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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루시 웨슬리의 하우스 스캔들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7. 14.

15.7.14

우리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를 바꾸고 가족을 바꾼다. 물론 우리는 수동적인 로보트가 아니니까 환경에 무조건 지배되지는 않지만 어떤 집에 사는가는 우리를 서서히 바꾼다. 칸막이가 없는 거대한 스튜디오 식 아파트에 가족이 모두 같이 살 때와 칸칸이 나눠져서 프라이버시가 좀 더 강조되는 집에 살 때 우리가 똑같은 가족으로 살기는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방식에 따라 집을 만들어 왔고 반대로 집에 맞춰서 생활해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생활양식이란게 그렇게 빨리 변하는 것은 아니고 집을 짓는 양식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생각과 집의 구조와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관례에 따라 이건 원래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 알고보면 큰 피해와 낭비를 만들 수가 있다. 맞지 않는 옷이 주는 아픔을 모르면서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보자. 역사적인 시간단위로 보면 한국인들은 전통의 가옥구조를 한순간에 버리고 서양식으로 집을 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활방식도 상당히 서구화되어서 혼란이 많다. 또 외국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아도 과거와 오늘의 생활환경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당연한 것들의 의미를 정말 얼마나 생각해 보고 있을 까. 집에 장농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식탁이나 탁자는 어떤 것을 사는 것이 정상인가. 침대에 자지 않는 것은 정말 불편한 것일까? 왜 우리는 캠핑이나 가야 바깥 공기를 맡을 수가 있을까. 실내에서 나는 가전제품이며 다른 사람들의 소음들에서 탈출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최근에 루시 웨슬리가 쓴 하우스 스캔들을 읽었다. 이 책은 건축양식의 변화에 집중한 책은 아니지만 수면과 사교, 위생과 식사등 여러방면에서의 유럽의 생활변천사를 기술하면서 그것이 집의 변화와 어떻게 함께 해왔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인으로서 나에게 이 책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혔다. 즉 서구의 생활변천사를 읽는 동시에 한국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것들이 집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양인들과 그토록 다른데 어째서 집짓는 것에 대해서는 다르게 고민하지 않을까?

 

물론 서구와 우리가 모든 것이 다르지는 않다. 하우스 스캔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중의 하나는 과거에는 사람들이 뭉쳐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집이 거의 자급자족을 하는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되는 쪽이 생활의 질을 높이는데 유리했다. 기술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집은 많은 것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서양도 그랬지만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의 집이란 어떻게 보면 이런 과거의 유산이 어느 정도 변형된 결과다. 그러나 물론 충분히 변형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저러한 것은 원래 그렇다라는 선입견에 빠지기 때문이다. 

 

필요가 있으면 대접도 잘해주기 마련이다. 기술적인 변화, 사회적인 변화가 생기기 전의 서구 귀족의 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고 한다. 즉 하인이라고 해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긍심을 가진 직장인으로 대접받으면서 거의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같이 먹고 같이 잤다.

 

오늘날의 고급호텔에 가면 아직도 가끔 호텔 침대의 네 귀퉁이에 기둥이 서있고 커튼을 침대주위로 두르게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낭만적인 침대로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은 서구 사람들이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이 귀족과 하인과 손님이 모두 함께 자곤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분리를 위해 생겨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이전에는 영국에는 현대적 의미의 침실이란 개념이 없었다. 사람들은 사적인 공간이 없이 침대가 놓여져 있는 방을 공공의 장소로 썼으며 심지어 출산을 할 때도 그런 장소에서 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자 하인들은 점점 더 주인 집안 사람들과 공간적으로 분리되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러면서 더 천대받는 직업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인으로 사는 것을 매우 부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현대의 많은 직장인들은 형식적으로만 독립적일뿐 과거의 하인들보다 대우나 직업 안정성에서 오히려 더 못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식구가 많은 쪽이 좋았다. 집안에 해야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나의 가정이란 작은 자급자족적 공동체였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농부도 자식을 많이 낳아서 식구를 늘리는 쪽이 유리했을 것이다. 과거의 집이란 이런 사회적 현실을 반영했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집을 더이상 그런 곳이 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집이 더 이상 자급자족하는 생활공동체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할 때 모든 것을 되도록 버리고 최소한의 것을 남기는 정반대의 접근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은 집짓기 운동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집바깥에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임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뭔가를 집안에 독점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가능한한 바깥에서 구하기로 하고 최소한의 서너평의 집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서너평되는 작은 집에 계속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구성하기 위해 먼저 가진 것을 모두 버려보고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최근에 외국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짐들을 다 버리고 와야했다. 그래서 마치 새 살림을 꾸리는 것처럼 새로 가구며 식기며 가전을 사야했다. 그것은 피곤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는데 내가 십년쯤 전에 같은 일을 했다면 나는 훨씬 더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했을 것이고 그 결과 알지도 못하는 채 훨씬 더 돈을 많이 쓰고 훨씬 더 불만족스러운 선택을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좀 얻은 후에 이렇게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새로 뭔가를 소유하려면 먼저 가진 것을 버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집에 한번 살아보는 것은 새출발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일 수 있다.

