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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통섭과 지적사기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5. 20.

15.5.20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은 2012년 말 중앙선데이에 지적사기와 통섭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한국에서 통섭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얻고 무분별하게 쓰이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서양에서 생긴 과학전쟁이라는 사건의 양상에 대한 거울이미지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다. 이인식 소장은 자신의 과학전쟁에 대한 글과 다른 필자들의 글들을 모아서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이 바로 통섭과 지적사기다.

 

 

과학전쟁이란 미국에서 한무리의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을 도입하는 포스트모던 이론가나 과학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논쟁을 말한다. 그 논쟁은 과학의 영역을 잠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자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공격으로 본격적이 되었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무식을 감정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되었기에 전쟁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가짜 논문을 통과시킨 소칼의 속임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통섭이란 월슨이 1998년에 펴낸 책을 2005년에 그의 제자인 최재천이 번역출판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월슨은 그의 책 통섭에서 여러 다른 학문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통섭이라는 말이 인기를 얻는 것은 인문학을 과학이 흡수통합할 수 있는 것으로 대중이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이므로 인문학자들도 이것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단점이 있다. 하나는 과학과 인문학의 논쟁에 대한 글이면서 모두 인문학 계열의 사람들의 글만 모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와 불교의 논쟁에 관한 책을 쓰면서 불교인의 글만 모아놓은 것과 같다. 때문에 한쪽이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타협점이란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이 책은 앞에 말한대로 통섭이란 말의 사용을 비판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졌지만 그 목표에는 잘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통섭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나 월슨의 학문통합에 대한 설득력있는 비판을 제공했다기 보다는 과학과 인문학의 충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주는 책으로 파악되었다. 이 것은 상당부분 이 책이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서 씌여진 것이 아니며 더구나 어떤 주제에 대한 글을 새로 기고받아서 모은 것도 아니라서 그렇다. 이 책은 여러 필자들이 여러 다른 장소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분량이나 가정하고 있는 독자층이 다 다르고 하나의 촛점에 글들이 모아져 있다는 느낌이 작다. 

 

그러나 이 책은 최신의 지적 논쟁을 제한적으로나마 입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과학과 인문학의 충돌에 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될 종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인문학과를 폐과하겠다는 곳이 나온다면, 혹은 물리학과나 수학과같은 기초 학과를 폐과하겠다고 한다면 이런 논쟁이나 통섭논의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이 보여주듯이 월슨식의 통합에 반대하는 인문학자들 조차도 학문간의 대화가 꼭 필요한 시대라는 것 즉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적 이해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이 책과 그걸 읽으면서 생각난 것에 대해 좀 더 쓰기 전에 우선 밝혀둘 것이 있다. 이 말들은 내가 쓸 글에 대해 나름의 선입견을 만들어 내겠지만 이 책에 대한 경우에는 말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첫째로 이 글을 쓰는 나는 과학자이지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한후 뇌과학 연구를 했었다.  둘째로 나는 통섭이란 단어의 의미가 애매하다거나 원효의 화쟁사상같은 것과 연관을 지어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지적들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또 여러 학문분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통섭같은 단어를 통해 하나로 만들어지기를 강요당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한다. 

 

