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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행복공동체와 행복의 자신감

by 격암(강국진) 2015. 2. 11.

15.2.11

우리는 혼자서 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무조건 우주적인 규모와 보편성으로 시야를 넓혀서 나는 이 온 우주와 함께하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나름의 어려움이 당연히 있다. 이 말도 어떤 문맥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우리는 한계를 가진 작은 존재이고 따라서 우리의 손을 뻣치고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주변의 것들에 보다 더 많이 의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만 생각하다가 밥먹는 것을 잊고 굶어 죽으면 곤란하다. 

 

온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외롭다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는 사람도 나에게 남편이나 아내만 옆에 있다면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갈 자신이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진짜로 배우자만 있으면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세상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내 옆에 배우자라는 동반자만 있다면 나머지 문제는 그럭저럭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자신감 내지는 낙관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친구하나 가족하나 아무도 없어도,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아도 내 몸만 건강하면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반면에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면서 아주 많은 것을 나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야 사람사는 것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친구에게 충실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해서 싸움도 나지 않던가. 

 

행복공동체라고 부를수 있는 이 집합은 사람마다 다르고 아주 엄밀하게 정의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충 말해서 이런 저런 것들이 유지된다면 나는 그럭저럭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 대처해 가면서 이 세상을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들이 이 행복공동체를 구성한다. 배우자만 있다면 이 세상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우자가 그 행복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회사와 돈과 친인척으로 이뤄진 큰 가문따위가 행복의 절대조건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공동체가 그런 것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행복공동체가 반드시 커야 한다던가 작아야 한다던가 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키가 다르듯이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르게 태어난다. 그래서 자연스레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서로 다른 것들에 의존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 온 서로 다른 선택들이 이 행복공동체의 크기를 결정한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 행복공동체의 크기와 구성요소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서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행복공동체의 크기는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행복이 우주적 질서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분이거나 아주 골치아픈 분이다. 둘 다일지 모른다. 행복공동체에 온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으니 밤이고 낮이고 걱정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 분은 아마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들에서 성공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괜찮은 조건을 유지하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은 행복해 질 수가 없다. 행복공동체에 빠진게 있는 것같다. 여전히 뭔가가 부족한 것같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늘상 우울하다. 행복은 불가능하다. 

 

행복공동체가 자기 자신밖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사람도 대단한 분이거나 아주 골치아픈 분이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 크나큰 착각일 수 있다. 즉 나는 세상의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착각에 빠져서 자신의 행복공동체안에 자기자신만 포함시킨 사람은 언젠가 아주 뼈아픈 고통을 당할 것이다. 언젠가 인생 완전히 잘못살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양극단의 중간에 존재하지만 대개는 여전히 아주 많은 것들을 그 행복공동체안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걱정거리가 많다. 직장도 가족도 친구도 친척도 명예도 돈도 직업적 성취도 지적 성취도 모두 행복의 절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바쁘고 걱정할 거리가 많을 것인가. 그 중 하나만 흔들려도 내 인생 끝난다고 생각할 판이니 밤이고 낮이고 하나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힘들게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잘 날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자식에게 매정한 부모는 좋지 않지만 자식들이 없으면 아예 이 세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수준으로 집착하는 부모는 밤이고 낮이고 자식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피곤하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부모든 자식이든 행복은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이제까지 글을 쓰면서 나는 행복공동체의 테두리가 비교적 또렷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사람에 따라 그 또렷함은 차이가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자기 행복공동체의 테두리를 탐험해 본적도 없다. 실은 자기에게는 별로 필요도 없는 것인데 남들이 그것이 좋다고 해서 열심히 그걸 얻으려고 하면 덩달아 그것을 향해 뛰어가는 식인 경우가 많다. 때가 되면 진학하고 때가 되면 취업하고 때가 되면 결혼하고 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그저 남들처럼 적당히 살다보니 그저 남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전부 끌어 모았다. 남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 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그 남들도 자기 행복공동체가 뭔지 잘 모른다. 모르면서 말을 하니 말이 자꾸 바뀐다. 마치 답을 모르는 학생들이 서로 서로 컨닝을 하면서 답을 베끼는 형국이랄까.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일 수록 더 쉽게 확신을 한다. 그러니까 제일 바보같은 인간이 행복이란 당연히 뭐뭐뭐아냐?라고 말하면 자신감없고 게으른 사람들은 그걸 그냥 따라가는 경우도 생긴다. 반대로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느끼는 비교적 현명한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난 사실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니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진짜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상의 흔한 비극중 하나다. 우리는 제일 멍청한 사람을 따라가는 장님들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도대체 나의 행복공동체는 뭘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치 샌드위치따위는 절대 싫어하면서도 날마다 참치샌드위치를 먹는 것같은 삶을 보낼 수 있다. 

