단했던 20세기 초반만 해도 서양 과학자들은 부모가 아이를 안아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스스로 과학임을 말했던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이를 안아주고 스킨쉽을 하는 것은 성도착증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로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자체에 대한 이해도 크게 요동쳤다. 스키너의 실험이후 인간은 비둘기처럼 훈련하면 그대로 행동하는 기계처럼 이해되었다. 그러다가 스킨쉽이 없이 자라난 원숭이는 이상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스킨쉽은 다시 강조되게 된다.

 

물론 과학은 예나 지금이나 그 오류가 수정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뉴튼 역학이 수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뉴튼시대에 던진 공이 지금과 천양지차로 날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의 대상이 넓어지면서 결과와 적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 마음, 뇌에 대한 주장에 이르면 오류는 그정도가 아니다. 우리의 지금 주장과는 180도 다른 주장이 가까운 장래에 행해질 가능성은 아주 크다. 

 

이럴 때는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생각이 우리를 해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이전의 형이상학을 무시할 수 없고 주관적인 것을 제외하고 객관적인 것만으로 세상을 살 수가 없다. 종교건 과학이건 어느쪽을 무시하는 것도 맹목적이 되는 것도 문제다. 한계는 언제나 있고 우리의 무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뭔가를 안다는 생각이 우리를 영원한 장님으로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문제는 종교나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의 경계너머로 열리는 새로운 세계다. 

 

몽테뉴는 과거의 사람이지만 두개의 시대의 중간에 서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시대를 열었던 흐름 이전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해준다. 과학이 우리의 눈을 한쪽으로는 더 밝게 해주고 한쪽으로는 더 어둡게 만들기 이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을 통해 과거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확실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세상의 연구가 만들어 내는 확실성이 우리의 마음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심신으로 나누고 마음은 오히려 확실한 세상이라고 선언한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관찰, 유한한 관찰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연구해야 할 것은 세상인 셈이다. 그러나 몽테뉴의 해답은 좀 다르다. 몽테뉴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때문에 몽테뉴의 이야기는 마치 21세기 첨단 학문의 답처럼 들린다. 즉 마음이나 의식 혹은 인간관계의 연구인 것이다. 

 

몽테뉴는 독립적인 사상가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건 정말 그런 것인가라는 회의를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편견과 인식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 사색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 그의 글쓰기였다.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상이라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뭘 먹고 마시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우리는 뭘 생각하고 어떤 의자에 앉는가. 우리 집의 구조는 어떤가. 우리는 자연속에서 산책하는 삶을 가지고 있는가. 그가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에세의 서문에서 이 글은 그저 자기라는 것을 주제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라고 말한다. 그가 에세를 쓰는 과정이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었고 에세와 자기 자신과의 상호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인간적 접촉의 중요성, 인간과 인간사이의 거리가 가지는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그에게 있어서 시대적 문제에 대한 답은 안정적 인간 관계를 달성해 내는 것이었다고 솔 플램튼은 말한다. 그는 인생의 맛을 즐기고 느끼는 것을 강조했다. 밀그램은 복종실험을 통해 피실험자와 명령자 그리고 가학행위의 대상자의 거리가 결과를 크게 바꾼다는 것을 20세기에 알아냈다. 몽테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직접 대면의 중요성을 말한다. 일은 논리와 명분에 따라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거리가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혼란앞에 서있다. 전자통신과 컴퓨터의 발달로 지식의 양이 폭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핸드폰과 소셜네트워크 같은 것을 통해 매우 비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는 시대다. 그 만남은 편지를 쓰던 전보다 더 직접적인 멀티미디아적인 만남이기도 하다. 어쨌건 오늘날은 계몽보다 소통의 시대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보다 확실한 무언가를 알려고 한다. 인간사회를 더 안정된 기반위에 올려보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이어질 때 무언가 위대한 것이 성취되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 방법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에 매진하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뭔가를 더 알아내내는 세대가 아니라 소통을 통해 인간이 뭔지를 새로 정의하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후일 우리 시대는 새로운 인간이 만들어진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몽테뉴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답을 준다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각할 기회는 많이 준다. 정신적으로 우리가 어느 시대를 방황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해준다. 몽테뉴의 시대를 산책하고 사색의 길을 걷는데 솔 프램튼 같은 친절한 안내인이 붙으면 더 쾌적하고 즐겁게 그 길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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