그걸 전제하고 말하자면 우선 나는 많은 인문학전공자들이 과학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명한 사실을 고의로 무시하는 면이 한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의 엄밀성에 대한 것이다. 과학자란 세상의 사건들은 간단한 법칙의 결과로 일어난다라는 사실을 믿는 종교인 같은 존재다. 그것에 대해 환원주의라던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비판해도 좋다. 100층짜리 건물을 짓는 사람은 아직 그걸 짓지 못했어도 그걸 지을 수 있다고 믿기에 그 일을 하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간결한 설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핵심인 자연법칙을 매우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걸 찾아서 계속 시도하며 지독하게 성실하게 그걸 검증하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이 패러다임의 혁신을 통한 과학의 발전을 말한다고 해서 쿤이 중력법칙이나 목성의 궤도나 쉬뢰딩거방정식의 형태가 투표로 결정난다고 믿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과학자들간에 의견차이가 있고 과거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고 해서 즉 과학의 정설도 변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민주주의 투표하듯 과학법칙을 정하지는 않는다.  월슨식으로 말하면 과학자들은 모두 이오니아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믿음을 너무 쉽게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환원주의의 비판이라는 단어 몇개로 그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현대과학대신에 음양오행설이나 4원소설 따위를 부활시키는 행동을 하게 된다. 엄청나게 축적한 데이터와 엄청나게 정교한 관측을 위해 흘린 피땀을 책상앞의 공상정도와 비슷하게 여기게 된다. 서구사회가 지구전체를 주도하게 된 것은 과학문화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배후에는 간결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에 기반한 성실한 검증때문이다. 과학도 신화라고 부르는 것은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먼저 개개인 안의 신화는 얼마나 허약한 근거에 기반한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남인을 포함하는 이 책의 필자인 인문학자들이 월슨식의 통합을 비판하면서 인문학에는 과학적 방법이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인문학만의 영역이나 지식이 있다는 주장을 할 때 그걸 너무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뇌에 의해 창조 유지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뇌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인문학만의 영역에 대한 논증은 허약한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은 정신분석의 영역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울증 치료제가 나온 후 정신도 결국 상당부분 이런 약의 영향을 받는 것이 보였는데 말하자면 이런 가능성을 일찌감치 연구하나 마나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들이 싸우지 말고 우리 이정도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킵시다라고 타협안을 내놓다면 그들은 그러한 영역의 분할을 공평한 타협점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 타협점은 지나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마치 신은 유일하게 하나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다신론자가 가서 그래 공평하게 너의 신도 있다고 믿어줄게 나의 신도 있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것은 유일신을 믿는 신도에게는 전혀 공평한 타협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논쟁은 과학과 인문학의 본질이 뭔지를 따지는 본질논쟁으로 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어떤 영역의 분할이 옳은지, 과학자가 옳은지 인문학자가 옳은지를 따지는 것은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경계선은 계속 변해왔고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에는 인문학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말은 과학시대의 초기에 과학과 신학간의 공존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했었을 것같은 말처럼 들린다. 서구의 중세 신학자들이 신학은 신학이며 신학의 대상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하자. 이제와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몇명이나 신학책을 읽고 있으며 신학적 결과가 개인의 문제나 사회정책을 결정하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고 목적이고 쓸모다. 신학도 과학도 인문학도 어떤 질문에 답을 하는 다른 방식들이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질문들을 한다. 그 질문들에 잘 대답하는 쪽이 시대를 장악해 간다. 여기는 내 영역이라고 아무리 표시를 해놓아도 그 영역이 한없이 축소되어져 간다면 실질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 것인가? 신학은 신학의 답이 있고 과학은 과학의 답이 있으며 인문학은 인문학의 답이 있을 것이다. 그 답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답들이 점점 시대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고 점점 과학적 답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피나 심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신비한 것으로 마술과 같은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런 감성은 피나 심장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커지는 것과 함께 축소되어졌다. 뉴튼의 물리학은 수없이 많은 신비주의와 유령을 소멸시켰다. 유령이 진짜로 있건 없건 유령의 영역이 무시할만큼 작아진다면 영역표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우리가 과학의 시대를 살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주로 과학에 의해 답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부자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적으로 독실해 져야 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고 믿는가? 인문학은 어떤가.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사람이 날로 줄어드는 현실을 보면서 그저 남탓만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얼마나 세상에 참여하고 세상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가. 이건 인문학의 영역이야라고 주장하는대신에 더 좋은 답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두번째로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우리는 그런 거대한 말뒤로 개인 혹은 개개의 학문을 숨겨서는 안된다. 즉 인문학이라는 애매한 말로 상황을 혼돈시켜서는 안된다. 모든 인문학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인문학이 문제다. 물론 당신의 과학도 문제다. 뭐가 문제인가. 그것은 당신의 인문학이나 당신의 과학이 어떤 질문에 답할 가능성이 있고 실질적으로 뭔가 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니체는 대단할지 모르지만 니체의 말을 외우는 당신의 인문학은 힘이 없을 수 있다. 과학은 훌룡한 것이지만 과학맹신자인 당신이 생각하는 과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기반성과 검렬이 필요하다. 과학이건 인문학이건 모든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의 학문이 점성술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럴 위험성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학문은 철저히 파탄날 가능성이 있다. 설사 지금은 성과가 있어보여도 그렇다. 서구에서 중세에 신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의 연구가 후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될지 알았을까?