 

행복공동체의 테두리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사실 행복공동체의 테두리가 하나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앞으로 한시간동안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과 앞으로 50년을 살아가는데 나에게 뭐가 필요할까를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때문에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것처럼 자신이 불치병에 걸려서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갑자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자기가 어렴풋이 느껴온 행복공동체의 테두리가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이다. 내일 죽을 것이라면 승진을 한다던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치병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 시간단위에서 하루 단위에서 한달이나 일년단위에서등 여러가지 시간적 단위에서 우리는 질문을 다르게 던질 수 있다. 그리고  공간적인 혹은 사회적인 위치의 변화를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그냥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루짜리 나라던가 서울에서 사는 나라던가 이런 저런 사람들과 싫던 좋던 지속적으로 만나는 나라던가 하는 나가 모두 크고 작게 다르고 그 나를 행복하게 만들 필요조건도 달라진다. 우리는 언제나 평생이라는 시간개념속에서 행복을 생각하고 살아갈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영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근사한 카페에 앉거나 예쁜 집에 앉아서 혼자만의 한두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걸 보고 아 저게 근사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이 직접 해보면 그건 생각보다 따분하기만 하고 좋은건 하나도 없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잠깐의 고독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꼭 고독을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두시간의 고독도 즐길 수가 없다면 왜 나의 행복공동체는 이렇게 클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우리가 가진 집착이나 애정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불행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행복공동체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종종 망각되는 것이지만 사회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 사회적 공동체를 자신의 행복공동체로 사람들이 생각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과연 한국 사회라는 사회적 공동체가 나의 행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필요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은 어림도 없으며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을 찾아 한국바깥을 헤맬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대부분이라면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인 구심력은 매우 약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나 문화등의 가치는 그리 높게 평가 받지 못할 것이다. 

 

유감이지만 불행한 식민지의 역사때문인지 한국인들중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다고 나는 느낀다. 그들에게는 행복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한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어느 지역이든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너무 약하다. 즉 한국인은 안돼, 조선놈은 안돼같은 말을 쉽게 하고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어리석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한다. 고향을 떠나고 고국을 떠나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약화시킨다. 그래서 약화된 공동체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 혼란은 그 공동체가 본래 무의미하거나 행복을 주기에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다시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행복에 대한 자신감을 계속 파괴하기만 하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아주 많이 묘사되는 인간형은 수동적 인간형이다. 그것은 한의 정서라고도 표현되는데 정말 냉혹한 세상이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인간에게 주면 그 상처를 계속 수동적으로 삼켜내기만 하는 인간형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의 승화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말해지지만 실상 이 세상은 한없이 무서운 곳이라는 불신의 강화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한국인은 한국 사회에 대해 좀 더 긍정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안된다는 생각이 그것을 안되게 만든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그리고 아직 이 세계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역할이 큰 의미를 가지는 세상인 이상 행복에 대한 불신과 자신감없음은 우리를 실제로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희망의 길은 행동과 실천속에서만 열릴 것이다. 실제로 괜찮은 한국인의 예를 볼 때마다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 진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 더 많은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행복의 자신감이 한국 사회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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