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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망의 시대

망의 시대 4. 과학이 주는 답, 망이 주는 답

by 격암(강국진) 2015. 5. 8.

종교인과 지식인 그리고 망의 인간은 어떻게 생각과 사는 법이 다른가. 이 방식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뿐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배척하고 분명히 어딘가에서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신이 주는 영감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지식 혹은 과학은 관찰의 결과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망이 답을 주는 방식은 보다 더 열린 마음으로 데이터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통계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통계적이라는 말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간단히 한가지를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확률통계분야에서 빈도주의자의 접근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식과 과학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베이지안이라고 불리는 것은 망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지안 방식에서는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프라이어라는 우리의 주관적 가정을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확률을 계산한다. 빈도주의자 방식은 이에 반하여 주관적인 무지를 도입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의 실제 삶은 무지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마치 게임의 규칙을 전부 모르는 게임을 하듯이 살아야 하는데 빈도주의자의 확률은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전제하며 불확실성을 다룬다. 따라서 실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확률을 쓸 때 한계가 있을 때가 많다. 

 

종교와 과학 그리고 망이 답을 주는 방식을 보다 구체적인 예를 통해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여기 암환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이 환자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종교적인 사람은 이 답을 기도를 통해 구할 것이다. 신이 우리의 기도에 답할 거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답은 이에 대한 법칙이 있는가를 찾아보고 그게 없다면 이런 암에 걸렸던 환자들의 자료를 많이 모아다가 그 자료의 평균값을 도출하려고 할 것이다. 망의 방식도 과학적 방법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을 통한 답은 주어진 상황과 아주 비슷한 예에 더 집중한다. 이는 현실을 단순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망의 시대에는 과학의 시대보다 더 방대한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암환자와 단순히 병명만 같은 게 아니라 여러가지 조건들이 정말 비슷한 경우들만 추려서 그 예들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방법들이 모두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방법은 종교적 방법과 완전히 다른 것같지만 사실 과학적 가설 검증의 기본 조건은 검증할 이론이나 가설에 대한 영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과학적 문화에 익숙한 인간들은 종교인이 신의 계시를 받아 성서를 썼다고 하면 그것을 비웃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현대과학도 영감와 우연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있을 수 있었던 모든 가능한 경우를 다 뒤져서 과학을 발달시키는게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뒤져도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도 우리가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매우 신비한 방식으로 받은 영감이 구술되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학은 물론 실험과 확인의 단계를 거치지만 애초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정답을 떠올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과학이론이 적혀있는 책이란 신의 계시를 받아적은 종교적 성전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망의 답도 과학과 지식의 답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이나 지식은 원천적이고 단순한 원리나 법칙이나 이해가능한 질서를 훨씬 더 많이 도입한다. 망은 인간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불가능한 데이터도 다루는데 반해 과학이나 지식시대의 데이터는 인간이 이해가능한 범주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지식의 시대에 데이터는 인간이 관찰하고 인간이 기록하고 인간이 분석한다. 망의 시대에는 꼭 그렇지 않다. 

 

지식시대의 접근은 관찰과 기록이 우리에게 지식을 주고 그것이 법칙과 답을 줄거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이것이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은 아니다. 개미가 열심히 과학적 방법을 따른다고 해도 양자역학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적어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어렵다. 개미는 매우 유한한 존재로 개미가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지식은 매우 단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력으로 의미있는 법칙이 찾아질 수 있는 가하는 것도 본래 당연한 것은 아니다. 우주적 규모에서는 인간과 개미의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가 100여개가 아니라 1만개나 10만개였다면 인간이 원자론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힘이 4가지가 아니라 만가지나 1억가지였다면 자연법칙따위를 인간이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우주적 스케일에 있어서는 10과 1억의 차이는 별거 아니다.

