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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에릭 칸델의 통찰의 시대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6. 30.

15.6.30

기억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에릭칸델이 현대미술에 대한 책을 썼다. 그것이 통찰의 시대다. 물론 이 책은 다른 미술평론가의 책같은 것이 아니고 뇌과학자로서 현대미술과 과학이 어떠한 대화를 해왔으며 궁극적으로 예술과 뇌과학이 하나의 통일된 분야가 될 그 날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미술과 심리학 그리고 뇌과학분야를 통합적인 하나의 이야기안에서 쓴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책은 월슨의 통섭같은 책과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예술의 통합된 형태를 제시하기 보다는 그것을 암시하고 그런 연구방향으로의 연구를 촉구하는 책이지 예술과 뇌과학의 통일이론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다. 칸델은 거듭해서 우리는 겨우 출발점에 서있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실 이 세상의 지식이란 원칙적으로 여러 분야가 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물리학이 아닌 분야가 있을 수 있을까? 심리학이나 뇌과학이 아닌 분야가 있을까? 현대의 지식수준으로는 지식의 통합을 이룩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모든 것은 물질로 이뤄져 있고 동시에 뇌가 혹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세계의 일부다.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화학반응이며 진화의 결과물이고 인간정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문학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곧바로 추구하기에는 지독히 어려운 꿈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언젠가는 통합될 날을 기대하면서 연결고리나 연결하는 길을 찾지 못한채 여러가지 분야를 섬처럼 발달시킨다.

 

그런데 현대미술이 과학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일이 1900년 전후의 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당시에 빈이 문화와 학문의 세계적 중심지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최소한 두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빈에서는 살롱문화가 발달하여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남편이 의대교수였던 베르타 주커칸들같은 여성은 수십년간 이런 살롱을 운영하면서 그곳을 정치적 예술적 과학적 중심이 되게 한다. 빈의 화가, 저술가, 과학자들이 모두 이 살롱의 손님이었다. 크림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물학적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그림에 반영한다.

 

두번째의 이유는 미술의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바로 사진술의 발달이었다. 오랜동안 서구회화는 최대한 사실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발달해 왔다. 그런데 디지컬 카메라가 사방에 가득한 현대에 사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시각적 정보를 단순 기록하는 것이 그림의 전부라면 화가는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멸종하는 직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더니즘 화가들의 지도자인 클림트도 본래는 전통적인 기법을 답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상황에서 클림트는 점차로 표면아래의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심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화가들은 과학과 다시 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화가들은 일찌기 인간의 근육과 뼈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을 통해 사람을 더 진짜처럼 그릴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인간 심리에 대한 과학적 의견은 이제 사진술 발달이후의 화가가 그려야만하는 인간 심리의 근육과 뼈를 보여주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칸델은 오스트리아의 모더니즘 화가들은 사실상 인지 심리학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당대의 심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는 확실치 않다. 당대에는 심리학이란 분야가 제대로 정립되어져 있지 않아서 지금도 그렇지만 철학인지 과학인지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프로이드는 심리학을 과학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심지어 그 프로이드의 학설도 오늘날 과학적 이론으로 취급되는데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칸델에 따르면 실용주의 철학자 월리엄 제임스와는 달리 프로이드는 과학적 심리학을 정립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의 이론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단순화를 도입해야만 했다. 아직 과학적 심리학이 만들어 지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진기처럼 보지 않는다. 사진기는 인간과는 달리 마음이 없으니 스스로가 심리적 효과를 느끼지는 않는다. 칸델은 많은 컬러 화보들과 함께 모더니즘 화가들이 어떻게 심리적 효과를 이용하고 표현했는가를 책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적어도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현대 회화에 대한 좋은 소개서가 되기도 한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화가들의 노력은 곰브리치 같은 미술평론가의 종합에 의해 더더욱 심리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와 예술과 환영이라는 그의 대표적 저술들을 통해 현대심리학을 미술의 해석에 적용한다. 미술은 객관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화가와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이 점을 지적하고 이 것을 가르켜 관람자의 몫이라고 부른다. 곰브리치는 모든 그림은 관람자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림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한다. 리글, 크리스, 곰브리치는 심리학과 미술사 사이의 대화에서 필요한 개념적 발전을 만들어 냈다. 