 

워슬리의 책에서 매우 간단히 언급되거나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들 중에도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있다. 먼저 이 책에서는 집의 구조와 치안의 문제와의 관계는 별로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의 구조는 특히 귀족의 집의 구조는 치안이나 사회의 권력 싸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쟁이 많고 치안이 불안하여 도둑이 많은 사회에서 집은 바깥으로 폐쇄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집은 방벽을 위한 성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을 서구식 주택의 특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작가는 온 세상이 과거에는 원래 이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큰 집들을 생각해 보라. 그 낮은 담이 성벽처럼 보이는가? 게다가 집들도 담안에 아주 여러채를 지어서 분산되어져 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습격에 방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호하고 싶은 사람과 물건들을 건물 깊숙히 숨기기 어렵다. 지켜야 할 것들이 분산되어 있다.  

 

현대에도 치안이 부족한 곳에서는 혹은 사람들이 바깥과 분리되고 싶은 곳에서는 여전히 성같은 집을 짓는다. 한국에도 여러곳에서 그런 폐쇄된 공간으로 아파트 단지를 만든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혹은 치안이 안전한 마을을 만들수 있다면, 바깥과의 소통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은 아주 당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괜히 우리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놓고 사는 것일 수 있다.

 

조선의 가옥과 외국의 가옥과의 큰 차이는 난방의 방식에도 있다. 여기서도 루시 웨슬리는 집안에서 난방을 하는 것을 영국식 가옥의 특징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조선이외에는 다 그랬으니까 그럴 법하다.

 

루시 워슬리는 13, 14세기에 이르러서야 발명된 굴뚝이야 말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집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그전의 집이란 매연때문에 토굴과 다름없는 환경을 가졌었다. 굴뚝은 매연을 바깥으로 뿜어주고 창은 바깥 공기를 빨아들인다. 워슬리는 굴뚝 덕분에 다른 방에 까지 열기를 전달해주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열을 분산시키는 효능에 있어서 뜨거운 공기가 위로 뿜어져 나가는 굴뚝은 방 바깥에서 불을 피우고 뜨거운 연기가 방바닥을 통과하는 온돌 시스템에 비하면 아주 유치한 것이다. 온돌은 환기 때문에 계속 찬공기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서양에서 땔나무로만 난방을 했다면 열효율이 떨어져서 도저히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석탄을 쓰게 된 원인은 이것때문이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집에서 모여사는 것이 유리했다. 그런데 모여서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온돌방은 쉽게 작은 방을 여러개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하인과 주인이 부모와 자식이 같은 방에 뭉쳐서 잘 필요가 없다. 이렇게 분산되어져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뒤집어 말하면 조선에 예절이 발달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방을 여러개 쓰는 것이 불가능하면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이야기는 주장할 수가 없다. 해수욕장을 남녀 전용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반나체의 남녀들이 해수욕장에 가면서 그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워슬리의 책은 서구인들의 삶이 현대이전에 얼마나 뒤엉켜 사는 삶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모여는 살아야 하는데 그들의 집이 그걸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워슬리는 책의 결론부에서 현대의 가옥은 다시 중세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가지 기능으로 분화했던 여러개의 방들은 다시 스튜디오 스타일로 하나로 뭉쳐진다. 그 이유중 하나는 자원이 부족해 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시 하는 서구형 주택들이란 석탄과 석유를 무한정 퍼올려서 환경문제 생각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을 당연시한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즉 자원낭비와 환경오염, 에너지 문제등을 고려하지 않은, 전 인류가 다 따라할 수 없는 주택인 것이다.

 

그래도 에너지 절약이라고 하면 우리는 다시 유럽에 눈을 돌린다. 그래서 패시브하우스 처럼 단열이 더 철저한 집을 짓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런 집은 환기는 어떻게 될까. 이런 집은 자연과 공존하고 자연을 이용하기 보다는 자연과 싸운다. 바람을 막고 빛을 막는다.

 

옛날 한국의 집을 보면 방 한 칸은 대개 작다. 그리고 마루가 넓다. 바깥으로 반이 터져있어서 여름에는 쾌적하고 짐도 그런 공간에 내다가 놓을 수가 있다. 난방이 들어가는 온돌방에는 커다란 가구가 들어가지 않는다. 애초에 난방을 하는 구들위는 침대위 처럼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가 비싸게 산 침대위에 책상을 올려서 그 공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난방이 들어가는  공간이 작으니까 난방비를 아낄 수 있고 우리는 물건이 별로 없는 방안에 있을 수가 있다. 난방이 필요없는 계절에는 집은 사방으로 열려서 바람이 통한다. 긴 처마가 깊은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다.  