 

과학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므로 결국 자연에 대한 편견없는 관찰의 결과일 수는 없다. 인간의 과학은 인간의 관찰과 이해능력에 걸맞는 지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계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기반한 망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이론과 법칙과는 다르다. 그것은 개인이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세계 바둑 챔피언을 이기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런 인공신경망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걸 써서 바둑 세계챔피언을 이길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떻게 바둑을 잘 둘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여기서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인공지능을 이용하면 금방 지금의 문명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적어도 당분간은 그다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을지 우리는 모른다. 그곳은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다. 인류는 지금 다시 한번 새로운 영역으로 가고 있다. 한발만 더 가면 보물들이 많을지 이 길은 생각보다 훨씬 황량해서 오랜 길을 가기 전에는 별 성과가 없을지는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종교와 과학과 망의 답이 가지는 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미디어의 차이고 가지고 있는 자료의 양의 차이다. 종교는 극단적으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이런 시대에는 천년전의 사람이 신에게서 받았다는 계시가 권위를 가지고 통용된다. 이에 비해 과학은 어느 정도 자료가 있는 경우에 우리가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제 지식과 데이터에서 법칙을 찾고 일반화된 예측을 추론해 내려고 한다. 망의 답은 이제까지의 역사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는 방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만들어 진다. 그 데이터는 단순히 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질도 다르다. 2백년전에 우리가 그리스같은 외국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여행하고 그걸 측정하거나 관찰해서 인간의 언어로 남기는 것을 말했다. 사진기도 없었으니 고작해야 그림을 그리는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은 그리스에 대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가 존재한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 불가능했던 과학적 측정 데이터도 있다. 즉 인간의 언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변형되고 요약되는 데이터가 아니다. 

 

과학이란 어떤 의미에서 단순한 자연법칙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을 자연법칙이 대체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법칙이 없다면 과학의 힘은 크게 제한된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그 공식속에 단지 중력상수 하나와 두 물체 사이의 거리라는 변수 하나 그리고 두 물체의 질량이라는 변수들 두 개를 가질 뿐이다. 뉴튼의 중력법칙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면 중력법칙은 발견하기도 어려웠고 증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진정한 중력법칙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필요한 상수가 열개쯤되고 변수가 20개쯤 등장한다면 데이터의 양과 오차를 생각했을 때 어떤 관측도 측정 오류로 설명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의 뇌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설혹 뇌나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상수와 변수들이 존재한다. 이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관찰이 있었지만 현대인들도 뇌와 사회에 대한 중력법칙같은 간단한 법칙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충분하지가 않았다. 어떤 데이터도 아주 작은 이론의 조작으로 다시 설명가능해지기 때문에 거꾸로 이론들간의 변별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유사과학이라고 비판한 것도 기본적으로 이같은 이유다. 과연 기계가 수집할 데이터는 이 한계를 넘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과학과 지식을 통해 세상의 질서와 법칙을 발견해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로 인해 수없이 많은 신화와 유령이 사라졌다. 다시말해 법칙에 대한 과학적 신앙은 실제로 위대한 성과를 만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같은 신앙을 신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과학을 하고 지식을 쌓는 것은 망할 수도 있었던 도박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애초에 당연히 택해야 했던 방식이라고만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접근하는 방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교적으로 사는 법을 과학적으로 사는 법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이제 망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저항하고 있다. 왜냐면 과학적으로 사는 법이 본래부터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고만 믿는 독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이렇다. 우리는 삶이란 것에 대해 관찰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아마도 이는 직접 경험도 있겠지만 많은 책과 대화를 통한 간접적인 데이터 수집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삶 안에 우리가 발견하고 이해가능한 어떤 질서와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게 된다. 지식의 시대에 우리는 지식에 기반해서 살아간다. 

 

망의 시대의 인간은 조금 더 겸손하게 산다. 우리는 법칙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기억한다. 망의 방식이란 비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진정으로 과학적이고 성숙한 태도다. 아이의 성장을 생각해 보자. 어린 아이는 단순한 세계안에서 살면서 그 단순한 세계안에서만 통하는 것을 법칙으로 이해하면서 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처음부터 너무 큰 어른의 세계의 모든 것을 듣게 된다면 그 아이는 결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성장하고 경험을 쌓게 되면 이제 그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규칙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집이나 학교, 부모와 선생님이 만들어 준 틀을 벗어나야 하고 그들이 정해주었던 규칙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더 복잡하고 큰 세상에서 그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게 될 것이고 그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보고 놀란 사람이 허둥대고 적개심을 가지게 되는 것같아 보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틀이란 결국 조악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진짜 과학이나 자연법칙같은 게 아니다. 작은 세계, 작은 게임에 갇혀서는 안된다. 