 

그럼 이 해석이란 어떤 해석인가? 게슈탈트 심리학은 시각정보의 부분들의 특성은 전체에 내재된 구조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음악에서도 그렇다. 19세기의 과학자 헬름홀츠는 시각데이터 분석은 사실을 그냥 인지하는게 아니라 그 해석을 위해 사전정보를 전제한다고 말했다. 뇌는 외부세계를 재구성하는 창작기계이며 이것은 칸트이론의 현대적 형태에 해당하는 주장이다. 크리스는 위대한 예술작품의 핵심은 그 안에 포함된 애매함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이제 뇌과학으로 넘어간다. 기능적 MRI같이 활동하는 인간의 뇌활동을 관측하는 기계들이 발달하고 뇌의 여러 부분에 대한 정보가 쌓여감에 따라 뇌과학은 예술작품이 왜 인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가를 논할 준비가 된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커플러, 휴벨과 위젤등은 눈과 시상하부 대뇌피질등의 연구를 통해 시각신호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연구했다. 그러한 연구는 왜 시각신호에서 테두리선이 그렇게 중요한가를 밝혀주는 것같다. 왜냐면 가장 먼저 추출되는 정보가 바로 그 테두리 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뇌에서 얼굴은 아주 중요하게 처리되는 신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릴 때 왜 인간의 얼굴이 효과적인 시각신호인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칸델은 계속해서 시각신호의 처리 과정, 기억, 감정, 창의성, 의식에 대한 뇌과학적 성과를 설명한다.

 

칸델의 뇌 이야기는 우리가 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를 아주 잘 요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두가지 경고와 함께 읽어야 한다. 하나는 칸델이 매우 흥미롭게 글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단순히 흥미로 읽기에는 지루하고 어려운 것일 거라는 점이다. 진짜 과학자가 쓴 뇌과학이야기가 소설처럼 읽히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다루는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이 모든 재미있고 중요한 과학적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뇌과학적 성과를 통해 클림트나 고호를 능가하는 그림을 그려낸 뇌과학자는 아직 없다는 사실이다. 왜 이러저러한 특징이 효과적이었나는 설명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런 이론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을 창작해 낼 수 없다면 과학적 이론으로서의 설득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과학적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예술과 과학의 통합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칸델은 과학자로서의 신념을 잊지 않으면서도 매우 겸손하다. 따라서 월슨의 통섭에서처럼 과학의 전망에 대한 낙관이 지나쳐서 인문학도들의 분노를 일으킬 소지는 작다. 나는 오히려 칸델은 과학자가 예술가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자신이 빈에서 1929년에 태어난 칸델은 빈의 예술과 빈의 지식융합적 시도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이 책을 그의 취미의 결과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의 삶 전체의 바닥에 깔려 있던 노력의 결과라고도 표현한다. 그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있었던거라고나 할까.

 

이 책은 흥미로운 동시에 골치가 아프고 매력적인 동시에 실망스럽다. 그 이유는 하나다. 목표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아직 그로부터 멀기 때문이다. 칸델같은 천재적 학자가 독자를 압도할 만한 양의 지식을 총동원했는데도 그렇다.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80대 후반의 과학자로서 칸델은 여전히 소년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누구나 성공한 과학자로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만큼 밖에 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새로운 마음의 생물학이 자연과학,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사이의 새로운 대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높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잠재적으로 중요하다는 말로 책을 마친다. 이것은 아마도 아직 젊어서 이 방향으로 계속 연구를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면서 주는 메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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