 

그런데 우리는 흙발로 집안에까지 들어가는 서구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흉내내고 그런 가구로 집을 채운다. 활용을 생각하지 않고 쓸데 없이 넓은 공간 분리를 생각한다. 어떤 공간에는 책상이나 소파를 놓으면 그 이외의 공간은 단순한 바닥이 되면서 공간낭비가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모든 곳을 온돌방식으로 난방을 한다. 좌식 공간은 거의 없어지고 침대는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공간의 분할이다. 예를 들어 가장 큰 안방을 장농을 놓지 말고 중앙 분리대로 둘로 나눈다고 해보자. 그러면 한쪽에 침대가 있어도 다른 쪽은 좌식공간으로 쓸 수도 있다. 중앙분리대가 없거나 그 공간을 한쪽 편에 장농을 놓는데 쓰면 그 방은 그저 들어가 잠만 자는 공간이 된다. 

 

오늘날 대청마루는 실종되고 에어컨이 더위를 몰아낸다. 집앞의 정자에만 가도 좋다고 하면서 집은 매우 폐쇄적인 감옥처럼 만들어서 바깥공기를 맡기 어렵게 한다. 아파트는 말할 것도 없고 단독주택을 지어도 깊은 처마가 그늘을 만들어 내고 바람을 유도하는 한옥의 구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네모난 콘크리트 상자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최근 한국의 어느 아파트에서 전기비가 비싸다고 중국집 배달원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료비가 날로 비싸지는 시대에 언젠가 고층아파트는 매우 비현실적인 주거가 될지도 모른다. 다른 주택들도 그 만족도가 더 떨어질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만약 에너지 공급이 끊긴다면 우리는 어느정도의 곤란에 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근사해 보인다는 이유로 통유리로 만들어 진 집을 지은 곳도 많은데 그런 집들은 단열이나 그늘을 만드는 측면에서 실용성이 떨어진다.

 

다시 절제하고 효율을 올리는 시대가 오면 우리는 다시 공유를 강조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일자리가 줄어들면 어딘가에서 일자리는 만들어 져야 한다. 부모들은 소비와 돈버는 시간에 바쁘고 아이들과 가사는 학원이나 고용인에게 맡기는 일은 수지가 안맞게 된다. 그러면 다시 집에서 요리하고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거나 동내의 교육공동체 내부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매력적이 된다.

 

무한소비시대가 끝나면 우리는 작은 마을이 마치 하나의 옛날 큰 집인 것처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즉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해서 그 안에서 직업을 만들고 살아가는 것이 생활비가 가장 적게 드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보편화된다면 오늘날의 회사에서의 직업이란 그 다수가 마치 우리가 옛날의 하인들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비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지 모른다.

 

그 작은 생활공동체를 위한 주거는 어떤 것이 될까. 오늘날은 중세시대가 아니기때문에 우리는 각자 성같은 폐쇄된 공간을 만들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확장도 어렵고 재개발도 어렵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소위 타운 하우스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집들이 그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인가, 어떤 부분이 공유되는 부분이 될 것인가에 따라 그 성공도는 전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대개는 지금 떠올리는 것보다 더 소박한 구조가 되야할 것이다. 사치스러운 것을 추구하거나 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덜 쓰고 최대한의 삶의 질을 달성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게 되겠냐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또한 당장 서두를 필요도 없다. 다만 지나치게 과거에 매달리는 어리석음, 집이란 원래 이렇다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새로운 것들을 미래가 없다거나 말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지금 사는 방식은 미래가 있고 말이 되는가? 엄청난 교육비를 들여서 대학까지 보내고 해외어학연수까지 보내어 아이를 키우면 모든 아이에게 미래가 반드시 열린다는 말인가? 집이란게 투자의 대상으로 얼마가 오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과거의 집의 형태를 당연한 것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다가 유행이 확바뀌면 무리한 투자때문에 엄청나게 곤란해지는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로 스트레스가 쌓일때 우리는 대개 우리에게 돈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옷같은 옳지 않은 집에 살고 있기 때문 일수도 있다. 사는 건 원래 이렇다라는 정신적 게으름때문에 우리는 삶의 고통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방에 무슨 가구가 들어가야 하는지 침대를 여기다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집이란 그저 관모양으로 누워잘 수 있고 티브이가 나오는 곳이면 충분한데 투자 목적으로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걸 구했을 뿐이라는 식이다. 결국 자기 몸이 들어가는 곳에 자기가 관심이 없는 것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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