 

망의 인간은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한 자각이 훨씬 크다. 그리고 집단적 선택 즉 망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물론 모든 집단이 개인보다 더 현명한 것은 아니다. 파벌로 갈라져서 서로를 돕는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힘을 제약하는 집단은 개인보다 더 불합리할 수 있다. 우리는 국회에서 이같은 집단을 쉽게 발견한다. 정치적 파벌은 하나 하나의 정치인이 솔직하게 개인으로 소통하는 것을 막게 된다. 그래서 자유를 잃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 진정한 망이 출현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망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세상을 망이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자동차가 있어도 그 자동차를 타야 빨리 갈 수 있듯이 우리가 집단의 힘을 부정하고 대중은 어리석다고 단언해 버리면 망의 힘은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망의 선의도 믿어야 한다. 내가 세상을 걱정하듯이 망도 나를 걱정하고 세상을 보살필거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부부사이같은 작은 집단에서 이미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좋은 부부가 되려면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고 믿는 것이 꼭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다 확인하고 판단하려고 들면 부부의 힘은 발휘되지 않는다. 부부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선의를 믿고 의지해야 하고 그럴 때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부부는 성공할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같지만 지식의 시대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다. 지식의 시대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자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식에 의존하여 고독하고 개인적인 판단을 계속하도록 배운다. 믿음의 가치는 지식과는 충돌한다. 옷에 대한 선택을 예로 들어보자. 지식의 시대에 좋은 옷을 좋은 지식이 선택해 준다면 망의 시대에 좋은 옷은 대부분 망에 의해서 추천되고 거기에 내 선택을 약간 더해서 선택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내가 선택해주는 것을 믿는게 망의 시대의 선택이다.  물론 정확히 우리가 어떤 망을 가지게 되는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달에도 크게 의존하게 된다. 

 

망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망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망의 삶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감수성으로 만들어 진다. 망의 삶은 전체를 보려고 하고 최소한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망의 일부이며 팀플레이를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만 동시에 그러면서도 전체를 나의 관점과 생각대로 이끌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멀어지고 관계를 끊어버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하나가 되지도 않는 것이 망의 삶이다. 여기 객관적 진리가 있으니 듣고 깨달아라라는 식의 계몽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망의 삶, 망의 방식은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종교적 삶과 비슷하고 특히 동양의 비인격적 신을 상정한 종교들과 비슷한 면도 있다. 왜냐면 무지와 불확실성을 강하게 인지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계속 되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비록 우리가 그 전체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두를 이롭게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중심질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도가 뭔지 말할 수 없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불성이 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며 심지어 유교에서도 군자가 뭔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동양의 사고는 세계에 대한 겸손과 한계를 품고 있다. 이것은 지식 시대의 인간이 가지는 오만과 대비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쉽게 강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린다. 왜냐면 그나 그녀는 강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이 뭔지 아는 사람은 강을 파괴할 수있다. 원하면 다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무지를 인식하는 사고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공존하라고 말한다. 알 수 없는 불성과 도가 존재하는 세상은 어느 것하나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는 부분이 없는 귀한 것이다. 

 

망의 방식이란 겸손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자신의 한계를 우리는 손잡게 된. 지식의 시대에서 인간은  우주의 법칙을 자기 머릿속에 넣을 때 마치 우주의 지배자가 된 것처럼 감격하고 흥분한다. 망의 시대의 인간은 법칙과 지식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 한계를 언제나 의식한다. 그리고 자기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있는 망의 중심질서와 연결되어졌다는 것을 이따금 느낄 때 감격하고 흥분한다. 그 위대한 힘을 느끼고 안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믿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망의 방식이란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 말의 의미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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