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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법정의 선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4. 17.

15.4.17

이제는 돌아가신 법정스님의 글중에 선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텅빈충만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이며 1988년에 쓰신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알듯모를듯한 이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몇자 써보고 정리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은 먼저 선이 좌선 즉 자리에 앉아서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냐면 하면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것은 결코 앉아서 움직이지 않을 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앉아서 눈감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리에 앉아서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만을 좌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법정은 여러선사의 이야기를 예로 드는데 이 선사들의 이야기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예는 남악 회양선사의 문답이다. 거기서는 어떤 학인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어떤 것이 정토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혔느냐?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 누가 생사를 너에게 지우더냐?

 

질문에 대해 답을 한다는 것은 인과론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뭔가는 뭔가 다른 것때문에 생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논법은 이러한 것을 따른다. 예를 들어 발이 티눈때문에 아프다면 우리는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티눈을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논법은 모든 경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생의 의미니 삶의 고통이니 하는 질문들에 이르면 그렇다. 

 

왜 그런가? 실은 우리가 어떤 단어의 뜻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착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서양식 사고에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뉴튼의 만유인력법칙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뉴튼은 중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중력이란게 있는데 이러저러한 법칙을 따른다라고 할 뿐이다. 그밖에도 우리는 거리나 시간같은 것이 뭔지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어떤 경험적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 뭔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단어를 등장 시켜야 한다. 거기에는 왜가 없다. 우리는 그냥 그렇다라고 전제해서 시작할 뿐이다. 그런 시작점이 없으면 우리는 논의를 앞으로 진전시킬 수가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의 정의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지금도 우리는 신이 뭔지, 생명이 뭔지 모른다. 그냥 경험적으로 우리는 대충 이러저러하게 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느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 뜻이 뭔지 안다고 전제하고 대화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에 정확한 의미를 주려고 시도하는 순간 대개는 모순이 생긴다. 그러면 오히려 시스템에 전체적으로 혼란이 온다. 빈 방에 앉아서 상대성이론의 오류를 찾아낸 아마추어 과학자들은 대개 이런 개념상의 오류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동쪽이 어디냐고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질문에는 숨겨진 전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의 표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당신은 잠을 자는 동안에 우주공간으로 옮겨졌거나 달로 옮겨졌다고 하자. 당신의 질문은 질문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누군가가 어느 방향을 가르키건 그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여전히 지구위에 있다고 해도 그 질문은 때로 의미를 잃는다. 지구는 태양주변을 돌때 동쪽으로 움직이나 서쪽으로 움직이나라고 질문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사람이 타임머쉰을 타고 현대에 도착해서 지금의 임금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은 어떤 이름을 대는 것이 아니다. 우라는 그 사람에게 사람이 왕국에서 사는게 하니라 공화국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부터 이해시켜야 한다.  

 

발이 티눈때문에 아프다. 그럼 티눈을 치료해야 한다. 그것은 훌룡한 답이다. 그렇지만  왕조라는 굴레안에서 착취당하는 머슴이 있을 때 그 머슴이 왜 사는게 이렇게 힘든지, 어떤 머슴이 되어야 고통에서 벗어나지는지를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우선 우리는 물어야 한다. 누가 너에게 네가 머슴이라고 하더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좌선을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란 생물은 급하면 생각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기억이 있고 습관이 있고 이론이 있다. 그래서 급하다 싶으면 습관과 이론이 우리를 마구 움직여 버린다. 그런데 실은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매 순간이 다 급하다. 모든 것이 다 급하고 너무나 많은 것이 원래 이런 것이니 두번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이 만들어 준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환각속에서 언제나 급하고 삶의 고통은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그 환각의 굴레에서 나온다. 그 환각의 세계안에서 자꾸 인과론적으로 이게 저게 뭐냐고 답을 찾아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달마는 마음이 괴롭다고 하는 혜가에게 그럼 나에게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마음이란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마음은 편안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가의 문답이란 하나의 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의 비약을 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시스템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깨달은 경지라고 말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 선입견도 기억도 없이 사고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깨달은 선사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라고 해서 세상의 말을 안하고 자기만의 언어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집착의 경지가 다르고 가진 생각의 깊이가 다를 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경험이나 자기에 대한 고민없이 단지 기묘한 선문답을 여러번 읽거나 자리에 앉아서 자기의 마음을 한없이 둔하게 만들어 깨달음에 이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게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한걸음씩 앞으로 나갈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어떤 걸음이 우리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을 만큼 크게 느껴지는 결정적 걸음이 될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걸음 한걸음씩 걸었던 이전의 발걸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것은  큰 스승의 삶을 보고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마치 야구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야구경기를 구경하면서 그 게임의 법칙을 배우듯 큰 스승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힐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나마도 자기 자신에게 보는 눈이 없다면 보이지 않을 뿐이며 스승에게 돌을 던지거나 멱살을 잡지 않으면 다행이다. 

 

선의 길은 특별하지 않다.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면 우리는 종종 문제자체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뼈와 살로된 한계를 가진 존재이므로 혼자가 되는 시간과 기회를 잊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조용히 자기 안에 쌓인 것에서 지혜를 퍼올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선의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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