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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러닝맨이 보여주는 한국

by 격암(강국진) 2015. 4. 6.

주말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런닝맨을 부분적으로 같이 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화에서는 여자손님들과 짝을 지워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러닝맨이 재미있으면서도 내내 불편하더니 키쓰미션이 나오는 쯤에 되어서는 좀 많이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보니 그렇게 느낀 사람이 나뿐은 아닌 것같다. 


문제는 뭐가 불편한가, 그 불편함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로는 많은 한국사람은 여전히 뭐 그런 걸가지고 도덕군자처럼 떠드나 재미만 있구만 이라고 말할 것이다. 불편하게 생각해도 불편함의 이유가 다를 수있다. 나는 이 문제를 사고방식의 측면에서 진지하게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하는 기준을 논하기 전에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보라. 미국에서 미국인 출연자들로 러닝맨 프로그램같은 것을 만들까? 만들면 미국인들이 좋아할까?  나는 미국에서 하는 것이면 무조건 옳다거나 미국인들은 도덕적이다라고 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면서 사소하다면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어떤 것도 흑백은 아니다. 다만 적절한 수준의 선이 어디인가의 문제다. 우리는 남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고 우리 나름의 선을 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출연자들이 스킨쉽을 가질 연인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이건 그런 관계를 상정하고 벌어지는 연기도 아니다. 이건 그냥 현실세계에 그대로 있으면서 웃고 떠드는 예능이다. 영화속 한장면이라면 하하와 송지효가 베드신을 찍어도 뭐라고 그럴 사람이 있을리 없다. 게다가 하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핵심이 아니다. 이건 그냥 게임이다. 이건 남녀 관계 같은게 아니라고 하는 건 위선이다. 그들은 분명 남자끼리 여자끼리 짝을 짓지 않고 일부러 남녀로 짝을 지어서 그런 게임을 하고 있으니까. 


미국에서의 분위기라면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훨씬 더 크게 느끼면서 사귀는 사람도 아닌 사람들을 짝지워서 분위기로 스킨쉽을 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에 대해 항의할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 불편함의 근원에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 사고와 집단주의적 사고다. 즉 내 결정은 내가 내리고 내가 책임지며 따라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만을 해야 하고 한다는 사고에서 러닝맨이 보여주는 풍경은 매우 불편한 것이다. 미국은 그것을 강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집단주의적 사고에서는 비록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책임을 질수도 없어도 집단이 그것을 원하면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으며 책임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집단이 진다고 말해지고 느껴진다. 이런걸 흔히 말하는 식으로는 분위기를 깬다라고 말한다. 다들 게임을 하는데, 다들 오른쪽으로 도는데 너만 왼쪽으로 돌겠다는 거냐.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하와 송지효가 어디서 단둘이 만나서 단둘이 게임으로 키스를 했다고 하자. 그건 분명 스캔들이다. 게임이었다라는 말로 그냥 넘어갈리가 없다. 그런데 집단이 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단순히 방송이라서가 아니다. 집단이 되면 책임은 서로 서로에게 전가된다. 그냥 분위기가 그래서 그랬다. 남들도 그러니 어쩔수 없었다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해도 집단으로 할때와 개인으로 할때 평가가 크게 갈린다. 


러닝맨 게임이 보여주는 집단적 사고의 불편함은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 깊숙히 퍼져있다. 그것은 성추행과 룸싸롱문화, 군대문화와 투기열풍같은 것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직장상사가 노래방가서 이성의 하급직원에게 부르스한번 추자고 한다. 만약 둘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넘기 힘든 장벽이지만 너도나도 그렇게 하는 분위기에서는 그렇게 안하는 여직원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상급직원을 무안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유럽의 쌀롱문화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룸쌀롱문화는 한국적이고 일본적인 것이다. 서구에서도 매춘이 있다. 서구의 성윤리가 항상 우리에게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매춘과 매춘이 아닌 것은 확고한 구분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 성추행에서 성매매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단순한 놀이와 게임이라면서 애매하게 표현된다. 개인은 즉 개인의 의지는 종종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실종된다. 그것도 어둠의 세계에서 그러는게 아니라 공식적으로. 


나는 인간이 가진 욕구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불륜이나 성적으로 지나친 유희를 즐기는 것이라고 해도 이 글의 맥락에서 그걸 비판하고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모두 성인군자로 그런 욕망을 느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 이전의 수준으로 가면 인간은 다 비슷하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욕망을 어떻게 문화로 풀어내는가에 있다. 


이 글의 핵심은 나는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다라는 그 소망이 중요하다라는 것에 있다. 설사 과반수가 뭔가를 하고 싶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나는 그것을 안하고 싶다고 할 때, 때로 선택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경우도 있어서 우리는 흑백으로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그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분위기로 밀어부쳐서 이건 게임이다, 너만 튈거냐 같은 말을 하면서 뭔가를 강압하지 않는 세상이다. 강압하는 사람들은 나는 강압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겠지만 실은 강압은 존재한다. 나는 이런 건 싫다라고 말할 때 간단히 그래 알았다고 받아주지 않으면 강압이다. 그러나 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는 크지만 한국 문화에서 그렇게 받아주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게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정치적인 단순함, 부패, 성추행과 불륜, 투기바람등 온갖 사회악으로 이끈다. 흔히 남자는 군대에 가서 온갖 나쁜 짓을 배워온다고 말해진다. 그게 전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가 군대를 겪으면서 집단주의적 사고가 판을 치는 한국현실을 생생히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여자도 이런 게임들을 통해서 그런 집단주의적 사고를 주입받는다. 그렇게 웃고 즐기며 살다보면 어느새 인간이 변한다. 그 결과중의 하나는 집단뒤에 숨으면 책임을 지지 않고도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비겁함을 배우는 것이다. 세월호같은 사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눈을 감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 국회나 저기 어느 높은 관직에 서면 분위기에 저항할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방송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국민들이 같이 웃고 떠들일은 아니다. 무슨 국민 우민화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나이가 있고 경험이 많은 지석진과 유재석이 남자들로 짝을 지어서 이 게임에서 빠진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신경이 쓰인다. 그것이 우연이 아닐거라고 생각된다. 실은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할 위치에 있었기에 열외로 빠진 것이 아닐까? 적어도 방송에서 그런 모습보이기 싫으니까.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대개 열외로 빠지기 참 힘들다.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알아서 판단의 열외로 빠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온갖 압력속에서 튀지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비록 남녀가 웃고 즐기는 게임일지라도 그것은 공포스러운 즐거움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웃고 있기에 더 공포스럽다. 특히 그 게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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