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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오찬호의 진격의 대학교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7. 29.

15.7.29

진격의 대학교는 한국대학의 실상을 시간강사를 해온 저자 오찬호의 입장에서 폭로한 것이다. 이것은 연초에 읽은 프랭크 도나휴의 최후의 교수들이라는 책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한국대학의 어두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볼 가치가 있다. 

 

 

지금도 한국은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학생과 그들의 부모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묘사되는 한국대학의 모습은 너무 비극적이라서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취업에 목을 매다보니 학과의 벽이 무너지고 영어가 불합리할 정도로 강조된다. 학생들은 마치 회사에게 영혼이라도 팔려는 것처럼 생각없는 인간으로 길러진다. 교수는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부당하게 평가당한다.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하면 대학에 유산으로 남아있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같은 말은 적어도 이 책이 보여주는 문맥속에서는 나이트 클럽으로 변한 교회의 벽에 걸린 십자가 처럼 낯설게 보인다.  저자는 한국대학의 변화를 세계적 추세라고 파악하고 되돌리기 힘든 것이라 대안이 있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 추한 모습에 몸서리를 치고 그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자세를 취한다. 이 책은 그래서 더 비극적이다. 이 책을 읽고 아무 감정도 없이 그래서 뭐 어쩌란 말야,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이 책은 그래서 더 출판되고 읽혀질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늘날 대학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동거하는 곳이 되었다. 그것은 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 이질성이 너무 커져서 대학이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그것을 다 감싸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분열은 교육과 연구 사이에도 있고 이학과 공학, 이공계와 인문계 사이에도 있다. 학과와 학과 사이에도 있고 한 한과내부에도 있으며 대학원과 학부사이에도 있다. 이질적인 것이 동거하게 되면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생긴다. 학생은 엄청난 돈을 쓰고 있는 대학에 비싼 등록금을 낸다. 정부의 지원도 받는다. 하지만 대학이 쓰는 돈의 대부분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등록금은 비싸지는데 그들이 받는 교육은 한없이 부실해 진다. 이 괴리는 대학 교육의 가치에 회의를 누적시키고 그것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분출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한국 대학의 현실이 나쁘다고 해서 오해를 하면 안된다. 과거라고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에는 박사학위도 없는 교수가 아주 많았고 상대적으로 외국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는게 더 중요한 이공계의 박사인데도 교수가 될 때까지 단 한 편정도의 논문만 발표한 사람도 많았다. 교수를 지망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좋았던 시절인지는 몰라도 학생들입장에서는 세계적 학문의 흐름에서 동떨어져서 낡은 것을 배우던 시대 즉 후진국의 시대였다. 그것이 좋은 것처럼 기억되는 면이 있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때는 교수도 더 철밥통 직종이었고 대학생도 졸업하면 취업이 어렵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한국경제의 팽창기였으며 대학 졸업장이나 박사 학위의 가치가 지금과는 달랐다. 모든 고등학생의 80%가 대학생이 되지도 않았고 아직 박사가 너무 많아서 난리가 나는 시대도 아니었다. 그리고 민주화 이전의 시대로 지금은 상식이 된 권리가 태연히 무시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또한 현재라고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연구비를 들이고 비싼 기자재를 사서 세계의 첨단 연구를 하는 사람도 많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세계학문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전처럼 변방이기만 하지는 않다. 그 덕분에 한국대학의 세계순위같은 것이 올라가고 있으며 논문출판수도 늘고 있다. 이에는 비판할 위선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박사가 교수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서 미국대학과 공동연구를 할 기회도 늘었고 첨단 학문을 할 기회도 늘었다. 물론 이같은 열매는 사실 아주 소수의 엘리트들만 제대로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인가? 지금이 나쁘다면 과거에도 나빴다.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실 전문가로 연구하는 학자는 프로 야구선수가 그런 것처럼 소수의 재능있는 사람만 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던 80년대의 대학생들이 더 의식화되고 깨어있었다라는 말은 한편으로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세계적 현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저 책상앞에서 상상속의 스타를 동경하듯 세계를 상상하는 우물안 개구리나 몽상가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 나쁘지만 과거에도 좋지 않았다는 말이 이 책이 지적하는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좋고 나쁜 것이 종류가 달라졌다. 대학은 세속화되었다. 나역시 학문을 하고 연구를 하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진리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즉 다시 말해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치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존중하라는 처방이 내려지는 것처럼 자신을 특정한 믿음의 신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강제로 구원하려고 하지 말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공동체를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대학이 바로 그런 공동체다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옳지 않은 것이 되었다. 취업학교로 대학의 한부분을 쫒아낼 것인가 진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대학을 나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같다. 

