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진리를 찾아서

by 격암(강국진) 2015. 3. 3.

15.3.3

진리를 찾아서라는 말은 우리들이 일상에서 입에 담기에는 종종 너무 무거울 때가 있다. 여러분이 친구들 모임에서 나는 진리를 찾아서 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개의 경우 그 모임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돈이나 명성이나 멋진 이성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익숙한 웃음으로 환대받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른 새벽에 일어나 홀로 있을 때 그것을 입에 담아보면 진리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진리가 뭔지 몰라도 우리는 진리를 찾고 싶다.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를 가르쳐 주고 행복을 줄 것만 같다. 마음의 평화를 줄 것 같다.

 

진리를 찾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대표적인 것들에는 종교적인 방식과 과학적인 방식이 있다. 종교적인 구도의 길은 성스런 문구를 암송하거나 정성스런 기도를 하거나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간디같은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진리를 찾기위한 실험으로 말했으며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이력과 명성이 어떠했건 그는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진리를 찾는 사람이 정치적 행동을 해야할 상황이 되었기에 그렇게 했을 뿐 정치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삶은 그저 진리를 위한 실험이었을 뿐이다.   

 

과학적인 방식은 세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법칙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간결하게 이해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를 찾고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적인 구도의 길이랄까.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원숭이가 보기 나름에 따라서는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은 특별히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이외의 생명이란 인간이 먹거나 사용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종교적인 관점과 충돌했다. 요즘도 우리는 여러가지 심리학적인 법칙을 통해 우리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진실을 찾곤 한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 우리는 왜 서로 미워하게 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모든 방법은 아니며 앞에서 말했듯이 진리를 찾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마라톤 선수가 모두 구도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마라톤선수는 길 위를 뛰고 또 뛰면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구도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삶의 진실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돈과 명성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하겠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마라톤 선수나 작가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긴 산책을 통해서 혹은 새벽부터 가족을 부양하기위해 일하러 집을 나서면서 구도의 길을 걷는다. 아내를 위해 빵을 굽거나 커피를 만드는 것도 구도의 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행위의 종류에 있다기 보다는 우리의 관심에 있다. 우리가 삶의 진실이나 진리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매 시간이 구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구도의 방식에는 종교와 과학의 길, 두가지가 있다는 말은 지나친 단순화다.

 

구도의 길은 무한하다. 다만 진리에 가까이 다가갔다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종종 종교적 방식이나 과학적 방식을 따른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적어도 몇몇 사람들은 종교와 학문을 통해 지혜를 얻은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단체를 만들고 형식을 만들었다. 그들의 방식은 문화가 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식의 구도를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도를 아십니까라던가 구원받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즉각 이게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듯이 말이다.

 

문제는 형식이 오히려 내용을 가로 막는 경우다. 아무 형식이 없이 세상을 살 때 우리의 배움은 한없이 느려지지만 우리가 어떤 형식에 빠지게 될 때 우리의 배움은 완전히 중단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종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흔히 보는 기독교인들과 불교도중에서 정말로 예수나 부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가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열망을 막는 마취제가 되는 것같다. 종교가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을 더 많이 보여주는 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눈을 더 좁고 어둡게 만들어 세상에 대해 눈멀게 만드는 것같다. 지나치게 일찍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언하고 거기에 매달리면서 삶의 위안을 찾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같다.

 

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즘 과학을 말할 때 그것을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과학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뭘 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돈이나 명성? 육신의 편함? 그것은 수단과 목적이 뒤집어진 경우가 아닐까? 그런 것들이 나쁘다거나 필요없다기 보다는 그런 것들이 당신에게 행복과 의미를 주지 못할 때 그런 것들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돈과 명성이 있다면 왜 행복하질 못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한국사회를 보라. 한국사람은 백년전만 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이후에 해방이후에 그랬다. 지금은 남들이 알아주는 대단한 부자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살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결혼도 못하고 절망하는가.

 

모두에게는 모두의 삶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다. 내가 티브이를 보든 설거지를 하든 누군가를 만나서 잡담을 하든 나는 진리에 대한 관심만은 잊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이 똑같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진리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구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질문이 중요하다. 그리고 질문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진 날 글을 쓰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있게 살기  (0) 2015.03.30
바보와 욕망  (0) 2015.03.19
행복공동체와 행복의 자신감  (0) 2015.02.11
설득과 삶의 방식  (0) 2015.01.24
멋지게 떨어지기  (0) 2015.01.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