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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9. 16.

2015.9.16

일전에 전주에서 행복의 경제학 회의가 있었다. 여기서 오래된 미래를 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박사는 강의 중에 한 권의 책을 언급한다. 그것이 바로 이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이었다. 1973년에 나온 이 책은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서 한국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잡지도 나오고 있다. 이 책에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제학에 대한 연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슈마허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삶과 경제학을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인간을 망각하게 되었으며 인간을 다시 사고 중심으로 놓을 때 우리의 삶과 경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풍부한 실무경험과 학식을 모두 갖춘 경제학자인 슈마허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경제학은 경제학의 기본 가정들을 다시 검토하는 메타 경제학의 연구 즉 형이상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검토라고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철학적 논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본래 우리가 이것 저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이전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대개 특정 물질이 풍요로우면 좋은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나무가 의자나 탁자로 변신하면 그것은 당연히 가치가 생산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 인간은 이기적이고 서로 경쟁하는 존재라는 것을 당연시 한다. 게다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그 주요임무로 이해되는 경우 우리는 마치 물리학에서 포탄의 위치를 예측하는 것처럼 경제적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경제학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위에 자료를 쌓아올려서 여러가지 정책을 펴고 국가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판단을 내린다. 

 

슈마허는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화성인이 있다고 할 때 그들과 우리는 다르므로 각자의 번영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경제학은 달라야 하는데 우리는 마치 절대적인 보편 경제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학은 메타경제학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인간의 경제학과 바퀴벌레의 경제학은 달라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경제학은 바퀴벌레의 경제학과 같기도 해야 한다. 인간과 바퀴벌레는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은 같고 무엇은 다른가?

 

인간과 바퀴벌레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 바퀴벌레보다 인간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보고 들을 수 있는 면이 있을 것이다. 특히 도구를 사용할 때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인간도 유한한 존재이며 타고난 유전적 제한을 가지고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현대의 자본주의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다루는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우리가 나무하나를 죽이고 태우면 그것은 인간의 일부를 태우고 죽이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상호공존하고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의 시장가치나 석유의 시장가치는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다. 자연을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나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훌룡한 가치생산의 행위로 경제학에서는 계산되곤 한다. 경제학의 계산이 아무리 엄밀해도 그 방정식에 등장하는 항목들에 붙어있는 가정이 틀리면 소용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계산이 정확한가만 보면서 그 판단의 옳음이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학문으로서의 경제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시각과 논리는 일상생활로 들어와서 개개인의 손익계산에 침투한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돈과 물질만 보고 다른 가치에 대해 장님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결국 문제를 만든다. 그러므로 행복에 도달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새 비경제적이라는 말과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같은 말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슈마허는 예측의 불가능성에 대해 한 장을 써서 설명하면서 우리는 모순적인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미래를 설계할 때 우리는 미래가 예측가능한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미래예측을 우리가 하는 이유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다! 만약 인간의 의지로 미래가 바뀌는 것이 가능하다면 미래가 예측가능하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예를 들어 다른 인간들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래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타임머쉰에 대한 타임패러독스와 같다. 인간은 마치 유령처럼 정의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명확하게 정의된 수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하지 않고 무한한 적용범위를 가진 자연법칙같은 것도 아니다. 자기의지를 가지고 변하는 유한한 존재다. 

 

책의 이름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생각하는 경제가 아름답다는 말이다. 즉 인간 규모의 경제학을 생각해야 하며 무조건 거대한 규모로 팽창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틀려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 인간은 노동을 즐겁게 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때 행복하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노동을 자유시간을 얻기 위한 즉 노동하지 않기 위한 필요악으로만 생각한다. 노동과 자유를 구분하는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를 구분하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인간은 그저 산다. 엄밀히 말해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이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은 소비만 하거나 생산만 하는게 아니라 같은 인간이 소비자고 생산자다. 본인을 소비자로 파악하고 생산자들의 목을 죄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을 죄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불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행위가 서로를 파괴하게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가치평가를 시작하는 경제학은 종국적으로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인간이 성공하는 인간이며 훌룡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경제학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더욱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워하도록 격려하는 일이 어떻게 평화와 행복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작은 마을이 그러했듯이 몇백명 정도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협력하고 장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진화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만 수백만 규모의 시스템안으로 던져지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경쟁에 이기는 사람은 승리를 통해 패배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기고 나서도 종종 공허하다. 행복을 공유할 사회적 관계는 경제학적 가치 방정식에 등장하지 않으니까 대개 과도한 경쟁과정속에서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파괴는 결국 자기 파괴였다. 그래서 경쟁에 이긴 사람도 경쟁에 패배한 사람도 우울해지는 것이다. 