 

그렇다면 문학이나 미술비평은 어떤가. 경제학이나 사회학은 어떤가. 물론 과학자들이 과학의 굳건함을 믿듯이 개개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학문의 가치를 믿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지금 우리가 하는 학문중에는 가까운 미래에 점성술이나 골상학같은 처지가 될 학문들이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개 긍정할 것이다. 자기 학문이 아니라 남의 학문의 이야기라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 대단하던 프로이드도 지금은 많은 뇌과학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가지 상이한 것을 싸잡아서 인문학이라는 말 뒤에 놓으면 모든 것을 다 살리거나 죽이는 싸움이 벌어진다.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공격이 신비주의자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고 느끼는 것은 이래서다.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과학대 인문학이라는 구도자체가 문제를 가진다.  실은 이 세상에는 그저 여러 학문이 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생존하기도 하고 사멸하기도 할 것이다. 인문학이라 불리는 것도 과학이라 불리는 것도 실은 서로가 다 섞여있는 것이다. 과학도 사멸할 수 있다. 미신에 빠진 사람들이 과학에 관심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과학도 언젠가 지금의 과학을 신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대체될지 모른다. 

 

내가 보기엔 과학전쟁이니 통섭논쟁이니 하는 모든 것이 학문의 위기에서 온다고 보인다.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도 아니고 과학의 위기도 아닌 학문 모두의 위기다. 어떤 위기인가. 답을 못하는 위기다. 현대 사회가 답을 찾는 문제에 대해 인문학이건 과학이건 모두 답을 제대로 못 내놓고 있다. 세상에는 경제며 환경이며 문화며 인구며 여러가지 위기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고 있지만 인문학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이나 기술분야도 겉만 번지르르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학문의 위기시대에는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싸울 때가 아니라 모두가 답을 찾아 같이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인문학이 위기라지만 내가 보기엔 과학도 많은 분야가 위기다. 과학자들은 한때 상온핵융합같은 기술을 통해서 21세기가 되면 무한의 에너지를 쓰면서 자가용 우주선을 타고 달로 화성으로 여행을 가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낙관론을 듣는다. 금방 위대한 과학의 힘으로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같다. 그러나 많은 낙관론은 현실이 되지 못했고 세상에 문제는 쌓여만 간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투자도 과연 이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나올법하다.  

 

자원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술적 개발일까 아니면 대중의 공동체 정신이 발휘되는 것일까. 인권문제나 식량문제나 물문제는 어떤가. 솔직히 말해서 선전만 무성할 뿐 인류가 가진 문제에 대해 과학은 벌써 오랜간 제대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최근 세상에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네트웍이다. 사람들과 사람들이 연결되면서 답이 나오고 있다. 어떤 신기한 신기술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게 하는 과학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게 된 것이다. 힘은 주로 더 큰 연결에서 나오는 것같다. 

 

월슨의 통섭같은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허무한 책이다. 다양한 분야들을 놀라운 지식으로 요약하는 책이만 당연히 자신 스스로가 통합이론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통합이론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내놓으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통합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렇게 하면 될지도 모른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같은 이야기다. 내년에 그런 통합이론이 나올지도 모르고 백년뒤가 될지도 모르며 그런 통합은 영영 안될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을 만든 과학자들은 양자역학같은 학문이 앞으로 나올테니 그걸 연구하자는 주장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냥 실제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했을 뿐이다. 그런데 통섭같은 책은 왜 쓸까? 이런 분야로 이런 방향으로 연구를 더 하고 싶은데 인적 물적 사회적 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투자 광고같은 책이다. 이 프로그램에 투자를 집중하자는 이야기다.

 

과학전쟁에는 승자도 만족스런 협상점도 없다. 각자의 학문 분야에 신기원이 열려서 그 과실을 수확하기 바쁘다면 싸움도 안난다. 배고프니까 영역 싸움이 나는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은 환상이다. 문제는 새로운 학문,  새로운 질문, 새로운 답을 주는 학문이다. 미래에 승자가 될 학문은 지금 이 순간 인문학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고 과학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통상의 의미로는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가 되든 그것은 인문학의 승리나 과학의 승리같은 식의 어떤 진영의 승리는 아닐 수있다. 

 

많은 분야가 긴 역사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백년전에 그러했듯이 백년뒤에도 대학이 있고 대학에는 지금과 비슷한 학과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영역간의 테두리가 사라지고 있다. 네트웍의 성장과 지식의 축적때문에 변화의 속력은 전보다 훨씬 빠르다. 백년뒤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아직도 학과내에서 분야내에서는 전통에 대한 존중이 있지만 그 안에 안주하다보면 순식간에 그 학문은 고사할지 모른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지금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늙어죽으면 그 분야가 사라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연구비를 지원할 사회 혹은 회사들 즉 세상은 결국 질문과 답을 본다. 새로이 그 분야에 뛰어들 재능있는 젊은 세대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것이고 답하는 것이다. 그 질문이 중요하다는것을 설득하는 것이고 그 답이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간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답을 내놓는 것이다. 그렇게 일에 집중하다보면 아마도 어느새 과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구분은 까맣게 잊혀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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