 

학문을 연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기성종교의 신자가 되는 것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대학이 망한다, 세상이 망한다라고 한탄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서양의 중세나 조선의 몰락을 보면서 역설적인 위안과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독교 중심의 서구 중세가 과학중심의 세계로 변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중심이 신학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세계가 망하는 것같았을 것이다. 성리학을 공부하던 조선 선비들은 서구 학문의 세상으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세계가 망하는 것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망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저 과거의 기독교적 성리학적 세계였을 뿐이다. 지금의 대학이 망하는 것도 꼭 나쁜 일이지만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은 특히 묘한 상황에 있다. 세상은 어딜가나 인문학타령이다. 그런데 대학의 인문학과는 멸종하고 있다. 인문학적 수요가 있는데 인문학이 멸종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세상이 인문학이 뭔지 몰라서라고 지적하는 것은 한 쪽편의 진리다. 그보다는 세상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그에 맞춰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순수분야의 학문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압력에 처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을 한다는 것이 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그걸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돈을 벌지 못하면 학문을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의 연구가 돈을 만들지 못하는데도 사회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확실히 대학보직같은 것을 얻어서 사회적 지원을 받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이유로 해서 대학이 더이상 그것을 줄 수 없는 곳이 된다고 해도, 그래도 학문을 하겠다는 사람만이 대학의 세속화를 거부할 자격이 있다. 학문이 직업이라면 돈받은 만큼 일해야 한다. 학문이 그 이상의 가치이며 삶의 방식이라면 성공실패에 상관없이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말이다. 인문학의 의미가 세상을 낳설게 보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가치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세상이 알아주던 말던 말이다. 이것은 자살작전같이 들리지만 오히려 그렇게 태도를 분명히 할때 길이 열린다. 이쪽편인지 저쪽편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한때는 서구에서 교회는 종교뿐만 아니라 교육의 중심이기도 했다. 종교인들은 지식을 독점했다. 시대적 압력속에서 교회가 찾아낸 방법은 교육과 믿음의 분야를 분리하는 것이다. 교육은 대학이 전담하게 되고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곳이 되었다. 세속화된 대학안에서 학문이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학을 뛰쳐나와서 학문의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야 한다. 가난한 예술가처럼 살아야 한다. 학문의 목적을 새롭게 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해야 한다. 다만 학문이 더이상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당연한 가치가 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핵심적 가치가 뭔지를 고민해야 한다. 교수라고 불리는 호칭이 나의 핵심적 가치인가. 유명해지고 권력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어깨에 힘주고 사는 것이 나의 핵심적 가치인가. 졸업장이 나의 핵심적 가치인가.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뭔가를 포기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부러워해서도 안된다. 그럴 때 삶은 오히려 더 치사해지고 그럴때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던져준 먹이때문에 서로 물고 싸우는 일이 벌어지면 모두가 더 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가치로 뭉치는 것이 정도이며 그것이 그래도 희망과 미래의 길이다. 

 

나는 또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학의 기업화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기업들이다. 문제는 특정기업이다. 문제는 기업을 둘러싸고 쉽게 비굴해지는 한국 사람들이다. 기업이란 물론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농부와 조폭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을 취하지만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기업도 인간처럼 좋은 기업이 있을 수 있고 나쁜 기업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흑백으로 좋고 나쁜 기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행위에서 뭘 배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순히 기업은 악이니까 기업화를 막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마치 과거의 왕이나 교황이 세상의 세속화에 저항하는 것과 비슷하다. 

 

화이트헤드는 대학의 존재이유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지성이 만나서 경험과 창의적 발상을 합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못할때 대학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대로 대학이 취업학교가 될 때 대학은 그런 장소가 되기를 그친다. 대학은 더이상 신성한 성전이 되고 있지 못하다.

 

불만이 있어도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야 한다. 시대에 대해 체념하라거나 남들 사는 방식에 무조건 동조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사람사는 것은 원래 이래야 한다던가 아무 생각이 없는 나태함을 가져서는 아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모두가 나처럼 살필요는 없다. 나와 같이 살지 않겠다면 행운을 빈다고 말할 밖에. 그러나 당신이 나와 어떤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런 소통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조금은 줄일 방도가 생겨나지 않을까. 돈이니 직위니 하는 현실이 우리를 무겁게 누르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그칠 때 현실돌파의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진리는 분명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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