 

슈마허는 지속가능하며 인간이 행복한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우선 그 행복을 느끼는 인간을 본다. 그리고 그 인간이 주변 환경에 의존하는 존재이며 성장하고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통해 환경보호의 필요성과 작은 규모의 경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점이 분명하게 들어나게 되는 예중의 하나가 빈민국이나 개발도상국에 부자나라가 원조를 하는 과정이다. 부자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대 경제를 빈민국에 소개하는 것이 원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빈민국안의 사람에 주목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시스템을 복제하려고 한다. 그게 선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공정을 통해서 물건을 만드는 공장을 인도같은 가난한 나라에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런 공장은 일자리를 별로 만들지 못하며 그런 공장을 돌리기 위한 원자재나 기계를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빈민국을 부자나라에 종속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이 수출을 위한 것이라면 또 경제는 수출주도형이 되는데 이것은 결국 점점 더 빚만 늘리게 된다.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수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민국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배우고 쓸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떻게 말하면 유치원생에게 대학교 교재를 외우게 하지 말고 유치원생에게 어울리는 책을 줘야 한다는 논리다. 성장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뤄져야한다는 시각이다. 

 

물론 슈마허는 단순히 부자나라 경제를 미래적 모범이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슈마허는 거대 시스템과 작은 시스템의 공존을 이야기하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작고 자급자족적인 단위의 공동체가 쓸 수 있는 인간적인 규모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거론하지 않지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익숙한 공유경제라던가 도시 농부 사업, 스스로 집짓는 운동같은 것이 구체적인 예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인이 농사를 짓는 것은 규모를 크게하고 전문화를 하는게 바람직하다는 시각에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전문 농사꾼이 거대하게 농사를 지으면 훨씬 더 쉽게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계산은 몇가지가 틀려있다. 첫째로 농사를 짓는다라는 노동이 나쁘다라는 것이다. 실은 도시인은 즐겁게 농사를 짓는다. 노동이 즐겁다. 그들은 너무나 오랬동안 그런 종류의 생산활동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것이 더 좋다. 노동과 여가가 구분되지 않는다. 둘째로 직접 농사를 지으면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생산할 수 있다. 거대하고 복잡한 시장 시스템을 돌리는 것은 결국 에너지다. 에너지적으로 보았을 때 자급자족이 더 효율이 높을 수 있다. 그런데도 거대규모 시스템이 좋아보이는 것은 자원이 무한하다는 가정하에 그런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는 산수도 결국 기름값이 말이 되는 수준이며 그로인한 공해가 말이 되는 수준이라는 전제가 붙는 것이다.  

 

가장 빠르고 첨단인 시스템이 좋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은 종종 많은 투자를 하고 더 많은 위험을 가지며 더 고수익을 올리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가장 빠르고 거대한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우리에게 맞는 것이 좋다, 주어진 목적을 만족시키는 규모의 기술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세상문제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은 지나치게 단순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복잡해서도 안된다. 

 

마지막으로 슈마허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작은 것이 좋다던가 환경보호를 해야 한다던가 하는 말을 교조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적 성장, 지혜의 배움을 통한 자연스런 결과가 되도록 하는것이다. 크다던가 작다던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던가 개발해야 한다던가 하는 말에 어떤 고정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해야 하고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일을 하고 잘못된 가정에 의해서 생기는 무수히 많은 쓸데 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뭘 당연하게 생각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즉 각자의 형이상학을 검토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책의 끝에서 슈마허는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 인류 전통의 지혜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 바로 진리와 지혜를 찾아 헤맺던 선인들의 노력에 기대어 더 큰 사람이 되는 길이 올바른 경제학의 출발이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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